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사랑하기에 고린도후서 12:14-21
고린도 교회는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았지만, 그에 비하여 사단의 역사도 아주 강하게 나타난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 말미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 번째로 방문하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음과, 또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들에 대한 해명과 함께, 잘못된 성도들이 끝가지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강력하게 권징(勸懲)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것은 사도행전 18:1-18에 나오는데,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이루어졌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를 하였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할 때에 그곳 사람들로부터 방해와 협박을 당하여 회당장 ‘디도 유스도’의 집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회당장은 물론 수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밤에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고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때에 1년 8개월 동안 말씀을 전파하며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방문은 고린도 전서 2:1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나가서 말씀을 전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때에도 복음의 핵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내용이며, 이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슬픈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교회를 방문하기 앞에서 제일 먼저 밝히는 것은 ‘자비량’으로 방문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역시 자비량으로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일까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방문에 부담을 느낄 정도로 가난한 교회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교린도 교회 내에는 거짓 사도들이 있었고, 1,2차 방문 시에 자비량으로 선교한 것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모함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비방했을까요? 아마도 복음 사역을 개인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였다고 역시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오해를 하지 않도록 고린도 교회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미성숙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 비유하며 자비량 전도의 원칙 고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의 자비량 전도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전도자의 자세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들이 소유한 재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바울과는 정반대로 사람의 재물만 탐했지 그 사람의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영혼을 사랑하는 까닭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는 것이요, 영혼 구원이 가장 중요한 까닭에 재물과 같은 것에 얽매이거나 비방을 받지 않으며, 또 교회에 거짓 사도들의 비방과 모함을 사전에 방비하고, 혹시나 재정적인 부담을 갖지 않도록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재정적 도움을 거절한 첫 번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고 믿음의 초보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물질적 도움을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는 부모가 그들을 위해 재물을 저축하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믿음의 아버지로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고 믿음의 초보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을 공궤하는 의무를 지우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영혼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오직 성도들의 구원과 영적인 각성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시간과 정력, 재물뿐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이해관계를 초월한 희생적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대표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섭섭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크게 기뻐하기 때문에 자신의 재물을 허비하고 또 자신까지도 허비하면서 사랑하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덜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헌신적으로 사랑하는데, 그들은 도리어 무보수 봉사는 참된 사도의 징표가 아니며, 바울이 그들에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무척이나 당혹해 했으며 일면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나를 덜 사랑하려고 합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라 하는 존재의 마음속에는 한 개를 받으면 한 개 더 받으려고 하고, 한 개를 더 주면 도 더 주기를 바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바울의 심정을 볼 때에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는데,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을 경우에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이나 비방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며,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런 섭섭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로 방문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의 사실을 반드시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어떤 경우에라도 반드시 비방거리와 반대할 명분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면 사람을 귀찮게 