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억지로 하지 말고

chukang 2010. 5. 23. 00:44

 

첨부파일 억지로 하지 말고 갈라디아서 2.hwp

 

억지로 하지 말고 갈라디아서 2:1-5

 

  바울이 세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을 할 때에 ‘디도’를 데리고 함께 갔습니다. 그 때에 사도들과 회담한 내용이 1-5절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베드로는 유대인의 전도자로,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사실이 인정이 되었으며, 바울이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내용을 6-10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에 당시 초대 교회 시대에는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와 반대가 되는 개념은 ‘할례를 통한 구원’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이신칭의’보다는 할례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할례(circumcision)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민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가시적 증표입니다. 이 할례 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법으로서 구약 율법 중에서도 선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창17:10-14; 출 12:48,49). 이방인이 이스라엘에 귀화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가장 절대적인 법이며, 이스라엘 자손이라도 생후 8일째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선민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할례는 이제 구약 시대가 끝나서 구속사도 구약 선민에서 세계 만민으로 확장된 신약 시대에는 시효가 종료된 구약 율법(의식법)의 일부에 불과하였지만, 과도기인 초대 교회 시대에는 구약과 신약이 혼동되는 중에, 그것이 구약 율법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이고도 가시적인 율법이었기 때문에 다른 그 어떤 사안보다 가장 빈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구약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사도들과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모여서 회의를 한 결과 ‘할례에서 세례’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할례는 신체의 일부를 잘라 과거의 죄를 청산하고 선민의 일원이 되는 것을 상징하였지만, 신약 시대에는 그 역시 과거의 죄를 씻고 교회의 일원으로 새로이 연합함을 상징하는 외식인 세례(Baptism)로 전환이 된 것입니다.

  할례나 세례나 상징적 의식인 점에서는 같지만 하례가 그 개인의 직접적 구원이 아니라 다만 민족 전체의 차원에서 구약 선 민의 일원이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에 그친 반면에, 세례도 상징에 그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각 성도의 직접적인 구원이라는 점에서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본문에서 바울은 ‘디도’라는 제자의 예를 들어 할례를 억지로 받지 않게 했다고 예루살렘 총회와 사도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적인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거짓 형제는 유대 율법주의 신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그들을 거짓 형제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들이 비록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가 되었지만 율법주의를 계속 고수함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도 ‘거짓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고후 11:13).

  그러면 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율법을 고수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 부를까요? ‘가만히 들어온’이라는 말에 답이 있습니다. 흔히 스파이를 말합니다. 분명한 이단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왜 가만히 들어왔을까요? 가만히 들어왔다는 말은 아니면서 그런 체 행세를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면서도, 믿은 체하며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함입니다.

복음과 율법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율법은 복음의 그림자입니다. 율법을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로마서 3:20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가 생각이 나야 회개를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죄에 대한 의식을 갖게 했지 궁극적으로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없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제사제도’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용서를 받을 수 있으므로 새 생명과 참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여전히 죄의식 속에서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요, 복음의 참 가치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서 여전히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 ‘거짓 사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주안점은 믿음으로냐 행위로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총회에서와 사도들 앞에서도 또 갈라디아 교회에게 차이점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1. 할례를 억지로 받게 하지 말라.

 

  구원에 이르는 것은 율법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밝히는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도 역시 복음 전파가 시작되던 선교 초기부터 복음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율법주의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존경을 받던 디도도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 기간 중에도 디도를 대동시켰던 것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율법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은 이방인들을 교회의 일원을 받을 때에 약속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할례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롬 3:31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만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폐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여 청소나 빨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할 때에, 자녀들은 정말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그 부모를 사랑하고 있다면 하지 말라고 하여도 자발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라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이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한다면, 비록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자신의 내면 세계나, 신앙을 위하여 율법을 더욱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말하는 ‘율법’은 당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유대인들이 지키던 613가지의 조항으로 된 율법이 아니요, 또한 제사법도 아니요, 사회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이야말로 천지는 없어져도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율법이요, 규례요, 법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율법은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하나님의 사랑 즉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십계명이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결국 이단인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구약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구약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이단인 것이 분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유대인의 행위를 강요하지 말라.

 

  바울은 과거 일시적으로 게바 즉 베드로가 이방인의 풍속을 좇았던 것을 예로 들어서, 이방인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갈 2:14에는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고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베드로를 욕하려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이었지만 복음이 주는 자유를 깨달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가 음식을 먹는 일에 있어 율법의 전통에 개의치 않고 이방인들과 같이 음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스스로 율법의 규례를 따름으로써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처럼 율법을 따라 살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에 대한 사울의 책망은 이방인들과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행한 베드로의 행동은 복음이 허락한 자유를 무시하고 도리어 율법적 생활로 돌아가는 결과라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9-15을 보면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는 복음적으로 또는 율법적으로 음식 문제 외에 다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도 율법에서는 금지되었으며, 부정한 음식도 먹지 못하도록 율법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결코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과거 이방인과의 교제와 함께 율법에서 규정한 부정한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바울이 지적한 것에 대하여 한 마디도 반론을 하지 않고 시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이방인을 성도로 받을 때에 사도행전 15:20에 나오는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지하는 것이 가하니”라는 말씀을 적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음식 문제를 설명할 때에 결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고전 10:18-21을 보면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치 못하리라.”고 분명하게 음식 문제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은 곧 갈라디아서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낸다는 것은 예쁜 얼굴로 꾸민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는 악한 것, 술수 등을 품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외적인 모양을 과장하여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유혹하려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별개의 속셈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할례 시행을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의도 속에는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염려하여 단순히 이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할례의 시행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에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던 율법주의자들은 결국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십자가의 도를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무리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3. 봉사를 억지로 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봉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은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의 봉사로 영적인 봉사를 하지만, 성도는 주로 물질 봉사, 육체적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1-4을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물론 헌금이나 기타 봉사하는 것이 믿음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구원의 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배우고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믿음이 들어가고 은혜가 들어가면 두 렙돈을 바친 과부와 같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6을 보면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그 성도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주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가꾸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옥토가 되면 말씀을 받을 때에 기쁨이 넘치게 되고, 봉사할 때에도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말씀이 달되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찌하면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저절로 행함이 믿음으로 좇아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고전 15:36,37)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가 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들은 모두가 죽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게 되고,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살고계신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억지로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자발적인 봉사를 원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그렇게 되기까지 주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형상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또한 내 안에 주님이 좌정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믿음 안에서 순종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순종하는 성도의 모습은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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