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만난 나다나엘 요한복음 1:43-51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께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하시던 주요 무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그 때부터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갈릴리 지역 출신 제자로는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빌립 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시대에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앗수르 땅으로 끌려가고, 앗수르의 다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북 이스라엘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으므로, 남 유다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가나안 땅에 살게 되었지만, 이방인으로 취급을 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마리아 땅에는 발도 디디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위쪽에 있는 지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다니기까지 하였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시기 위하여 요단강 건너편 길을 택하신 것으로 보고 있고, 이때에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주로 사회적인 하층민이 거주하던 곳인데, 주로 어업이나 목축업을 하고 살았으며, 다행히 그곳에는 국제적인 교역로가 있어서 그곳을 관리하여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습니다. 헤롯 왕 때에는 주민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목욕탕, 체육관, 경기장과 같은 것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주님 당시 갈릴리는 이방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므로 순수한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외받는 대상이 많이 거주했던 이곳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만나 제자로 삼았는데, 빌립은 자신을 찾아주시고 제자로 삼아주신 예수님을 좇기로 결정을 하고, 곧바로 그 비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데, 마태복음 10:2-4에 보면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는 ‘나다나엘’에 대한 기사가 없고,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가 앞에 붙으면 그 뒤에 이름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마 16:17에서 “바요나 시몬”이라고 할 때에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바돌로매는 정식 이름이 아니고 ’나다나엘‘이 정식 이름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2-4절을 보면 바돌로매는 빌립과 연관하여 기록되고 있으며, 마 10:3; 막 3:18, 눅 6:14을 보면 베드로, 야고보의 형제와 더불어 예수님의 처음 여섯 제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주님으로 섬기며 따르기로 한 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나다나엘에게 소개를 하였습니다. 이때에 나다나엘의 처음 반응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에 능숙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교양도 없었고, 사투리도 심했으며, 이방인들과 교역을 하고 있어서 멸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나사렛은 갈릴리의 조그마한 한 촌락에 불과했습니다. 평판도 다른 고을보다 좋지 못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의 말을 듣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소리에 어이없어 하면서 조롱하는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반응을 보고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 한 마디를 했습니다. “와 보라” 그런데 뜻밖에 나다나엘은 이 말에 끌려 예수님께로 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 한 마디도 나누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품에 대하여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그 이름에 걸 맞는 진실 된 사람이 없고 외식적인 모습만이 가득했다고 마태복음 23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이러한 때에 하나님과 진정으로 만나는 진실한 사람으로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간사함이 없다고 하여 절대로 흠이 없다거나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정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주님께서 자신을 평가하는 말씀을 듣고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자신에 대하여 누가 말하지나 않았는가 알고 싶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는 유대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왕상 4:25).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만드는 그늘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휴식처나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다나엘도 그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공부하며 메시아의 오심을 기대하면서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에 있을 때 보았다는 말씀은 그를 어느 시점에 잠깐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와 신앙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꿰뚫어 보고 계신 예수님의 권위에 완전히 압도를 당하여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즉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창 28:10-22). 주님께서는 나다나엘로 하여금 쫓기어 도망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사건을 연상시키면서 나다나엘과 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목격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 중에 예수님에 관한 호칭과 내용 중에 “랍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단어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또 선지자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잘 풀어서 설명해 주시기 때문에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존경 받는 사람을 ‘랍비’라고 불렀던 것처럼, 예수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부른 호칭입니다. 신약시대의 유대인은 교사에 대하여 세 가지 존경어를 썼습니다. 라브(선생님), 랍비(나의 선생님), 랍오니(대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는 그렇게는 차별되어 있지 않고, 바리새파의 교사에게도(마 23:7), 예수님께 대해서도(요 1:49등), 세례 요한에게도(요 3:26), 예수께 대해서도 랍비(마 26:25,막 9:5,요3:2등)를 쓰고 랍오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막달라 마리아가 사용한 호칭(요 20:16)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마태복음 3:17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서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도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이심을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러 온 사단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하고 있으며, 거라사의 귀신도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쳤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마 7:21; 10:32,33).