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chukang 2010. 4. 17. 21:48

 

첨부파일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빌립보서 4.hwp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빌립보서 4:10-20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자신을 위하여 많은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의 투옥으로 인하여 근심하며 염려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투옥에 대한 해명과 함께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면서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하여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생과 사는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이며, 어떻게 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공동체가 바로 서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첫째, 단결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2:1-11)  단결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는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지 않는 삶은 결코 겸손을 줄 수 없으며, 공동체는 단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이단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3:1-21) 교회를 신앙적으로 혼란시키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엄히 경계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득의’의 원리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4장에서 전반부인 1-9절에서는 성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권고와, 주님을 대하는 성도의 올바른 생활에 관해 교훈하며, 성도들의 덕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동안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빌립보서의 주제들을 살펴보면,

1. 주안에서의 기쁨을 가지라.(4:4)

본서에는 기쁨이라는 말이 16 차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그 자신은 비록 옥에 갇힌 고난의 상태에 처해 있었으나 기쁨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성도들과 지속적으로 나누고 있는 사랑의 교제(1:4)와, 그의 갇힘을 인하여 오히려 복음 전파의 새로운 국면이 열린 사실(1:14-18)과 그리고 조만간에 빌립보 성도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1:25,26)과 자신에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1:21) 이유로 기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천국에서의 영생과 지극한 영광(3:10,14)을 확신하기 때문에 누리는 심령의 평안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역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로 바울과 동일한 영광과 영생을 보장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여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2. 성도는 천국 시민권을 지니고 있다.(3:20)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대속의 공로를 힘입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서 주어진 명칭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땅의 것들에 소망을 두고 육신의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게 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3:17-21; 마6:33).  이러한 삶을 살려고 할 때에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먼저 자신이 타락하였고 나아가 인류까지 타락하게 한 사단이 잠시 권세를 잡고 있어서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까지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15:18,19).  그러나 그러한 고난을 당할지라도 성도들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여야 합니다.  그 같은 고난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영광에 족히 비할 바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롬 8:18).

 

3. 옥에 갇힌 것이 유익이라(1:14-18).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힌 사실로 인하여 근심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 일로 인하여 복음 전파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설명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안심시키며 도리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참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2:5).

  성도들의 목표 혹은 사명 중에 하나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것을 본받아야 할까요?  다 본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6-11).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어 사람의 형체로 오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은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부단한 자신의 영적 성숙을 꾀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사랑의 교제(2:25; 3:15-18)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교제는 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특히 빌립보 성도들은 자신들이 곤궁한 중에도 물질로서 바울의 전도 사역을 도왔으며 또한 바울이 옥에 갇히자 헌금을 모아 보내고 사람을 보내 바울을 수종 들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한 몸이 된 것이며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아래로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보서의 주제들을 잘 파악하고 있을 때에 결론 부분인 4장을 보다 잘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첫 번째 주제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4)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요?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봉독한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표면적인 의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그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뜻으로 아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의 담대하고 확신 있는 신앙생활의 표현입니다.  10-12절이 바울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면적인 이유입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준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선물과 그 선물에 깃들어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성도들의 호의에 크게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바울의 이 기쁨은 단순히 물질적 지원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이 신앙 위에 굳게 서서 이제 다른 사람을 더울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된 것에 따른 넘치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어려운 여건으로 인하여 돕던 일이 일시 중단이 되었다가 다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래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투옥과 로마 호송 등으로 일시 중단이 되었는데 다시 ‘에바브로디도’편으로 헌금을 보내고 에바브로디도로 하여금 바울을 돕게 한 것입니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감사하며 칭찬하는 것이 자신의 궁핍을 해결하려는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육신적인 것보다는 항상 영적인 부요함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주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헌신하면서 배우고 깨닫게 된 것의 총 결론으로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평안과 감사의 방법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모든 형편을 초연하며 평안 속에서 자족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와 영적 연합을 통해 그 안에서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자기 만족이 아닌 그리스도로 인한 만족과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고후 9:8; 빌 1:21; 3:10)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구체적으로 자족하게 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비천과 풍부의 양쪽 어떤 생활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만족하는 영적 부요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비천에 처할 때는 더욱 주님의 함께 하심을 기도하며 기뻐하고, 풍부에 처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사용함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천할 때에는 신앙이 좋다가도 부유해지면 교만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 31:20과 같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하는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풍부할 때 신앙이 좋다가도 비천해지면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심히 교만한 사람입니다.  구원의 은혜보다 물질을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물질을 풍부하게 부어주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면서 어떻게 주님을 섬기느냐고 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삶에 직면해 오는 모든 상황과 관계 속에서 자족할 수 있는 일체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성도는 비천할 때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부유할 때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아야 겸손과 소망을 잃지 않고 항상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본받는 것이며,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온 자발적인 헌신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고전 4:10-13; 고후 6:10; 빌 2:3)  이렇게 성도는 어떠한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복음을 위한 삶을 견지하면서 철저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바울이기에 17절을 보면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재정적 지원이나 선물을 보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빌립보 교회의 헌금에 대하여 감사를 언급하는 것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과 복이 넘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데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이 복음 사역을 위해서 신앙으로 헌금할 때에 하나님의 영적인 큰 복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행 20:35).  이런 의미에서 굳이 상업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성도들의 선교 헌금은 이익을 위해 투자된 자본금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자본금의 이자나 혹은 이익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익금은 장차 모든 것을 결실 때인 주님의 재림의 날에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내준 헌금으로 인하여 이미 풍성하게 채워졌음을 밝힌 것인데, 이는 헌금으로 인한 그의 감사가 순전히 이미 받은 헌금에 대한 감사일 뿐 새로운 헌금을 구함이 아니라는 의도가 강력하게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의 헌금에 대하여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헌금은 19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어려운 가운데 헌금한 것에 대한 보상적 개념으로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되,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과 빌립보 온 성도들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찬양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어떻게 비쳐집니까?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지 않습니까?  이런 바울이 바로 ‘온전한 도구’로서 쓰임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구는 주인이 사용하는 대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할 수 없어요.  나는 시간이 없어요.  나는 부족해요.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있잖아요.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나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가만 들어보면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 러나 사람이 듣기에 일리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그래! 그럼 그렇게 해라.”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되나요?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하면 내가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를 까먹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내 상급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 면류관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입니다.  자족할 줄을 안다는 것은, 내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내 생각과 이성과 인간의 원리에 따라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힘을 때에 ‘네’하고 순종하고 일하는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적인 방식과 힘으로 도저히 할 수가 없으나 순종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되도록 역사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자족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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