알기 쉬운 성경 말씀

내 마음의 바벨탑

chukang 2010. 10. 9. 19:36

 

첨부파일 내 마음의 바벨탑 창세기 11.hwp

 

 

내 마음의 바벨탑 창세기 11:1-9

 

  여러분은 바벨탑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바벨탑이라는 것이 성경에 쓰여 있기 때문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보지만, 그래도 그 모양이 어떤 것인지, 얼마만한 크기인지,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과학 기술의 수준으로 볼 때에 당시 미개인과 같았던 시대에 그런 바벨탑을 정말로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바벨탑이 발견되는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인데 약 30여개가 확인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바벨탑을 세상 사람들은 ‘지구라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대(臺)’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탑이나 탑과 비슷하게 견고하게 높이 쌓은 구조물들을 가리킵니다.

  고벨 바벨론에서 출토 된 서판에는 ‘지구라트의 건설로 하늘의 모든 신들이 분노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 밤 한 신이 내려와 이들의 작업을 방해하였다. 결국 이 건설작업은 중단되었고, 인간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채 흩어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에 바벨탑은 여러 지구라트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대로 가면서 지구라트의 규모가 작아졌지만 초기의 지구라트는 거대한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지구라트들은 당시에 있던 일반 파수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목적도 역시 다릅니다. 주로 벽돌로 지어졌는데 이 벽돌은 햇볕에 말려 단단하게 만든 인공적인 벽돌인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모양은 거대한 산처럼 생겼고, 크기는 제일 큰 것은 바벨론의 폐허에서 발견된 것으로 제일 아래 길이가 122m나 되며 높인 약 50m가 된다고 합니다. 현재의 건물을 지을 때에 1층을 3미터로 하는데, 무려 18층이나 되는 높이입니다. 일부 학자는 90미터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30층 규모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지어진 것입니다. 지구라트는 기단이 더 높게 만들어져서 7층으로 된 계단식 탑인데, 바깥쪽에는 벽돌과 역청으로 버팀목을 만들었고, 안쪽에는 진흙을 쌓았습니다. 각 층마다 다른 색으로 칠했는데, 그것은 당시 알려진 일곱 행성으로 아래부터 흑-토성, 황-목성, 적-화성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전이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점성술이나 하늘 숭배의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바벨탑은 여러 군데에 있었지만, 성경적으로 본다면 이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에 아브라함이 살던 ‘우르’라고 하는 도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르에도 지구라트가 발견되었는데 계단식 정방형이엇으며 단단한 벽돌로 지어졌습니다. 이 도시의 발굴작업은 1922-1934년에 울리(C.T. Wooley)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지구라트에는 달의 신 난나르(Nannar)와 그 아내 닌갈(Ningal)에게 봉헌 되어진 두 개의 신전도 발견되었습니다. 역청을 입힌 수도관, 주방, 상, 화덕 등이 발견 되었으며, 과일과 가축의 가죽 등을 저장한 창고와 상접, 제분소, 의상, 작업 등의 흔적이 발굴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도로 발달 된 문명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던 사람이며, 당시 우르의 통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수 24:2) 고대에는 대부분 제사장이 곧 통치자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르의 전체 통치자인지 아니면 한 부락의 통치자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급변적인 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르의 군사적이나 기타 격변으로 인하여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떠나게 한 한편 택한 백성의 시조로 삼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서 바벨탑은 성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구속사는 어떻게 전개가 되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당시에는 언어가 하나였다고 하였습니다. 바벨탑이 세워진 시날(바벨론의 옛 이름으로 추정함) 땅에 사는 사람들만 같은 언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또한 온 인류는 한 조상에게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어(데바림 아하딤:דברים אחדים)”는 ‘하나의 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한 언어’가 어떤 종류의 언어인가보다는 인류가 한 조상 아래서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조상의 자손들이(모든 사람들) 당시 환경적으로 한 곳에 모여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대부분 정착 생활을 하기보다는 유목 생활을 하였다고 볼 때에, 더 좋은 장소로 이동을 하는 과정이 있었으며, 이들은 시날이라고 하는 평지에 도착을 하였고, 그곳이 함께 모여서 살기에 매우 좋은 환경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대홍수가 끝난 뒤에 방주는 ‘아라랏산’에(지금의 아르메니아) 내려앉았고, 지금도 그 지역은 성경에서 노아가 처음 농사를 포도 농사를 지었다고 한 것처럼, 아라랏 지역에는 질 좋고 맛있는 포도가 많이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쪽은 북쪽으로 매우 춥기도 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남동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였고 시날 평지에 도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렇게 좋은 땅을 만난 후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즉 이들은 벽돌을 만들어 구어 단단하게 만들고 역청을 사용하여 ‘성과 대’를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시날 지역은 바벨론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곳은 평지이기 때문에 돌이 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햇볕에 말리고, 불에 구워 단단한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이 있다고 볼 때에 상당한 건축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대에 바벨론의 성이나 건축물들이 돌이 아닌 벽돌로 지어졌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성과 대를 쌓아서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는 매우 높게 쌓는다는 표현입니다.

