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하게 된 사울 사도행전 9: 10-18
사울이 산헤드린 공회의 공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기록한 것을 볼 때에 이 때 사울의 모습은 적개심에 불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신한 자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과, 이들을 모두 잡아서 반드시 처벌을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대단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목적지인 다메섹에 거의 다 갈 즈음에 갑자기 하늘에서 밝은 빛이 사울에게 비춰왔습니다. 이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사울은 그만 길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을 회개시켜 일꾼으로 쓰시려고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함께 동행 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오직 사울만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사울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는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순종을 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면 어떻게 행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던 자였는데, 한순간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은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상태였고, 동행하던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의 손에 이끌려 성으로 들어간 사울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큰 빛으로 임하시고 눈을 보이지 않도록 만드시며 순종하게 하신 주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제자를 통하여 사울에게 안수하도록 하는 안배를 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시는 말씀 중에 11절을 보면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나고 눈이 먼 즉시 깨달음이 있었고 회개의 기도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사울에게 안수하라고 하실 때에 머뭇거렸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얼마나 악한 일을 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저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릇으로 쓰일 것이지만 많은 해를 받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에게 안수할 때에 ‘주님께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울은 안수를 받은 뒤에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을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하지도 않고 핍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사울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유대의 종교최고의결기구인 ‘산헤드린’의 일원이었으며,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던 악한이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회당에 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에 믿는다면 그를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이렇게 변화된 것은 어떤 연유입니까? 주님을 만난 것일까요? 그것도 한 이유는 되지만, 그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것은 성령 세례라고 할 수 있고,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과 성령의 내주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 세례
성령 세례(Holy Baptism)란 성령이 한 죄인의 심령에 처음으로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救主)’로 믿게 하고 또 회개하여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구속사(救贖史)를 주도하시기 시작하신 사건으로서 역사 전체의 입장에서의 최초의 단 한번만 있었던 사건이었다면, 성령 세례는 성령께서 각 개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내주(內住)하시기 위한 개시로서 한 개인의 입장에서의 최초의 단 한번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성령 세례는 각 개인별로 처음 구주를 영접하도록 단 한번만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예언한 것과 같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령이 인간의 역사에 임재하신 이후에 각 성도 개개인에게도 임하시기 시작함으로써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런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 성도를 인정하시는 것이며, 구원의 확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 이후 완악해진 인간은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성령 세례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을 ‘주(主)’로 시인하는 자는 그 누구나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 어떤 현상이 나타나거나 큰 감동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은밀한 가운데 성령께서 임하셔서,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교회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성도는 사도 바울과 같이 다메섹 도상의 큰 이적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에 큰 감동을 받을 수도 있고, 또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인하여 특별한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성도는 특별한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당신은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까?’라고 질문을 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 증거가 무엇입니까?’ 또 ‘언제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여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가 이미 다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물세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교회 공동체에 입문하는 외적인 의식입니다. 과거의 죄를 씻고 예수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성도 자신의 고백이며, 이에 대하여 교회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5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하는 말은 곧 성령 세례를 통한 내적인 변화와 함께 물세례를 통한 교회의 공적인 인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가리킵니다.
2. 성령의 내주
성령 세례를 통해서 기도하던 모든 제자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향후 계속해서 그 심령 안에 거하시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 성령 세례가 성령의 내주하심의 개시로 성도의 회개, 중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면, 성령의 내주하심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삶의 본을 따라 사는 삶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 때까지 지속하게 하는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성령 내주의 특징은 한 번 성도 안에 내주하시면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성도의 보혜사(保惠師)(요 14:6)로서 반드시 천국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중생한 성도의 마음속에는 항상 성령께서 계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내 마음에 계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도 개개인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17)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도는 내주하신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나누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존재인 것입니다.
3. 성령의 충만
‘성령 세례’가 처음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절대적 사건이라면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 함께 이미 성도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 어떤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감동으로 성도가 큰 은혜를 체험하게 만드는 상대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하는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있어서 성령의 내주하심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상태는 성도의 신앙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습니다. 충만이라는 말은 한 척의 배에 물건을 가득 실은 상태, 혹은 컵에 물을 부었을 때 가득차서 흘러넘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과의 교제 자체는 결코 단절되는 일이 없지만 신앙생활의 정진에 따라서 성령이 충만할 수도 있고, 성령의 감동이 약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일반적으로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은 은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은사를 못 받고,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성도가 아니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그런 종류의 은혜를 체험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충만은 말씀을 더 잘지키게 되는 것으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경우에는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도 보통 성도와는 달리 아주 강력한 것이었고, 성령의 충만함도 역시 아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즉시 사울은 큰 충격을 받고 깊은 고뇌와 뉘우침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보낸 요나처럼(욘 1:17)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그 죄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을 헛되이 섬겨 온 유대교의 망상의 미로에서 점차 깨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사울에게는 자신의 어리석고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핍박을 받은 주의 성도들에게 대한 양심의 가책도 있었으며,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밀려 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울을 거듭하네 하기 위한 큰 아픔과 진통인 동시에 성령의 충만함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사울은 회복이 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생각과 행동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안수를 받고 시력을 다시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육적인 시력을 회복했음은 물론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서도 새롭게 눈을 떴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방 선교를 위한 전도자 바울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의 경우에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주님의 지시를 받았는데, 이는 사울이 핍박자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위대한 전도자 바울을 탄생시키는데 큰 도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지식이나 판단을 초월하여 임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바울로 변한 사울처럼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충만함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찾아오는 현상은,
첫째 인격의 변화입니다.
사울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그들을 박해한다는 자부심과 율법의 우월감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청년의 이미지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다’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서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진리에 눈을 뜬 새로운 충격에 통회와 자복으로 변화를 받았고, 아울러 다메섹의 경건한 신앙인인 아나니아의 지시에 겸손히 복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완악하던 사울이 어떻게 이렇게 변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바로 주님께서 그에게 성령 충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만나는 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켜 내면의 세계가 기쁨으로 채워지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 스데반의 얼굴이 그러했고(행 6:15),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모세의 얼굴이 그랬다는 것을(고후 3:7)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삶의 목적이 변화됩니다.
이전에는 육신의 정욕과 세상 권력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목표요 이상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이 바로 나의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청년 사울은 그의 혈통과 지위와 도덕과 학식과 교회에 대한 핍박이 자랑이었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에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았습니다(빌 3:4-12).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삶의 목표가 변화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울에게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마 19:27) 삭개오(눅 19:8) 등 예수님과 참 만남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두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청년 사울이 주님을 위해 분토와 같이 버린 것들을 아직도 부여잡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버려야 하겠습니다.
셋째, 삶의 모습이 변화됩니다.
인격과 삶의 목적이 변화가 되면 당연히 삶의 모습도 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바뀌게 되면 그 행위와 생활도 분명한 변화를 보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교회를 위협하고 성도를 괴롭히고 박해하던 사울이 이제 주님을 만난 후에는 완전히 그 삶의 모습이 바뀌어, 교회를 위하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도를 위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전의 삶의 모습이 얼마나 무익하고 악한 것이었는가를 밝히 알게 되어 그 삶의 모습을 청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빛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 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반드시 그러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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