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무엇을 구하니

chukang 2010. 9. 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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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구하니 마태복음 20:20-28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으뜸이 되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 지배하고자 하는 크고 작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모함하거나,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우월한 사람을 어떻게 해서라도 밟고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세상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의 나라가 세워질 때 자기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는 내용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삶에 대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될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얼마 남지 않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해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옴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어서 제자들이 당황하지 않고 이를 잘 극복하며 대처하도록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깊은 뜻을 깨닫기는커녕 영적 무지로 인하여 여전히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으며, 또한 서로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에는 자기 어미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야심 혹은 야망을 달성하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  세베대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이고, 그 어미는 살로메입니다(4:21; 16:1). 살로메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친 자매로(15:40; 19:25) 예수님께는 이모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요한과 야고보는 이종 사촌 관계가 됩니다. 이러한 인척 관계는 살로메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의 아들들을 하나는 우편에 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기에 어색하지 않는 배경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야한과 야고보는 비록 이종 사촌간이지만 베드로와 함께 3대 제자로 알려질 정도로 충성을 하였는데, 이 같은 열성을 이후의 구체적인 지위로 보장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야심을 스스로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자신의 어머니인 살로메를 통해서 대리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로메는 이것을 아들들에 대한 모성애로서 서슴없이 간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들과 어미는 일심동체가 되었습니다. 비록 어미를 통해서 간청했더라도 그것은 바로 야고보와 요한의 말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인 살로메의 간청이 자신의 두 아들들을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인데, 이는 왕의 보좌에 가까울수록 중요한 자리였음을 감안할 때 제자들이 앉게 될 열 두 보좌 중에서도 수위의 자리를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나 그의 어미인 살로메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정치적인 왕의 취임식 정도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살로메가 언급한 주의 나라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지상의 왕국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 이해한 야고보나 요한의 입장에서는 이제 당장 이루어질 새로운 정권에서 제자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이 같은 제자들의 서열을 편성하는데 먼저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선수를 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들에 대한 이기적인 모성애가 합세한 것이 살로메의 끈질긴 간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하여 전혀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받으실 수난의 구체적인 방법과 과정들을 상세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방인이란 당시 로마 정부의 유대 파견 총독이었던 빌라도(27:2)를 비롯한 로마 정부의 하수인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처형은 당시 반역죄를 지은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로마 정부의 총독에 의해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리라는 것은 그가 정치적인 범죄자로 몰려 죽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수난을 예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부활까지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수난 예고 중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겠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활에 더 큰 강조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생산적 생명 활동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끝으로 생각해서 낙담했던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의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식은 그것이 비록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살해 음모로서 나타난다 할지라도, 수난의 진정한 주체나 객체가 자신이었음을 반증해 주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위협을 느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자구책으로 예수님을 살해한다는 등식이 나왔다 할지라도, 그 수난을 능히 피하실 수 있는 분이 그 길을 지나가셨다면 그 수난의 계획 주체는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고, 또한 그 수난의 대상, 즉 객체 역시 예수님 자신이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영적 무지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제자들이 다 도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바로 그런 때에 요한과 야고보의 어미인 살로메가 청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동기가 매우 불순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살로메의 간구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때까지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신앙의 목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왕국에서 기득권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예수님을 일종의 자동판매기와 같은 것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여기에 자신의 공적이나 공로의 동전을 넣고서, 그에 비례하는 성과물을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이익 창출에만 급급해 있는 제자들이기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마땅히 발생하지 말아야 할 것이 되었고, 이것이 현실로 드러나자 제자들은 전부 도망하고 부인해 버리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26:56). 이런 사실들은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경계해야 할 것들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이익이나 기득권의 수호신으로 취급하거나, 지상의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삼는 오늘날의 기복 신앙의 경향에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바알과 아세라는 바로 지상적인 풍요로운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섬겨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가나안 사람들이나 우상 숭배자들과 같이 현세적인 복을 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주님은 그 즉시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적인 무지를 지적하시면 고난의 잔에 참예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간청은 살로메가 했지만 대답은 두 아들에게 직접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간청의 실제 주역이 그들이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던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은 영광과 환난 두 가지의 의미를 비유하는데, 영광은 왕이 하사하는 귀한 것이고(23:3; 116:13), 환난은 하나님의 진노를 뜻합니다(75:8; 51:17,22; 25:15; 23:33; 26:39).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마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 곧 십자가의 수난을 뜻합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영광의 잔을 생각하고 대답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기적과 이사를 체험했던 그들이 스승의 말씀의 진의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비극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그 잔을 마실 수 있다는 무지한 용기를 보인 것은 웃지 못 할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인정을 해 주셨습니다. 그 인정은 그들이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부활 후에 실제로 순교의 잔을 마신 야고보(12:2)와 평생 고난의 잔을 마실 요한의 장래를 알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살로메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세우사, 십자가의 좌우편에 앉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확인케 하셨는데(27:56),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평생 회개와 겸손의 마음으로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살로메의 청탁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바로서, 예수님 자신에게 부탁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대답을 옆에서 들은 다른 10명의 제자들은 요한과 야고보에 대한 화를 내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분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좌우편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청탁하는 요한과 야고보의 저급한 신앙과 다른 10명의 제자들의 신앙이 같은 수준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질투심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의 성격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자리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세상 국가에서는 스스로 크고자 하는 자들이 모든 불의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때 높은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이 같은 세상적 수단과 방법은 무용지물이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배되는 원리는 철저한 가기 겸손과 봉사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천국(Kingdom of God)은 지상에 있는 나라처럼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힘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진리와 의로움과 은혜로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갖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울 것으로 생각한 지상 나라에서 두 아들을 최고의 지위에 올려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세베대의 어미 살로메의 의도는 하늘나라 천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어리석은 생각이요 청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청탁을 받으실 때에 살로메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직설적으로 말씀해주지 않으시고, 천국에서는 진리와 의와 사랑으로 행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자가 크게 대접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똑똑한 사람이 출세하는 곳이 아니요, 권모와 술수가 통하는 곳이 아니며, 사람이 사람 위에 서서 군림하고 득세하는 나라가 아니요 오직 진리와 사랑과 은혜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랑하고 겸손으로 봉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기독교적 미덕을 강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바로 사랑과 겸손과 섬김을 바탕으로 이루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며, 둘째는 그 나라에 부름을 받는 것에 감사하여 더욱 열심히 주님과 형제를 사랑하며, 셋째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을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상 나라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사람이지만, 천국에서는 섬기는 자가 오히려 큰 자요 높은 자가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은 바로 섬기려 하심이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었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하심으로써 진정한 섬기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바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느냐는 분명히 다릅니다. 삶 역시도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똑 다 똑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삶을 사느냐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돈을 벌기 위해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섬기는 자가 될 때에 상급과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신앙생활도 역시 수준이 있고 격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3:14)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잘되고 잘 살고 출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데 매우 유익한 요소가 되기 때문에 열심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야 되는 형태의 고난까지 회피하지 말고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분명한 것은 고난이 없이는 상급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가야하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우리를 위한 상급과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부르심의 상급을 위하여 겸손하며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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