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표징을 보이소서! 시편 86:1-17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도나 불신자가 다 같이 느끼는 것 중에는 착한 사람은 무시와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악한 사람은 오히려 형통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손해를 보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도로서도 나는 기도도 많이 하고, 믿음도 좋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힘이 들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다른 성도를 보면 믿음도 별로 좋지 않아 보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봐도 별로인데도 잘살고 인정을 받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악인의 형통에 대한 의문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 중에서 다윗은 어떤 자세로 이런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이해를 하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 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부분은 1-7절로 위기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고 악인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보존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부분은 8-13절로 온 세상을 주관하시며 경건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부분은 14-17절로 교만한 자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 붙잡히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적인 시간들들 오랫동안 겪었습니다. 그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쫓겨 다니는 생활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음식이나 제대로 먹었겠습니까? 몸 한 번 마음 놓고 씻어 보았겠습니까? 어느 쪽에서 사울의 군사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껏 편하게 쉬며 잠을 잘 수가 있었겠습니까?
다윗은 1절에서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곤고하다는 말은 억압을 받고 고통을 받으며 핍박을 받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궁핍’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가난을 의미하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를 피해 다니느라고 그 몸과 마음이 너무나 곤비한 상태에 처해있는 것으로 절망적이면서 허탈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극한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우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도우심을 바라고 있을까요? 2절을 보면 “나는 경건하오니”라고 하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윗이 정말로 의인인가 하는 점입니다. 정말로 흠이 없는 사람일까요? 정말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다윗은 사울에 비하여 분명히 상대적으로 의롭고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다윗이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그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께 헌신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곧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는 더럽고 추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기도하며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주신 믿음의 씨요, 거룩하게 하는 씨요, 의롭게 하는 씨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다윗과 사울의 경우에는 상대적인 의로움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보지만, 성도 간에 적용을 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고 하는 점입니다. 나는 저보다 의롭다고 하는 것은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상당히 주관적인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 속에 있게 되면 더 나아가서 ‘나는 의인이요, 너는 악인이다.’라고 정죄해 버리는 함정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당시에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한 상황에 있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의 문제를 아뢰고 그 해결책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은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기에 다윗이 이렇게 호소할 때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8절을 보면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상을 말하기도 하며, 천사가 될 수도 있고, 권력을 잡고 있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들’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אלהים”(엘로힘)으로, 이방인들도 자기의 신을 가리켜 엘로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엘로힘에 대하여 다윗은 하나님을 ‘주(아도나이:אדני)’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이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과 절대 복종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겨 은혜를 베풀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어여삐 여겨 죽음의 위치에 있는 자신을 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기를 고대하면서 종일토록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심령이 곤비한 자의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낙심치 말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까지도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렘 33:3).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하나님께 찬양하며 경배하며 영광을 돌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참 신이요 구원자이심을 체감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오늘날 우리가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시며 인도자이심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이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11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늘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해 주시지 않으면 언제든지 죄악의 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늘 기도해야 합니까? 바로 이렇게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항상 내 마음을 주관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기도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섬기는 절대적인 신앙으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신 6:5).
하나님께서 성도를 사랑하시는 또 하나의 성품은 “인자”(13절)입니다. 인자(헤세드:חסד)입니다.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인자가 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줄로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 확신은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그는 지금 현재 고난에 처하고 부르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건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총을 믿는 것이며,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하는 달리 불신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할까요?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더 나아가서 핍박하고 괴롭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그 악한 마음과 행동을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다는 점입니다(롬1:28). 그럴 때에 성도는 또 다시 회의를 품게 됩니다. 왜 저런 악한 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시는가? 하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실 때에 바로에게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10번의 재앙이 내리는 동안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10번이나 재앙을 내리실 때까지. 10번이라는 회수와 재앙이 내려지는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마음에 의심이나 회의가 일지 않았을까요? 바로는 9번의 재앙에도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지만, 10번째 모든 초태생의 죽음이라는 재앙을 내리실 때에야 비로소 그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지요. 이스라엘 내 보내고 나서 생각하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그래서 군대를 총동원하고 병기를 총동원하고 이스라엘을 뒤쫓아 왔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추격을 막으시며, 홍해 앞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에게는 강한 동풍으로 바다를 갈라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대가 쫓아 들어올 때에 갈라진 바다를 다시 흐르게 하시고 모든 군사를 다 삼키는 최후의 징계를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원구 마귀의 세력들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굴복하고 나서도 또 스스로 강퍅하게 하여 또 다시 도전을 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악함은 우리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지옥 불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최종 결판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가 애매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자신의 강퍅함이나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한 것으로 괴롭고 슬픈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해결해 주실 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의 세력들은 계속해서 공격을 할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넘어지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건지셨음이니이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승리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주실 때에 반드시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 없고 인내하지도 못하면, 피할 길도 찾을 수가 없고, 견디어 낼 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홍해 바다에 애굽 군대를 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악인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떻게 해 주실까요? 시편 23:5,6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때에 내 원수의 눈 앞에서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시인과 같이 “힘을 주시고”라고 간구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겨낼 힘을 받아야 합니다. 견디어 낼 힘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은 “은총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는 여러 가지의 복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비와 긍휼도 은총입니다. 그러면 시편 기자가 앞에서 나온 자비와 긍휼을 달라고 간구해 놓고 또 다시 최종적으로 ‘은총’을 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은총:토브(טוב)’ 은 ‘좋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이런 뜻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원수의 앞에서 받게 될 가장 최종적인 상급을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표징을 간구한 것은 자신이 높아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대적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고 견딜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지막으로 불신자들 앞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를 증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이렇게 살도록 태어났는가? 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하며,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삶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이 들 때에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며, 그 구원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며,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더 이상 외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 편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다가 낙심 될 때도 있지만, 끝가지 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반석 위에 서서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며 내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며 은총의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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