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 사람들 사도행전 17:16-34
아덴(Athens:아테네)은 헬라 즉 그리스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라고 합니다.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3대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이 유명하고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 도시는 기독교 역사에 매우 중요한 곳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자세히 알아보기 바랍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아덴에 대하여 잠깐 말씀을 드리면, 알렉산드리아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334년으로 봅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붙여 도시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유명한 건축가 디노크레테스에게 도시를 건설하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동방원정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완성을 보지는 못하고 결국 죽었지만 부하인 클레오메네스가 도시건설을 계속하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그의 계승자중의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고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파로스의 등대"라고도 불림)가 있었고 고대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며, 수학자 유클리드(헬라명: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ēs))도 이 도시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또한 유대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의 중요한 주민으로 유력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번역본인 셉투아진트 본도 바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습니다.
아덴은 헬라(그리스)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아테나라는 여신의 이름을 따서 아덴이라고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역사에서 배웠듯이 ‘파르테논’과 ‘에레크테움’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학문과 예술적으로도 꽃을 피운 도시로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헬라의 눈’, ‘모든 지혜의 본 고장’이라고 불릴 만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며, 본문 18절에 나오는 에피큐로스, 스토아 학파가 이곳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민주주의의 고장으로 자유 시민 사회를 발전시켰고, 나중에 마게도냐의 빌립 대왕에게 정복되었고(B. C. 338), 결국에는 로마에게 정복당하였습니다(B. C. 8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의 문화적 지배력은 계속 살아있어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였으며, 사도 바울 당시에도 옛 영화의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아덴은 신전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사원들로 가득했으며, 그 외에도 셀 수 없는 각종 신들과 우상을 위한 신상들이 거리, 광장, 마을마다 널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역사적 관점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찬란한 문명의 걸작품들로 기록되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도 바울의 눈에는 헛되고도 헛된 어리석은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로 보였던 것입니다. 아덴을 바라보고 있는 바울의 당시 머릿속에 대하여서는 성경에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한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출 20:3,4)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그 마음에 분한 생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16절). 이런 연유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무지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을까요?
1. 전도한 사람들과 장소
첫째, 회당에서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한 후에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이것을 '흩어진 유대인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은 물론 유럽 각지로 흩어졌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떤 곳이든지 반드시 회당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아덴에 도착하였을 때에 당연히 회당을 찾았던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께 대한 것을 전해 듣고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도 역시 당연히 복음을 증거 할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라고 하는 사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할례는 알지만 세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저자에서
바울은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저자(시장)로 갔습니다. 저자는 헬라 문명사회에서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저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은 자칫하면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담대하게 저자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학자들에게
18절을 보면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비구레오’는 ‘에피큐로스 학파(Epicureans)'를, ’스도이고‘는 ’스토아 학파(Stoics)'를 말합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사모스 섬 출신의 에피큐로스(B. C. 342-270)가 창설한 학파로 그의 이름을 따라 에피큐로스 학파로 불렸습니다. ‘쾌락’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았는데, 그 쾌락은 육체적 쾌락이기보다는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ataraxia)를 통한 쾌락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자연신론의 경향을 띠고 있는데, 신은 있으나 인간과는 별개의 존재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육욕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쪽으로 흘러갔다고 합니다.
