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멸망했는가? 역대하 36:11-21
역대하의 마지막 장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앞 장인 35장에 나오는 ‘요시야’ 왕과 애굽 왕 ‘느고’의 전쟁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여 애굽 왕 느고와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중동 지역은 앗수르가 패권을 잡고 있었으나, 새로 부흥한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다하였고, 바벨론이 아직 그 세력을 적극적으로 펼쳐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기회를 틈타서 팔레스타인 지방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애굽 왕 느고에 대하여 요시야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느고는 앗수르를 도와 유브라데 강가의 도시인 ‘갈그미스’를 치러 간다는 핑계로 팔레스타인으로 진격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시야 왕은 느고의 군대를 저지하며 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애굽의 군대가 팔레스타인 통과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이 유린당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이며, 둘째, 애굽이 팔레스타인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한 것이며, 셋째, 당시 앗수르의 패전으로 겨우 독립을 하게 된 유다가 앗수르가 재기 할 경우에 닥치게 될 위기를 우려하여 애굽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보다는 세 번째가 주된 이유엿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B.C. 722년에 멸망시켰고, 그 세력이 강하여 남 유다까지도 앗수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 왕 느고가 요시야 왕에게 참 이상한 말을 합니다. 자신의 군대를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상 나라의 왕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의 왕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느고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당시 앗수르와 애굽의 연합으로 인하여 유다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겠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또 느고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에 자신보다 느고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즉 세상적인 정세 판단과 교만으로 요시야의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도 느고가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쟁을 하려고 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이방인들도 감동을 시키셔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므깃도에서 변장까지 하고 애굽과 전쟁을 하던 요시아는 애굽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종교 개혁을 이룬 요시야 왕을 죽이셨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가 다 해당이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죽이신 것입니다. 왜 죽이는 것이 사랑이었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를 위해 울지 말고, 그의 아들들을 위하여 울라”(렘 22:10)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고, 유다의 멸망과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보지 않도록 미리 천국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23세에 왕이 되었고, 불과 3달 만에 애굽 왕이 그 위를 폐하고 형제 ‘엘리아김’을 왕으로 세우고 이름도 고치고 ‘여호야김’이라고 하였으며,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습니다. 여호야김은 15세에 왕이 되었고, 11년 동안 치리하였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침공하여 ‘여호야김’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어 석 달 열흘 동안 치리하였으나, 또 다시 바벨론은 그를 잡아가고 그의 아자비인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 요하난, 여호야김, 여호아하스 모두 요시야 왕의 아들들입니다. 여호야긴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37년간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왕하 25:27). 이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에스겔을 비롯한 유다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던 만여 명의 기술자와 지도자들이 사로잡혀 가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은 유다를 3차례 침공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야김 왕 때, 두 번째는 여호야긴 왕 때, 세 번째는 시드기야 때입니다. 여호야김의 동생이자 여호야긴의 숙부였던 시드기야는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 왕국의 통치자로 책봉이 되었으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동시에 느부갓네살에 대하여도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게다가 시드기야 자신이 바벨론에 대항할 만한 힘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느부갓네살을 반역한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고기에 지나지 않은 처사이기 때문에 결국 유다 왕국은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유다 왕국을 멸망으로 이끈 시드기야의 정책의 배후에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와 거짓 선지자들의 충동이 있었습니다. 즉 당시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베니게의 여러 나라에서는 새로운 반바벨론 동맹이 이루어졌고(렘 27:1-3; 겔 21:8, 18-23),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예루살렘을 지키시고 또한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도 돌아올 것이며, 두 해가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머에를 꺾어버릴 것이라고 거짓 예언을 한 것입니다(렘 28:1-12).
이런 이유들보다 더 직접적인 것은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죄악과 참 선지자들의 교훈과 책망을 거역한 죄악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다 왕국은 시드기야 9년부터 2년 동안에 걸친 바벨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예루살렘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고 B.C. 586년에 멸망당하여,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수많은 백성들과 함께 베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죽이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에서 왜 죽이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상숭배로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유다 백성들이 잃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난 지 약 1,500년 후에 이제 그의 후손들은 스스로 언약을 파기하여 자유인이 아닌 포로로서 옛 땅 갈대아로 돌아가게 되었고, 또 소수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출애굽 했던 애굽 땅에 다시 제 발로 찾아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왕하 25:25,26).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서 70년 간의 포로 생활을 안식을 누리는 기회로 삼아 새로운 신정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환난을 당할 때에도 그 징계 안에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손길이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는 신앙으로 바로 돌아서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이 광복절입니다. 올해는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는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입니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멸망하게 됩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성립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제법상으로도 이 조약은 무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총리가 된 간 나오토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사죄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요점을 살펴보면,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일병합 조약이 체결되어서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즉 간 총리는 이번 담화문에서 한일 병합조약이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라고 언급한 대목입니다.
즉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은 한국인의 뜻에 반해서 이루어진 일들이라고 명확히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한다면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의 형식을 차용하면서 (혹자는 계승이라고 하지만) 사죄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한일병합은 위법성이 아닌 유효한 조약이라고 분명히 명시했다.
