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8편 강해 우주만물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거대한 우주, 그리고 지구의 모습을 간결하면서도 세밀한 느낌을 받도록 묘사하고 있는 본 장은 이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베풀어주신 은혜임이 분명합니다.
하늘의 달과 별들, 그리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 또한 땅의 각종 들짐승, 온갖 만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그림과 같은 시입니다. 다윗이 어느 때에 이 시를 썼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과거 목동 생활을 했던 경험 때문에 남달리 자연에 대한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던 중 영감을 얻어 이 아름다운 시를 썼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총 150편의 시 중에서 자연을 주제로 노래한 시는 8, 19, 104, 147편으로, 그 중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주(主)’로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특별히 인간을 존귀히 여기시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찬양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시를 공중 예배시나 특별한 절기 때에,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도 ‘예수 승천기념일(the Ascension Day)’에 특별히 낭송하였습니다. 이 시는 찬양시 중에서도 특별히 감사예배시로 분류가 됩니다.
1절과 9절을 보면 신비한 우주 속에 담겨 있는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끝내고 있습니다. 2,3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아름다운 창조 솜씨에 대한 찬양이며, 4-8절은 비천한 인간을 만물 중에 으뜸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양입니다.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라는 말은 ‘아도나이(אדני)’로 ‘주인, 소유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주’라 함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자이시며 또한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재자(主宰者)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 자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곧 자신의 주가 되신다는 신앙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여” 우리는 이스라엘 공동체이며, 오늘날 모든 성도를 지칭합니다. 이로 볼 때에 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반영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땅에 가득한 피조물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발견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에만 매료되어 찬양하는 세속주의적 자연 예찬론자들과 달리 모든 자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시인의 창조 신앙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영광은 앞의 ‘주의 이름’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대구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하늘에 있는 해와 달, 별 등의 천체 등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대적”과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서로 대조되는 개념으로 주의 대적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어리석고 교만한 악인을 가리키고,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자 거짓이나 교만을 행할 줄 모르는 순전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을 통하여 큰 권능을 나타내심으로써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인정하지 않던 대적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므로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고전 1:27).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일반적으로 ‘주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 보다 작고 섬세한 이미지를 주는 ‘손가락’은 하늘과 달과 별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 중에서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시적인 표현입니다.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노쉬(אנוש)’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 깨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시인은 영원하시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비할 때 지극히 미천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시고 보살피시는 무한하신 은혜에 탄성을 발하고 있습니다.
“인자(בן־אדם):벤 아담)”은 흙으로 지어진 존재로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권고하사’는 돌보다, 권념하다는 뜻으로 앞의 ‘생각하다’와 유사한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연 만물을 대할 때 그 이면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그 분 앞에서의 겸허한 자세를 갖는 모습이 올바른 신앙의 모습일 것입니다.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천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אלהים)’인데, 단수로 보면 하나님을 가리키며, 복수로보면 ‘천사들’ 또는 신적인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은 이것을 ’천사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본 절을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에서 ’천사‘로 번역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히 2:7). 이런 맥락에서 엘로힘을 천사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윗이 그의 시에서 하나님을 대개 ’주(아도나이)‘로 부르고 있지 ’하나님(엘로힘)‘으로 부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을 하나님께 비견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죄악이었으므로 본 절의 ‘엘로힘’은 하나님이 아닌 ‘천사들’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적 존재요, 직접 하나님의 존전에서 수종드는 자들인 천사에 비견하여 인간의 고귀함을 증거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비록 천사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창 1:26)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살핌을 받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인간이 비록 광활한 우주에 비할 때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천지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릴 자로 세우신 것을 말합니다(6절; 창 1:28). 다윗은 앞의 4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본질 면에서 보면 지극히 유한하고 깨어지기 쉬운 흙으로 만든 비천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영적 존재인 천사를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 중에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면서 하신 명령 중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릴 지배권을 부여하셨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이 같은 지배권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도 때때로 자연의 피해를 당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은 자연에게 신적권위를 부여하게 된 것입니다.
7,8: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아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3절에서는 천체에 대하여 언급하고, 여기에서는 땅과 바다에 있는 각종 생물들에 대하여 언급하여, 서로 대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임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며, 이 모든 것들을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신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며, 그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1절과 같은 표현으로 끝맺음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본 시는 대구법적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이 어떻게 위임되었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만물을 온전히 통치할 것에 대한 예언적인 시이기도 합니다.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편 제11편 강해: 구원의 확신 (0) | 2010.06.03 |
---|---|
시편 제10편 강해: 악한자의 횡포에 대한 고발 (0) | 2010.06.01 |
시편 제7편 강해 (0) | 2010.03.17 |
시편 제6편 강해 회개와 용서의 확신 (0) | 2009.11.04 |
시편 제5편 강해 도우심의 확신 (0) | 2009.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