스토아학파는 키디움 출신의 제노(Zeno, B. C. 340-265)가 창설한 학파로, 회당에서 제노가 강의하였기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이 ‘스토아학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에피큐로스 학파와 대립되는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또 이성을 강조하며 청빈과 자연에 따른 생활, 만민 평등사상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상한 사상 때문에 로마의 황제나 박식한 고관들이 많이 추종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스토 학파의 종교관은 범신론이었는데, 최고의 신이 곧 ‘세계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듯 당시 최대의 지식인들에게도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2. 아덴 사람들의 반응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로는 ‘스페르몰로고스’라는 말인데, ‘씨앗을 줍는 자’라는 뜻입니다. 학문적으로는 ‘잡다한 지식을 주워 모아 동냥 지식을 쌓는 자’라는 멸시의 의미로 쓰입니다. 즉 헬라의 철학자들은 바울을 형편없는 잡지식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육체의 부활을 전했는데, 헬라 사상에서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는 철학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덴에서는 끝없이 새로운 신들을 만들고 전하고 신상들을 세웠는데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신들의 하나로 여겼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부활(아나스타시스)’을 질병에서부터의 회복 정도로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바울이 자신들이 듣지도 못한 이상한 내용을 전하자, 붙들어서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곳은 ‘화성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아덴의 중앙 광장 북편에, 아크로폴리스의 서편에 있는 평평한 바위 광장이라고 합니다. 희랍 신화에 ‘아레스’(화성이라는 뜻의 신)가 그의 아들 ‘넵투네(Neptune)’를 살해한 범인을 이곳에서 재판하였다고 하여 종종 공개 재판의 장소로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바로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이곳으로 붙들어 데려간 이유는 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공식 석상에서 바울의 말을 들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듣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의 내용은 아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새로운 것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던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육체의 부활을 말한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3. 전도한 내용
사도 바울은 아레오바고 중앙에 서서 서두를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말을 시작하였습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미신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와 둘째는 종교성이 강하다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기가 한 가지 다른 종교에 빠져있는 사람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종교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다원론’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를 믿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 빠진 사람은 그 종교만이 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된 종교를 믿었다고 깨닫게 되는 순간, 주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자신에게 있어서 ‘부활’인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제사를 지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아그노스토 데오’(ΑΓΝΩΣΤΩ ΘΕΩ)라는 대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유래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3세기 때 기록된 문헌에 의하면 “B. C. 6C에 아레오바고에 큰 질병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그 때 구레네 사람인 에피메니데스가 와서 이 병을 구해주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그 때 그는 혹 감사의 대상에서 빠진 신이 있을까 염려하여 제물을 놓고 그 위에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제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을 볼 때에 아덴 사람들은 모든 신들을 섬기려고 했으며, 그래서 불식간에 알지 못하는 신들을 섬기지 못해 그들로부터 저주와 재앙을 받을까 염려하여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까지도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덴 사람들의 미신적인 어리석음에 대하여 분노하였을 뿐 아니라, 저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 성향을 접촉점으로 삼아 전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전도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지우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그 신, 참 신으로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은 만물(판타: παντα)의 근원을 물, 불, 공기 등과 같은 물질에서 찾았지만, 바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바로 만물의 근원이요, 주재자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홀로 계시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는 계시지 않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은 되지만 하나님의 거처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오, 지금도 우리를 친히 돌보고 계시는 분이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을 찾아 헤매었지만 정작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각종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 사람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분명한 자기 계시인 성경과 복음을 전해 듣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길은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서만(롬 5:9)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30절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드디어 복음의 정수인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연과 역사를 통하여 어렴풋이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하셨지만(17절) 이제 확실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으므로 더 이상 변병하지 못하게 되었으니(롬 1:17-20)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믿지 않던 자가 복음을 영접할 경우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허물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시며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인간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시며(벧후 3:9) 또한 친히 그 깅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벧전 3:18). 그래서 아덴 사람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심판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처의 사람들에게 다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이유는 바로 본문의 말씀처럼 ‘정해진 심판의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에게나 다른 이방인들에게나 세상 끝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전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오셔서 반드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요 5:22-30; 9:39; 계20:4). 비록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사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의 날에도 정한 기간이 있으므로 때가 차면 결국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부활입니다. 주님의 부활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자신도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되는 영생이 보장되는 줄로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왜냐하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25:31-46).
주님은 하나님 자신이요(요 10:30), 하나님의 아들이시며(막 1:11),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마 27:38, 50), 부활하시어(마 28:6) 대속 사역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셨으므로(요 3:16), 이제 인간들은 더 이상 구원의 방도가 없다고, 또 모른다고 핑계할 수 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말씀을 듣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에 다시 듣겠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덴 사람들의 모습을 본 바울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주님께서도 열 두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복음을 전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마을에서 속히 떠나고 떠날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14; 막 6:11; 눅 9:5). 꼭 그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죄악이 관영한 곳이라도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분명히 있기 마련입니다. 아덴에서도 몇 사람이 바울과 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들과 같은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로 죽었던 영혼이 주님의 보혈과 만날 때에 소생하는 역사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악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 속에서 수많은 방황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부활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힘을 받으시고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심의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핍박으로부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모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승리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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