일본은 이번 총리 담화로 아주 좋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바로 그동안 한국 정부가 늘 강조하던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에 대한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즉 나중에라도 한국은 일본에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 번 총리가 통절한 반성을 했는데 다시 하라고 한다면 일본이 할까요?
결론적으로 보게 되면 1.일본 궁내청 소장의 왕실의궤만 돌려주고 그동안 청구했던 문화재 반환에 대한 마무리가 되는 것이며, 2.일본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에서 책임지지 않겠다고 확고하게 결말을 내었고, 3.태평양 전쟁 강제 동원 피해 보상자 문제를 종결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일본에 받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지 않을까요? 하지만 일본은 무조건 내세우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도 유효한 조약이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수상담화에 대한 일본 신문사의 분석 중에서 “왕실의 괘를 반환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잘해보자는 마음을 담아서 돌려주고 싶다.”라고 이야기를 했다는 해석입니다. .즉 앞으로 잘해보자고 건네주었기에 이전에 완료된 청구권 등의 문제는 거론할 필요도 없이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 수상의 담화에 대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을 표명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일본의 숨은 간교한 뜻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정답은 힘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한일강제합병을 당할 당시에도 대한제국은 힘이 없었습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이 세 나라는 우리나라 땅을 저희들의 땅인 양 각축전을 벌렸고, 일본은 군대까지 주둔시켜 이미 합병만 하지 않았을 뿐, 내정 간접을 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이렇게 힘이 없는 대한제국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다른 나라의 잘못이 아닌 대한제국과 대한국인들의 잘못입니다.
일본강점기에 안창호라고 하는 훌륭한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가 있었습니다. 한일 합병 이후인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하였으며, 이후 박용만, 정순만, 이승만과 함께 미국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3년에는 만주에서 이상촌 건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실력 양성과 인재 육성을 부르짖자 급진파는 당장 싸울 인력이 필요한데 무슨 말이냐며 반대하였으나, 안창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육성과 실력양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한국이 문명개화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실력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창호는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자신이 왜 인물 될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가?", "개인이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 인류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으며, 민족이 천대받을 때에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며 기독교 믿음에 뿌리를 둔 애국심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세계 국가가 한국의 경쟁력에 대해서 말할 때에 ‘교육’을 들고 있듯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것은 많은 요인이 있지만, 교육으로 인한 지식 습득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을 70년 만에 돌아오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나라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시며, 나라의 귀중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도 일본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오늘날의 한반도 정세는 한일강제합병 당시와 아주 유사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한반도를 놓고 세계 중국, 소련, 일본이 각축전을 벌렸지만, 지금은 남, 북이 서로 대치하고, 남과 북은 각기 중국, 소련, 미국, 일본을 등에 업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하여 강하게 요구할 수가 없고, 중국에 대해서는 북한과 밀접한 관계이이며 경제대국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독도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일본은 억지주장을 하는데도, 명백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대응도 제대로 못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들이 우리나라가 힘이 없는 약소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세계 9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단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속빈 강정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기도 합니다. 지난 13일 한국은행과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는 일본에 128억30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고 309억달러어치를 수입해 180억7000만달러의 무역적자를 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같은 무역적자는 우리나라가 해방 후 일본과 교역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규모라고 합니다.
이처럼 대일 무역적자가 증가세를 보이는 것은 '일본으로부터의 부품·소재 수입 증가'라는 고질적인 무역불균형 요인 탓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출이 증가할수록 수출품 생산에 필요한 일본산 부품·소재 수입이 함께 늘어 대일 무역수지가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실제 상반기 부품·소재부문의 대일 무역적자 규모는 120억달러로 집계가 되었습니다. 전체 대일 무역적자의 66%가량을 부품·소재부문이 기록한 셈인데 그나마 10년 전인 2000년(103%)에 비해서는 크게 개선된 것이라고 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1980년 이후 한·일 교역을 분석해보면 우리나라의 수출이 1% 증가할 때 대일 수입도 0.96%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최근에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지난해 2·4분기부터 1년 동안 우리나라의 수출액이 33.1% 증가하는 사이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액은 38.6% 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치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가 수출을 하면 할수록 일본의 배만 불리게 하는 것이고, 또 수출을 하고 싶고 능력이 있어도 일본에서 부품을 주지 않으면 수출도 못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많은 힘들이 필요합니다. 지식, 자원, 영토, 인구 등등의 기본적인 요소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상북도 땅 밖에 되지 않는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들에게 큰 위협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큰 힘과 능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떠나신 곳에는 침략과 압제와 고통 밖에 남은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고무적인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작은 나라, 이 민족을 먼저 택하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내 가족, 내 이웃, 내 미족을 복음화시켜서 오직 하나님 섬기는 나라가 될 때에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이 식어가는 이 때입니다. 남의 믿음 탓하지 말고 내 믿음을 잘 지키고, 나로 인해 내 주위가 변화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우리는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주관자가 되셔서 보호하시고 형통하게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총의 표징을 보이소서 (0) | 2010.08.28 |
---|---|
영적 전쟁 (0) | 2010.08.22 |
주님을 만난 나다나엘 (0) | 2010.08.07 |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사와 격려 (0) | 2010.07.31 |
영혼을 사랑하기에 (0) | 2010.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