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엠마오의 두 제자 누가복음 24:13-35
뉴스에는 정말 가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보도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입관을 하고 관 뚜껑을 닫았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든지, 매장을 하려고 하는데 관을 치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깜짝 놀란 확인을 해보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는 경우입니다. 이때에 가족은 물론 문상객들도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은 사실은 죽지 않았던 경우입니다. 병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혼절한 것을 죽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또 깊은 잠에 들었다 깨어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것일까요?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잡히시던 밤에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잡히신 후에는 제사장의 집과 빌라도의 법정을 오가시면서 모진 고난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간악한 유대 병정과 흉악한 로마 병정들은 예수님께 온갖 폭력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의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굶주리고, 매를 맞은 상황에서 무슨 힘이 있으셨을까요?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매를 맺고 또 맞고, 결국 길옆에서 바로보고 있던 구레네인 시몬을 잡아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두 발을 교차하여 큰 한 개의 못을 박고, 양 팔을 벌려서 두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굶주리시고 고통 중에 신음하는 주님께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을 때에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이는 시편 69:21을 보면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신포도주는 로마 병저들이 마시던 값싼 술이었는데, 이 술은 십자가 처형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처형을 당하는 죄수들의 고통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배려로 가끔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주님께서 못 박히시던 날은 ‘예비일’ 이라고 하였습니다. 금요일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가 지나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특히 주검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청하여 ‘다리를 꺾어서 치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군병들은 십자가에 가서 확인을 해 보니, 주님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양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아직 살아 있는지라 다리를 꺾어서 죽였다고 하였습니다.(요 19:33) 한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던 주님께서 운명하시자, 로마 군병들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서 확인을 하였습니다. 이는 기절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청원하여 주님의 시신을 장사하게 내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며 상당한 부자였던 그는 자신의 예비한 무덤에 주님을 장사지냈습니다.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약 백 근 쯤 가지고 와서 주님의 몸에 바르고, 세마포로 쌌습니다.
곧 악실일과 더불어 유월절기가 시작될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서둘러 짧은 시간 안에 주님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주님께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으므로, 해가지는 6시가 되면 안식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 27:61을 참고하면 이때에 아미마대 요셉, 니고데모, 막달라 마리아,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후에 다시 와서 정식으로 장례를 지내기 위해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고 누가복음 23:56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새벽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 무덤에 와 보니, 무덤을 막은 돌은 옮겨졌고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어떤 사람이 주님을 옮겨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와서 확인을 해 보니 세마포는 놓였는데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다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주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들에게 마리아가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가를 물어 본 후에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그곳에 주님께서 서 계셨으나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을 하고 주님인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옮겨 갔으면 알려주면 가져간다고 합니다. 이 때 주님께서 마리아를 부르고, 그제야 마리아는 주님이신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마리아는 즉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마리아이며, 제자들이라고 할 때에 과연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였기 때문에 혹시 군병들이 와서 잡아갈까 두려워 문까지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두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불신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온전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으며, 슬픔과 공포를 떨쳐 버리고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목격한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가까이 동행을 하셨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글로바가 오히려 반문을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였으며,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무덤에 갔었지만 주님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천사를 보았다는 것과, 제자들 중에도 무덤에 갔으나 역시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였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때에 주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앞에 ‘오’라는 감탄사가 붙어있습니다. “깊게 생각하지 못하여 선지자들이 언급하고 예언한 모든 것을 더디게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자신에 관한 구약에 언급된 내용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한 그대로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을 주님께서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유대인들은 복음을 손위 쥐고도 그것의 의미조차도 몰았던 불쌍한 인생들인 것입니다.
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런 고난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제자들이, 이 두 사람이 그 이사야 선자의 고난의 예언만이라도 이해했었더라면 올바른 메시아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꾸중은 듣지 않았을 것이며, 주님의 죽음을 그렇게 비통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은 영광에 들어가기 위한 필연적 관정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도 주님의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모세 오경을 비롯한 모든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가운데 두 제자가 목적한 장소에 가까이 다다랐지만 주님께서는 더 가시려는 것 같이 행보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두 제자는 강권하여 예수님을 유하게 하시고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에 비로소 그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이신 줄을 깨달았으나 주님께서는 이미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이 두 제자는 주님께서 길에서 성경을 가르쳐주실 때에 이미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주님이신 줄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축사와 떡을 떼실 때에 깨달은 저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예루살렘에 있던 시몬 베드로도 주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흥분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합세하여 주님을 만났다고 하니 제자들은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성경 말씀을 보면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어떤 생각이 들어야 할까요?
1. 성경 말씀을 바로 읽고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6:23과 마가복음 8:33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쳤을 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실수는 성경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말씀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성경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오히려 사단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말씀을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도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회당에서 말씀을 배우면서 자라납니다. 그래도 일반 백성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탄생하심도 알지 못했고, 메시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사단의 종노릇을 했으며, 제자들 역시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 누구일까요? 바로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는 가짜 성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짜 기독교인들은 곧 사단의 도구입니다. 그들이 바로 이단을 만들어 내어 성도를 미혹하고 지옥으로 이끌어 갑니다. 저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불신자들은 또 한 번 기독교에 대하여 회를 가지고 다른 종교를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면죄부만 사면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단의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성도에게 마귀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빼앗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 딴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 생각, 근심, 걱정으로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만듭니다. 예배 끝나고 어디에 갈 생각으로 골똘해 있습니다. 졸음으로 말씀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마태복음 13장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길에 뿌리우고, 돌밭에 뿌리우고,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2. 십자가의 고난은 모든 성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17을 보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심도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였듯이,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도 역시 영광을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받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가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 고난은 주님을 증거 할 때에 받는 고난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주님의 일을 하려고 노력할 때에 반드시 사단의 방해가 있고 박해가 있고, 사람들이 주는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들을 이겨내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고난이 아니라, 세상적인 고난, 육신적인 고난을 당하면서도 성도이기 때문에 받는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지 결코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 2:3)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위하여, 내가 고난을 받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사랑할 때에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든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부활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무덤이 열리며 죽은 자들이 살아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52,53을 보면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했습니다(고전 15:20). 이것은 곧 우리 믿는 성도들이 부활하며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고전 15:22).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너무나 기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깨뜨린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 가져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입니다. 이 말씀을 언제 하셨습니까? 부활하신 후에 하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기 전에 이 말씀을 하셨는데, 죽으신 후 살아나지 못했다면 이 말씀은 매우 공허한 것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떨어질 때에 우리는 중생했습니다. 이것이 죽었던 심령이 다시 살아난 것이므로 부활한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그 약속은 우리의 마음에 좌정하심으로 이미 지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 내 일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며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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