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은가 갈라디아서 4:1-11
사람이 태어나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가장 먼저 거치는 것은 영, 유아기 시절입니다. 갓난아기시절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오직 젖을 빠는 것과 잠자는 것입니다. 보통의 가정에서는 엄두도 낼 수가 없지만, 옛날 부잣집이나 혹 오늘날도 대기업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유모’의 젖을 먹으면서 자라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하였지만 성인이 되기까지는 많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나서 독립된 개체로 성장하기까지의 그 과정들이 매우 길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은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시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계급 사회와 같은 세상이 아니지만, 그 때는 누구에게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신분이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존귀한 신분으로 태어났더라도 어릴 때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귀하게 태어난 아기는 기르는 유모와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혹은 무술교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자라는 기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을 키워준 사람들, 교육시켜 주었던 사람들을 부리는 상전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들이 성인이 되면 반드시 군대에 가게 됩니다. 장교로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그가 장교가 되기까지는 분명하게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그 때에 가르치는 사람은 장교가 아닌 사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훈련기간을 잘 마치고 임관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장교로서 부하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적 성장 과정을 이처럼 유아 시기로부터 장성한 신앙인이 되기까지를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함축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나이에 불과한 유아 시기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꼭 유아 시기가 아니라도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성년이 되지 못하여 아직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을 수 없는 아들의 유약한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업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없으므로 종과 같이 아무 권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아버지는 아들을 후견인과 청지기 밑에 두고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후견인’은 ‘맡기다, 위탁하다’는 말인데, 초등 학문을 마친 아이를 성년이 되기까지 돌보고 지도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후견인의 직무를 주로 재산과 관계된 청지기의 직무와 구별하여 피보호자의 인격을 지도하는 후견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지기 아래 있나니’ 청지기(오이코노무스:οἰχονομους)는 집을 다스리는 자라는 뜻인데, 이들은 주인의 명령에 의해 주인의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자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청지기 직책의 중요한 역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눅 12:42; 16:1). 바울은 종종 복음 전도자를 ‘하나님의 정지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고전 4:1,2).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율법 아래 있으며 임시적으로 율법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는 율법을 ‘몽학 선생’으로 비유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율법이 담당하던 역할이 한시적임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구원의 방편이나 도리를 깨닫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린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초등 학문’으로 율법을 의존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배경을 설명하는가 하면,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이방인 개종자들이 다시 믿음을 저버리고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에 매어있는 것은 율법에 ‘종 노릇’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지옥 형벌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만을 지키는 것은 지옥으로 가라는 저주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비참한 모습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옥 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그것도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을까요? 정답은 택한 자녀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몽학 선생과 후견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던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또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신 채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인간 구원에 대한 어떠한 부족함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는 첫째, 완전한 인간의 대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인성) 인간이 아닌데 어떻게 인간의 대표가 될 수 있습니까? 학생이 아닌데 학생의 대표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완전한 대속 제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신성) 단 한 번의 제사로 인간들의 모든 죄를 구속하며 인간에게 자신의 완전한 의를 전가하고 또 구속의 효력을 각 인간에게 적용시키며 보혜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구속에 관한 원리를 우리는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연유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셨으며, 또 구원한 백성들에게 왜 율법을 주셔서 멸망하도록 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죄를 속하여 주시는 방법으로 ‘제사 제도’를 만드셨고, 이때에 드리는 속죄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물 되심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제사는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시대에는 이러한 제사제도까지도 진정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는 무관하게 형식적인 것이 되어가고,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만들어서 지키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바로 율법입니다. 이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제사로 돌아가서, 사람이 속죄제를 드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다시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죽으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완전한 율법을 통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모두가 죄를 짓지 않던지 아니면 죽어야 하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대표자가 되시고, 대표로 십자가의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완전한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요? 흠이 없는 제물이어야 합니다. 흠이 없는 제물이어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가 있습니다. 공의는 죄에 대하여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묻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다 죄가 있다고 했으므로, 온전히 흠이 없는 제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님의 ‘신성(神性)’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야 하고, 흠 없는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한 인간이면서도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모든 의무를 지켜야 할 예수님의 인간적인 책무와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짊어지고 있는 율법의 저주를 대신하여 감당하고, 그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기 위해 오신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의 일원으로 할례를 받으시고(눅 2:21), 유월절 절기도 지키신(요 2:13) 것과 같이 율법을 준수하셨으나 수동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시며 완전하신 그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산 제사로 드림으로써 구약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마태복음 5:17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신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 것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몸값을 받고 종을 풀어 주어 양민(良民)이 되게 하던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드려 죄의 종, 율법의 종으로부터 택한 백성들을 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5절에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단지 죄에서만 속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한 율법의 종노릇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는 복 중의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 줄로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이나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나 무두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 안에서 양자된 성도들에게 “그 아들의 영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영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內住)‘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바(ἀββά)는 아람어(히브리어 범주에 속함.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람어를 사용하였음)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가리켜 아빠라고 부른 것과 같이 애정과 사랑이 담긴 애칭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바’가 ‘아빠’라고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파테르:πατήρ)’라는 표현은 ‘아바’란 말의 헬라어 번역입니다.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친근감과 신뢰감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형식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노예,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났는데,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도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바울의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떠나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인 율법적 생활로 돌아가려는 것은 결국 죄에서 해방된 자유를 버리고 다시 죄의 종으로 사망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은 율법과 죄의 종노릇하던 우리들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주신 참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알기 전에 종노릇하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의 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상은 말할 것도 없이 사탄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를 확장하게 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모두가 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는 믿음 중심에서 행위 중심으로 이미 옮겨왔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왜 자꾸 기독교을 공격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은 인류를 위하여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고 선전을 합니다. 자신들을 세상적인 것을 떠나서 인간의 모든 정욕들을 물리고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속임으로써, 기독교의 믿음을 폄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분명하게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행위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내린다면 우리 성도가 그 높은 평가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복음은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변함이 없는 불변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행위들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금욕주의적, 봉사주의적 사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는 행위의 모습들을 보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31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말할 수 없는 은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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