한다고 비방하고, 전도를 안 하면 전도도 안 한다고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나 사모가 교회 청소를 한다거나 교회 주변을 청소를 하면, 전도하고 기도하지 체신 머리 없이 청소나 하고 있다고 비방을 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면, 고상하게 성경만 읽고 기도만한다고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재정이 빈약하여 어려울 때에 견딜 수가 없어서 돈을 벌려고 하면, 목사가 돈 벌려고 한다고 비방하고, 가만히 있으면 왜 그러고 있느냐고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3년 전에 일어났던 분당에 있는 샘물 교회의 선교단 피납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내전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영혼들을 사랑하기에 아프카니스탄으로 간 샘물교회 봉사단 23명은 마자르이샤리프에서 봉사활동을 마친 뒤 카불을 거쳐 칸다하르로 가는 길에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되었습니다. 43일간의 피랍기간 2명이 살해당했습니다. 그 때에 기독교는 또 다시 불신자들의 비난을 화살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샘물 교회는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습니까? 온 나라가 들썩이는 가운데, 교회 내에서도 고린도 교회와 같이 선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비방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 3년이 지났고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었기 때문에 당시 선교봉사단원들은 당시 사건 상황에 대하여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우리, 탈레반한테 납치당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2007년 7월 19일 오전 10시40분쯤 카불의 한식당 ‘뉴월드’에서 차를 바꿔 타고 출발한 지 40여분만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23명의 봉사단원을 태운 버스는 ‘탕’ 소리 한 번에 멈춰 섰다고 합니다. 임현주(당시 32세) 선교사는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탕!’하고 총소리가 한 번 더 났습니다. 정부군 군복을 입은 한 사람이 자동소총(소련제 AK-47)을 들고 버스로 뛰어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납치가 되고 차는 방향을 틀어 왼편의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대전차 로켓 RPG 등으로 중무장한 탈레반들이 지켜선 가운데 봉사단원들은 한 줄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배형규(42) 목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당신들은 손님한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를 방문한 손님들입니다!” 임 선교사가 현지어로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매일 밤 달이 지면 어디론가 이동했을 했는데, 라이트도 켜지 않고 쫓기듯 달렸다는 것입니다. 21일 밤. 한국에 보내주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기대에 부픈 단원들 모두는 옷을 입고 신속하게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렇게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동이 트는 아침은 곧 절망이었습니다.
22일 일요일. 탈레반들은 선교단원들을 가로 10m, 세로 4m, 깊이 1.5m 웅덩이 앞에 서라고 했습니다. 발 디딜 공간은 30㎝뿐이었습니다. 자루를 뒤집어 써 눈만 보이는 탈레반들은 총알을 엑스자로 온 몸에 감았고, 어깨에 박격포까지 메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밤. 트랙터로 ‘운반’된 지역은 광야였다고 합니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과 흙먼지 속으로 봉사단원들을 몰아넣었습니다. 하얀 수염의 노인이 나타나서 “한국에 있는 한 교회에서 온 선교사라는 걸 다 들었다!” 한국 언론에서 교회 출신 단기선교사라고 보도한 내용을 들었다고 합니다. 뉴스 때문에 이들이 선교사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한국 정부는 더 큰 부담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임 선교사는 아니라고 항변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요? 23명이 함께 있던 어느 날 밤엔 배 목사가 봉사단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들이 큰 협상안을 갖고 나와서 본보기로 한 두 명은 처형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제가 일어나겠습니다. 제 번호가 1번입니다.” 유경식(55) 장로가 나이 많은 자신이 일어나야 한다고 했지만 배 목사는 “장로님, 제 자리 넘보지 마십시오.”라고 웃으며 넘겼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에 봉사단원은 각각 11명과 12명으로 나뉘어졌습니다. 25일 아침. 탈레반은 배 목사의 이름을 불렀다. “배형규.” 배 목사는 문 밖으로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승리하십시오.”라고 말했고 끌려갔습니다. 배 목사가 세상을 떠난 그날은 그의 생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팀은 계속 나뉘어졌습니다. 31일 또 심성민(29)씨가 희생되었습니다. 경상도 사나이로 말수는 적지만 속정이 깊어 주변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챙기던 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흩어진 선교단원들은 서로의 생사를 알 길은 없었습니다. 유일한 버팀목은 함께 남은 동료들 그리고 성경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8월 17일. 김지나(32) 김경자(35)씨가 무사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살해 위협이 시작됐습니다. 이번엔 여성이었습니다. 그들 율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전략상 가장 자극적인 살해극을 택했습니다. 막후 협상은 결국 탈레반의 다른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가닥을 잡아갔습니다. 한국 측은 상당량의 음식과 의약품도 피납자들을 위해 보냈지만, 피랍자들은 풀려날 때까지 받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8월 29일. 아프가니스탄 피랍 41일째, 12명이 풀려났습니다. 다음날 남은 피납자들이 풀려났습니다. 11일간의 악몽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가즈니 적신월사에서 미군기지로, 동의부대로 이동은 계속됐습니다. 숙소인 세레나 호텔에 도착해 2명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모두 오열했다고 합니다. 9월 2일,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2주간 안양 샘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데는 반년에서 1년 가까이가 소요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당시의 상황과 샘물교회의 배목사의 순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에 왜 이들이 갔을까요?