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였으며, 나다니엘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메시아의 별명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식되었으며(삿 8:22,23), 이사야 선지자는 “평강의 왕”(사 9:6)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세력들에 의해 큰 어려움을 겪었던 신약과 구약의 중간기 시대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왕적 권위를 지니신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셔서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기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은 물론 제사장 계급인 사두개인들과 헤롯 왕가로부터 큰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의 왕으로서의 메시아 예언이 예수님에 의하여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또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마 27:11).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공생애를 수행하셨을 때에는 일단 구속 사역을 먼저 성취하시기 위하여 왕으로서의 위엄과 영광을 유보하셨지만, 장차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에 전 세계 모든 인류를 선악 간에 심판하실 만왕의 왕으로서 왕권을 온전히 발휘하실 것입니다(마 26:64).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의 이웃에게 복음을 증거한 전도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를 대상이요 구주로 믿어야 할 분일 뿐 아니라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대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라고 여기면서도 막상 주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지 않으면 결코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최대 명령인 복음 전파의 사명(마 28:19,20)를 저버리는 것이며, 혼자서만 구원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기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논리적인 체계도 없었고, 예수님께 대한 지식도 부족했기 때문에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다나엘은 빌립보다 성경에 더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만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와 보라~” 일단 예수님께 와서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저는 죄송하기도 하지만, 성도들이 큰 교회에 다니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를 자랑합니다. 작은 교회는 부끄러워하면서 자랑도 못하고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내 입술로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대하여 자랑할 게 없으시겠지요? 그렇다면 다만 빌립처럼 “와 보라” 이렇게 말씀만 하면 됩니다. 혹시 교회에 와서 교회의 겉모습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말씀에 은혜가 되면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구주라고 증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칩니다. 다른 교회는 사랑이 없다고 합니까? 우리 교회는 병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른 교회, 다른 기도원, 집회에 가면 병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별별 기적이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저로서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성령님께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여인(요 4:29)은 모두로부터 멸시를 받았지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한 후에는 즉시 마을로 달려가서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도 아닙니다. 마을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여인은 오직 “와 보라” 이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완악하고 강퍅한 심령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인격과 사랑과 가르침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도할 때에 모든 인간적인 헛된 노력을 배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과 불신자의 만남을 주선할 때, 주님께서 친히 불신자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는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다나엘에게는 예수님께서 단순한 스승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신적인 권위와 위엄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성도들의 신앙은 입술의 고백을 통하여 나타나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삶을 통해서도 입증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지 불과 몇 시간 혹은 며칠 이내에, 제자들은, 랍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이금 등 신앙 고백을 하였으나, 그 후 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들의 신앙은 실천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매주일 예배에 참석하지만,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믿음이 성숙되지 않고 혀로만 주를 섬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나 수가성 여인이나 나다나엘이나 또 앞부분에 나오는 안드레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체험과 변화입니다. 주님을 만났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났습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까? 주님을 통하여 여러분은 확실한 믿음을 가졌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며,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해야 합니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버렸습니다. 지역적인 편견은 곧 외형적인 편견입니다.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학벌, 재산, 지역, 건물 등 세상적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만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만일 편견이나 독선과 아집이 있다면 이 시간에 그것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만 겸손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하지만 사람 앞에서 교만한 것은 주님 앞에서도 겸손한 것이 아니라 척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중심적이었으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편견과 교만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죽여야 교회가 살고, 나를 죽여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나시는 것이요, 내가 죽어야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어떻게 섬기는 지, 교회를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는 지, 그 모든 모습이 내 가족과 내 주위 사람들에게 그대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요히 묵상하며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나다나엘이 어쩌다 한 번 무화과 나무 밑에서 기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는 고요한 가운데 늘 기도에 힘쓰며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회당과 큰 길 어귀에 서서 나 보란 듯 기도했던 바리새인들(마 6:5)과는 크게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나다나엘 어떤 모습이 진실하고 올바른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을 진실한 행동으로 받으실까요? 이제 고요한 가운데 겸손하게 무릎 꿇고 은밀히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든 봉사를 하든 은밀한 가운데 하는 여러분이 될 때에(마 6:4, 6, 18)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요, 스스로에게도 더 큰 기쁨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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