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결례 논쟁

chukang 2010. 6. 19. 18:00

 

첨부파일 결례 논쟁 마가복음 7.hwp

 

결례 논쟁 마가복음 7:1-13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군중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예수님의 명성에 위협을 느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도록 만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또 이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 정결례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람과 먼지가 유독 많은 팔레스타인에서는 고대로부터 식사 전에 손을 닦거나 몸을 씻는 것이 관례로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나 근동의 국가들에서는 대부분 스푼이나 포크 등과 같은 식사용 도구가 없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에 손을 씻는 일은 꼭 필요하였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렇고 건강상으로도 손을 씻는 일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관습이 포로 귀환 시대 이후에는 의식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종교적인 규례로 변화가 되었고, 이것이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교육되어 온 것입니다.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며, 먼 곳으로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는 몸까지도 다 씻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을 때에는 대야에 물을 담아 손을 담궈 씻지 않고, 하인이나 다른 사람이 부어주는 물로 씻도록 했는데, 이는 고인 물은 부정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정결례와 관련되어 씻는 것도 흐르는 물에 씻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의학적으로도 고인 물보다는 흐르는 물에 씻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그릇, 주발, 잔 등도 깨끗이 씻도록 했는데, 이는 이것들이 대부분 이방인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종교적으로 크게 부정한 것으로 여겨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크게 질타를 당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식사 정결례를 지키는 것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같이 겉으로는 종교적 정결을 강조하면서도 실상 하나님을 향한 신실성이 없는 것이 참으로 문제가 됩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외적인 의식 준수 그 자체를 '의(義)'로 여기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비판함으로써 정결례를 지키는 본질을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자칫 내면적인 신앙, 곧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는 도외시 한 채, 지나치게 외적인 종교적 형식들에만 치중함으로써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라고 교훈을 줍니다.

  이 때에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전개된 유전 논쟁은 부정(不淨)에 대한 바리새인의 문제 제기와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1-8절), 유전의 한계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논증(9-13절), 진정으로 부정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14-23)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율법의 근본 정신을 도외시하고 그저 율법의 문구에 얽매어 위선적인 종교생활을 일삼고 있던 바리새인들  에 대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가르쳐주시며 비판하고 계십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보다는 장로들의 유전(tradition)을 엄수하는 데에 더 열심이었으며, 내적인 성결을 이루기 위해 죄악과 불의를 멀리하기보다는 의식법(儀式法)에 규정된 부정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외식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는 행위를 규정한 율법의 근본 목적이 율법 준수를 통한 내적 성결의 완수에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부정하게 되는 원인이 정결 규례를 준수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에 있음을 깨우쳐주심으로서 당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던 자들의 간악한 마음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에서는 헬레니즘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헬레니즘은 다신론과 철학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신적인 면을 강조하고 철학을 강조하고 있지만, 육신적인 면에서는 세속주의적이며 쾌락주의적인 면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지지했습니다. '바리새인들'(헬: '파리사이오이:φαρισιοι', 히: '페루심: פרושים')으로 '분리된 자' 혹은 '분리주의자'란 뜻이며, 성경에서는 대부분 복수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 어떤 종파보다도 경건하였으므로 헬라니즘에 반발하던 당시 민중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에 능숙한 직업적인 학자 계급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성경에 능한자'(그람마테이스:ϒραμματει)(눅 7:30; 14:3) 혹은 교법사(노모디다스칼로이: νομοδιδασχαλοι)(눅 5:17; 행 5:4)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그 안에 담긴 뜻을 설명해 주는 것과, 율법의 요구사항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그 법적인 결정 사항들을 후대에 전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 역시 열렬한 율법 수호자들이었으므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그만큼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호평은 그들이 '랍비'(ραβι)'나의 선생님'이라고 불린 사실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산헤드린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들이 내려온 목적은 예수님으로부터 책잡아 모함의 구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막 3:6; 11:18). 당시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언행이 너무나 파격적이었으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심각한 갈등의 언쟁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중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예수님의 인가가 높아지고 있었고, 또한 주님께서는 전통적인 유대주의의 관행과 의식을 외식된 형식주의라고 책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들이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손상시키는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손문의 진상을 확인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 가운데서 잘못된 것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들이 보고있는 가운데도 정결례를 무시하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저들에게 대응하셨습니다(사 29:13"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간접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장로들의 유전으로 생활을 규범을 삼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외식'에 대한 근본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질책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 ύποχριτης)라는 말은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다른 사람으로 분장하여 행동하는 '배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나쁜 의도를 감추고 이를 선으로 위장하는 위선자, 이중인격자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손상시키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내적 외적 성결을 함께 갖추어야한다.

