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적 인간의 모습 로마서 3:9-20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과연 어떤 것인가?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주제가 되는 물음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의 인간에 대하여 처음부터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태초의 인간은 그야말로 선한 모습으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그 ‘생기’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인간이라고 하는 본래의 상태에 대해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기(נשמת חיים: 니쉐마트 하이임)’는 ‘생명의 호흡(breath of life)'라는 뜻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 창조가 특별한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께로부터 나온 생명의 호흡을 인간의 육신에 불어 넣으셨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오 주관자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호흡을 취하시면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생기가 인간의 몸에 부어지는 순간 인간은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창 2;7). ‘생령’은 무엇을 뜻할까요? 생령은 ‘살아서 호흡하는 생명체’(נטש חיה: 네페쉬 하야)라는 뜻입니다. 호흡하는 생명체는 새, 고기, 짐승에게도 일반적으로 적용이 됩니다(창 1:20,21,24). 하지만 이러한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은 독특한 방법으로 ‘네페쉬 하야’가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즉 일반 동물들은 단순히 말씀으로만 ‘네페쉬 하야’가 된 데 비해, 인간은 친히 당신의 생기를 인간의 코에 불어 넣어 주심으로써 살아서 숨 쉬는 생명체가 된 것입니다. 즉 다른 움직이는 생명체와는 달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생기’를 받았다는 것은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뜻이 담겨져 있을까요? 그 뜻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뜻이 바로 인간 존재를 밝힐 수 있는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다른 모든 생명체는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창 1:27). 인간을 만드실 때에 가장 중요한 점은 ‘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אדם)은 흙(שדמה)과 같은 어근 을 가진 단어로, 사람은 아담이며 흙은 아다마입니다. 이처럼 흙의 요소로 만들어진 형체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로 인하여 ‘생령’이 되어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 창조의 과정에 흙과 생기와 하나님의 형상이 결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상은 ‘image'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영혼 즉 지, 정,의가 하나님의 인격 주조를 모델로 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구성이 되었으며, 인간의 눈에 드러나는 외형적인 형체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로서의 권위와 장엄함이 드러나도록 꾸며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존엄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히 선하신 하나님을 닮아 ‘선한 인간’으로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은 ‘악한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가졌던 이런 본래의 선하고 온전한 상태가 타락 이후 거의 상실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눈부신 문화를 만들어 내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처음의 상태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거꾸로 현대 문화가 눈부신 면이 있으면서도 그 뿌리 깊은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단으로 인하여 들어 온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모습으로 창조된 아담과 그 아내가 에덴 동산에서 스스로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보다 성숙한 인격체로 발전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성숙의 기회를 타락의 기회로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곧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스스로의 교만으로 인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슬픈 죽음과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에덴동산에는 사랑과 생명의 빛이 사라지고 수치와 공포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행위 언약’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이 깨어지는 장면이요, 그 결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평의 교제가 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로마서 5:12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인간의 행위 여부에 따라 죽음과 영생이 결정되는 언약이었습니다. 선악과에게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는가? 아니면 죄를 주는 능력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악과는 단순한 과일에 불과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죽음이나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선악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누가 결정을 하게 될까요? 인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의지를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스스로 전인격적인 독립체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존엄, 존귀한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이런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며 교제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대상으로 하여 맺은 행위 언약의 목적은 결코 인간을 속박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이 그 말씀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법을 깨달아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도록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담은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주었습니다. ‘하와’(חוה)는 ‘살다’란 뜻의 ‘하야’(חיה)에서 나온 말입니다. 죽음을 선고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창 3:15)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와를 통하여 후손을 주신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 언약’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장차 아담과 하와를 통한 후손이 탄생할 것임을 약속을 받았습니다. 즉 죄를 지은 아담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조금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3:22에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범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한탄 섞인 말입니다. 곧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이제 인간이 태초의 순결과 무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죄와 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어서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요,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와 악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바울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의 인간을 가리키면서 ‘본래적 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요약한 인간의 죄는 첫째,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죄악 된 마음과 생각입니다(11,12절). 둘째, 속임수와 저주를 일삼는 죄 된 언어생활입니다(13,14절). 셋째, 피 흘림과 파멸을 일삼는 죄 된 행위입니다(15-17; 사 59:7, 8). 넷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입니다(18절; 시 36:1).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그로인해 모든 인간이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해결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찾아야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같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인 부패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는 말은 시편 14:1-3에 나온 말씀 중에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53:1-3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 중에 전 인류의 전적 부패성에 관해 가장 명료하고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말과 행위와 그 마음의 생각까지도 부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1:8에서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죄의 상태에서 출생하였으며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인류 가운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도무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의 본래적 모습은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악한 존재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허락하시고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게 하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악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스스로 믿음을 결정하여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기억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령을 그 마음에 부으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신 것은 바로 ‘생명의 씨’입니다. 이것은 영생의 씨로 하나님의 씨(요일 3:9), 썩지 아니할 씨(벧전 1:23)입니다. 이것은 창조 시에 아담이 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의요, 은혜를 말합니다. 이 씨를 받은 자는 주님을 영접하며, 회개의 절차를 가지게 되고, 믿음과 순종으로 나가기를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로운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육신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입니다. 갈라디아서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성령은 ‘영’이니까 어떤 특별한 역사하심을 말할까요? 신비한 체험을 말할까요? 우리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 말씀에서도 보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한 현상과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특별한 현상이나 은사 쪽으로만 생각을 하게 되는 경향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관련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야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말씀’으로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떠나서는 성령도 예수님도 믿음도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는 모두 말씀으로 시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나 은사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간구하게 됩니까?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말씀’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왜 갑자기 본래적 인간에 대하여 언급을 하다가 ‘말씀’을 거론하고 있는가 하면, 말씀을 떠나면 아담과 하와와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왜곡시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요, 불순종이요, 죄의 실행이 되는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왜 먹게 됩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이 없어졌습니까? 교만이 마음에 싹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곧 교만입니다. 교만은 육신의 소욕으로 사탄의 유혹을 불러들이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는 영적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하는 타이틀이 붙어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싸움을 싸울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검, 곧 말씀의 검”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곧 말씀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지 왜 성령이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떠나서는 절대로 어떤 역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 자체가 곧 성령의 역사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나 십자가 사건도 역시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본래적인 모습은 ‘죄인’입니다. 이것은 곧 사탄에 속해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악한 것만이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들어와서 싹이 트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며, 회개하고 믿음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이 우리 마음속에는 죄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 속에는 두 가지가 함께 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성령의 씨, 생명의 씨, 말씀의 씨요, 또 하나는 사탄의 씨로 말미암은 죄의 모습으로서 육신의 소욕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가 날마다 싸웁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얼마나 갈등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 나는 안 그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더 큰 교만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24,25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래적 죄인의 모습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곧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훼방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작업하는 것이 말씀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교만을 심어주고 의심하게 하고, 결국에는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 작업이 지금도 우리 성도들에게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안 되면 복종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에 순종시키는 것입니다. 믿음, 순종, 복종 이와 같은 것을 하기 위해서 선행되는 것은 곧 성경을 읽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이요,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러한 기본이 없으면 어느 틈에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고 죄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언제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세상적인 복’이라는 것도 말씀에 순종할 때에 영적인 복에 따라서 함께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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