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교단원을 모집하니까 이들이 영웅 심리에서 자원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 선교단원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군사들이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들로 인해 들끓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들까지도 무모한 선교활동을 했다고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비난을 받을까봐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서, 선교를 간접적으로 돕지도 못하면서,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줄도 모른 채도 비난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나 않을까요?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유대인들의 중심지에 있었기 때문에 제일 많은 감시와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물질적인 면에서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구제 헌금을 모았고, 이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비방하는 자들은 바울이 헌금을 횡령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가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도와 함께 같이 보조를 맞추었기 때문에 만일 디도로부터 어떤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역시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의 이러한 말들은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지나친 자기 변명으로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시종 자신의 사도권과 무보수 봉사에 대해 언급했으므로 자기 방어에 급급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도 주님 및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편지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것이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봉사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변명은 오직 교회의 더욱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을 알게 해 주어야 고린도 성도들도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며(고전 4:18,19),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며(고후 11:20),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면서 영과 육이 심각한 타락의 기로에 있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바울은 사도권을 발동하여 회개치 않는 무리들을 징계할 수도 있다는 의사 표시를 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8가지 악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다툼과 시기’ 다툼은 자기의 아집을 무조건 관철시키려는 욕심, 혹은 분노나 탐심 등에서 나타나는데, ‘시기’와 병행되어 사용이 됩니다. ‘분 냄과 당 짓는 것’ ‘분 냄’은 내적인 노여움을 가리키는 말로 분 냄이 밖으로 표출되어 결국에는 다툼과 시기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당 짓는 것’은 자기네 분파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서로 분열하는 것을 말하는데, 고린도 교회는 당쟁으로 인해 큰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고전 1:11,12). 당 짓는 것 역시 다툼과 시기, 분 냄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 ‘중상’은 제3자를 악담하고 모략하는 것이며, 수군수군하는 것은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 악담을 하는 비열한 행동입니다. 자기편을 만들기 위하여 상대를 욕하는 것입니다.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 거만함은 자기만을 제일로 생각하는 교만이며, 어지러운 것은 무질서 상태에서의 날렵함 즉 폭력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쟁 중에 있을 때에 서로 거만한 나무지 온갖 무질서한 소동과 사악한 행동들이 난무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단은 왜 이렇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추악한 모습으로 행동하게 만들었을까요?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을 갈라놓기 위해서입니다. 즉 교회와 목회자 사이에 서로 갈라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만들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교회를 타락시켜서 자신의 노예로 만들기 위한 술책인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고, 불신자들은 이런 교회의 모습을 비웃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이런 모습들은 모두 교만에서 시작이 되고, 교만으로 결국 마귀의 종으로 타락하게 되는 시발점입니다. 교회와 교회가 서로 비방하고, 불신자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 들려올 때에 회개하고 돌이킨다면, 비온 뒤에 땅이 굳듯이 우리의 믿음은 더욱 굳건해 지며, 교회는 더욱 그리스도의 반석위에 튼튼하게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늘 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기도가 있을 때에, 내 내면의 신앙의 모습을 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양심에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심으로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내 이웃의 영혼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 간에는 더욱 서로의 영혼을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면서, 과거의 죄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더욱 낮추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내가 더 낮아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제일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녀들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을 만난 나다나엘 (0) | 2010.08.07 |
---|---|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격려 (0) | 2010.07.31 |
돌아가고 싶은가? (0) | 2010.07.17 |
성령 충만하게 된 사울 (0) | 2010.07.09 |
맥추감사절과 오순절 성령 강림 (0) | 2010.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