 

1. 바벨탑을 쌓는 목적

  첫째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탑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행위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류가 번성하여 온 땅에 채우기를 원하셨고 또 이를 직접 명하셨기 때문입니다(창 1:28).

 

2. 바벨탑을 쌓는 인간의 악한 생각

  바벨탑은 교만의 표본입니다. 즉 높은 건축물을 쌓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보이고 그 능력으로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악한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보다 자신의 명예를 높이기에 급급한 자는 항상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범할 위험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벨탑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서 흩어지지 않고 살겠다는 것은, 권력과 관계가 되는 것이며, 함께 모여 있어야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원리를 터득하고 실천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어찌 가만 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악이 관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시기로 결정을 하셨습니다. 대홍수가 난 그 배후에도 다 함께 모여서 살았으며, 함께 모여서 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질서가 필요하게 되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의 구심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구심점은 당연히 하나님이 되셔야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면, 제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생각이나 습관 또는 좋아하는 것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여러 형태의 문화가 발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문화가 하나님 중심의 긍정적이고 발전적이면 좋겠지만, 하나님 대신 우상을 구심점으로 만들어 놓은 지배계급은 문화를 쾌락, 또한 향락적인 것으로 채우고 백성들을 현혹시켜 지배를 강화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 사회는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고, 대홍수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후손들 역시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성품을 닮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아는 비록 당대의 의인이었지만, 그 역시도 인간이었고, 실수도 하였습니다. 그 아들들과 자부들도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기억들과 행위들은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을 차츰 잊기 시작했으며, 반대로 부패한 인간의 속성으로 인하여 그들은 또 다시 우상을 만들고 악한 쾌락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렇게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여기에서 먼저 ‘무리’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는 ‘결합하다’(아맘:אמם)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동질성이 강조되는 ‘암(אם)’이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말에 이어 ‘통일’, ‘하나’, ‘같은’ 등의 뜻입니다. 당시 인간들은 홍수를 경험하고 난 후 성결한 삶을 살기보다는 죄를 짓는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죄성이 인간들로 하여금 서로 죄를 짓는데 동참케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즉 이후로는 어떤 것도 그들을 훼방하지 못하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사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의 악행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 ‘무지개 언약’으로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벨탑을 중심으로 인간이 뭉쳐 살면서 더 이상 죄악이 관영한데까지 이르러 또 다시 다른 심판을 내리지 않도록 그들을 흩어버리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흩어버리시는 것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언어를 혼잡하게 했다고 해서 하나로 묶여져 있던 그들을 흩어버릴 수 있을까 의문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깊이 생각을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같은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도 때로는 잘못 알아들어서 오해를 하고 다투거나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물질과 관련되거나, 자존심의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벨탑을 쌓는 과정에서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서로 자신의 생각대로 하려고 하니까 일이 진척될 수가 없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에는 작업장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무리들이 흩어지고 그곳을 ‘바벨(בב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섞다, 섞이다’는 뜻에서 ‘혼란’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입니다. 반역하는 인간의 마음은 악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 악한 것들, 악한 마음과 생각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행위가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방법, 인간의 계획, 인간의 지혜 참으로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속성을 일부나마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를 갈망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데.... 좀 잘했다 싶으면 이거 내가 한거야.... 그러나 겸손한 성도라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높이기를 원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교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했던지, 하든지, 하려고 하든지, 하나님을 높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바벨론 사건은 곧 인간 중심의 생활을 말합니다. 물론 인간 중심리라는 것도 교만에 포함이 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집단적 자기중심은 곧 다른 집단과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간 전체의 중심적 생활은 하나님과의 마찰을 가져오게 되고, 성경은 이를 가리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결국 바벨탑 사건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려는 악한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그 악한 사건을 통하여 오히려 택한 백성을 가려내시는 구속의 은혜(제한 속죄)를 베푸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벨 사건 뒤에 곧 이어서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구속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생각과 계획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 내 판단이 우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바벨탑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은 곧 잘못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시날 평지에서 흩어지기 시작한 무리들은 또 다시 방랑과 방황의 시간들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고탄과 역경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악의 무리를 흩으시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찾아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만일 바벨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멸망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바벨탑 그것은 우리의 교만과, 악한 생각들과 습성들입니다. 이것이 깨질 때에는 큰 소리가 나고 고통이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요, 우리의 괴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요, 반대로 우리가 변하여 새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 작업이요, 그로 인한 연단이요, 연단에는 고통이 따라올 수밖에 없지만, 그 뒤에는 우리가 정금과 같이 변화를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변화가 올 때에 내 영혼이 잘되어지는 것이요, 영혼이 잘 될 때에 삶이 잘되어 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므로, 감사하는 자세를 가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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