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시편 제10편 강해: 악한자의 횡포에 대한 고발

chukang 2010. 6. 1. 11:54

 

첨부파일 시편 제10편 강해 악한 자의 횡포에 대한 고.hwp

 

시편 제10편 강해 악한 자의 횡포에 대한 고발

 

  본 시는 저자 불명 시대 미상의 시로 ‘개인비탄시(個人悲嘆詩)’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며 세상에 속한 자들 곧 인본주의자들로서, 현 세상에서 잠시 득세하여 극도의 교만과 포악함으로 유약하고 온유한 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무단히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고발과, 그러한 악인들에 대한 심판과 의인의 구원을 간절히 호소하는 시입니다.

 

  1-11절까지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횡포를 가하는 악인들의 악행들을 구체적으로 고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과, 12-18절에서는 악인들이 부인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이 세상을 감찰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인들이 횡행하며 그리고 인해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모순된 상황이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음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시어’가 바로 “어찌하여”라는 단어입니다. 또 ‘숨으시나이까’라는 시어에서 시인이 상당기간 그런 모순된 상황을 위해 기도하였음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절만을 보면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전체를 통하여 보면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는 가운데 그 응답이 속히 임하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2: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가련한 자’(아니:עני)는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압제를 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군박하다’(달라크:דלק)는 ‘불을 붙이다, 태워버리다’는 의미로 극도의 핍박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이 자기 꾀에 빠지게 해 달라는 것으로, 그 행위대로 보응을 받게 되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이 고통을 받고 악인이 득세하는 모순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여 주실 것을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자랑은 ‘할랄:הלל’로 ‘교만히 행하다.’ ‘찬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자신을 찬양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마땅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이며,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교만한 행위입니다.

  ‘그 마음의 소욕’은 악인들이 품고 있는 악한 정욕, 죄에 대한 열망,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들을 말합니다. ‘탐리하는 자’는 단지 물질에 대해 욕심을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탐리자를 공의로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가지지 않고 범죄하는 것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운이 좋지 않아서 혹은 재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견고하고’(하일:היל)는 강하고 고집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악인이 악행을 행할 때에, 아무리 무서운 심판의 경고를 하여도 그 마음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자들은 교묘하게 세상 법망을 피해 가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자랑하며, 법대로 사는 사람들을 도리어 어리석게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불의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징벌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애당초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마음대로 범죄하는 악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악인의 교만이 극에 달하여 자신이 영원히 형통할 것처럼 방자하게 행하는 것에 대해 시인이 탄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주’(알라:אלה)는 ‘상대방에게 발설하는 악담’이며, ‘궤휼’(미르마:מרמה)은 ‘간교하게 남을 속이는 말’을 가리킵니다. ‘포학’(토크:תך)은 ‘남을 부당하게 억누르는 폭력’을 뜻하며 ‘잔해’(아말:עמל)는 다른 사람에게 고역을 시켜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죄악(아웬:און)’은 죄 된 행위로 나타나는 비참하고 악한 결과를 가리킵니다. 악인의 입에서 저주, 궤휼, 포학의 말이 혀를 통해서 내뱉어질 때 그 결과 다른 사람을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비참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향촌 유벽한 곳’은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산적인 동구 밖 으슥한 곳에서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을 죽이고 가진 것을 탈취하는 것에 비유하여 의인을 해하려 드는 악인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외로운 자’는 ‘헬카’(חלכא)로 고통을 받는다는 뜻의 ‘하일:חיל’에서 파생된 말로 ‘고통 받는 자’ ‘약한 자’를 의미합니다. 힘이 없고 연약한 자를 해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악인들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사자는 그 난폭함을 인하여 성경에서 종종 무고한 자를 압제하는 불의한 자의 포악한 행위를 나타내는 데 비유됩니다. 사자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하여 굴혈, 즉 웅덩이에 숨어 기다리고 있는 것에 비유하여 연약한 자들을 잔해하려 드는 악인들의 난폭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에서 보듯이 짐승을 잡는 사냥꾼에도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묘하게 약한 자를 압제하고 늑탈하는 악인의 간교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칼빈은 악인이 의인을 잡기 위해 바싹 움츠렸다고 해석을 하고 있으며, NIV에서는 의로운 자가 악인에게 사로잡혔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앞의 4절과 같습니다. 악인은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거침없이 어떤 악행이든지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비웃은 행동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악을 많이 행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어떤 악을 행해도 절대로 자신들이 그 악행의 대가를 받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생각까지도 지켜보고 계시며 결국에는 선악 간에 모든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시고 공의의 보응을 하실 심판주이심을 알아야 합니다(전 12:14)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일어나다, 손을 들다’는 말은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의인의 구원을 위해 속히 역사하시기를 간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심판을 행하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이는 살아계시며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어찌 하나님께서 당신을 멸시하는 악인들의 행위를 그냥 두고 보실 수 있느냐는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의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위를 감찰치 아니하시고 영원히 보시지 않으리라(11절)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무소부재하심, 그리고 공의로우심을 부인하는 악인의 말에 대한 반박입니다. 1절에서는 모순된 상황으로 인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을 확신하는 힘이 넘치는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 ‘고아’는 단지 부모가 없는 아이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같이 역경에 처해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

  팔을 꺾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세력을 꺾어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인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악인의 모든 죄를 보응하여 멸망시키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이러한 저주의 기도는 개인의 감정 차원에서 복수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전체에 실현되기를 구하는 정당한 기도입니다. 악인은 단순히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대적이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도전하며 이 땅의 공의의 실현을 훼방하는 사단의 졸개들이기 때문입니다.

 

16: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영원토록 주관하시는 최고통치자이시므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질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권과 악인의 완전한 멸망에 대한 시인의 기원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할 영원한 메시아의 왕국에 대한 예언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7: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려 들으시고.

  ‘예비하다’는 ‘쿤:כון’으로 ‘세우다,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주께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안정시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믿음으로 매우 담담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18: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세상에 속한 자’를 직역하며 ‘땅에서 온 사람’(אנוש מן חארץ)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 본래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뜻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비할 때 너무도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교만을 버리고 그 분께 절대 순종하여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 세상은 눈에 보이는 현상 그대로만 본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의 택한 영혼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충분한 시간 확보를 위하여 태초부터 종말까지 구속사를 연장하시고 또 그 기간 중에 형평의 원칙에 따라 절대 공의의 실행을 잠시 유보하시고, 선과 악의 잠정적 혼재(混在)를 허용하신 결과, 사단이 궁중 권세를 잡고 있으며 악은 도처에서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악하시거나 아니며 선악에 대한 구별이 없으시거나 심지어는 악을 이길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모든 세대 중에 택한 성도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로 회개할 충분한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절정에 이르는 날, 곧 세상 끝날에 여호와의 절대 공의가 발휘되어 악은 완전히 없어지기까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난하고 외롭고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주님 오실 날을 기대하면서 저 천국을 더욱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