  주님께서는 이들이 장로의 유전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자들로 비판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후에 사도 바울이 지적한 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도 거룩한 자들이었지만, 참된 경건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위선자로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경건의 참다운 대상인 하나님께 그들의 삶 전체를 바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존경을 유도하기 위하여 행동하였으므로, 실제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는 아무런 경배의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경건은 게을리 하고 외면한 채 인위적인 장로들의 유전에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불신앙적인 행동임을 그들에게 교훈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 사고의 결과나 경험이나 개인의 견해가 말씀보다 우위에 두는 잘못된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형식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성도들이 빠져드는 함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으로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배할 때에 드리는 헌금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이 바르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위로를 받으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외에는 그 어떤 예배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요 4:24). 호세아 선지자도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고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심지어 악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부모님께 드릴 것을 드리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여김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왜곡시켰습니다(11절). 바울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믿음을 저버린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딤전 5:8). 우리도 역시 본질을 버리고 형식에만 매달린다면 믿음을 저버리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2. 전통을 따라 사는 생활은 모순이다.

  성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일수도 없고 세상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겉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불교나 유교의 옛 전통 혹은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에서 크게 못 벗어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가르쳐야 할 자들이 사람의 유전에 얽매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저들의 모순된 신앙을 책망하고 계십니다(8절).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유전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을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전래의 불교나 유교라는 속옷 위에 기독교라는 겉옷을 입고 있지는 않을까요?

  이러한 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이율배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또 '모순'이라는 단어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모순(矛盾)는 창과 방패라는 뜻입니다. 대장장이가 창과 방패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가 창을 팔 때에는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제일 좋고 강하고 날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반대로 방패를 팔 때에는 세상의 그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제일 튼튼한 방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순'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칼과 방패를 뜻하는 이 말은 그 때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 들여다보면 모순된 모습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신앙과 삶이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주님과 세상을 저울질하며 언제든지 편리한 것을 택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교회 밖의 세상에서는 세상 시민으로서 누구 못지않은 세속적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투기하는 일에 관여하고 자신의 일에 이익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땅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자녀 교육에 문제가 된다는 이유로, 장애인 시설이 자신의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도 그들을 사랑한다는 위선의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은 이율배반적이요 모순적인 모습을 우리들은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밖에 있든지 안에있든지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청교도의 교훈 가운데 "전통은 악마적인 것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교훈은 로마 카톨릭의 형식화된 예배의식과 지나치게 인본주의 된 전승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성자나 교황의 말과 내려오는 전승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황은 성경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은 성경말씀보다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교황의 것이라고 하는 해석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장로들의 유전이나 기타 다른 것들을 더 위에 둘 경우에 첫 번째 나타나는 해악이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주님을 높이 평가하고 귀히 여겨서 경배의 대상으로 삼지만, 육체와 영혼의 중심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인 마음은 완전히 주님과 관계없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최대의 헌신과 예배를 장담하지만, 실천하기는 포기한 영적 게으름에 가득 찬 위선자들로 백성들에게도 역시 이러한 위선 된 행위만을 가르치는 영적으로 암적인 존재들인 것입니다.

  두 번째 해악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가르치게 됩니다.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종교적 계율"(골 2:20)로 명령입니다. '교훈'은 가르치다(갈 1:12)는 단에서 나온 것으로 '교수' 혹은 '지식' '기능'입니다. '경배'라는 말은 '경건하다' '헌신하다' '좇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서 정한 종교적 계율을 가르쳐서 그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숙달되게 훈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교육을 받은 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지 알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그들의 계율에 헌신하면서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충실한 추종자들이 잘못된 교훈에 오염되어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눅 23:19-25)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해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의 유전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려받은 계명이나 전통을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에 얽매여 온 힘을 다해 붙드는 반면, 이혼한 부부가 그 순간부터 남남이 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져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위선자는 겉으로는 가장 올바른 척하지만 실제로는 진리를 버리고 자신들의 전승만을 강조하고 붙들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장로의 유전을 강조하는 자들은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마태복음 23:3,4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교훈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내 스스로의 마음부터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서 사랑하고 좇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니며 사단이 준 마음입니다. 우리는 오직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해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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