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애매한 고난과 죄의 고난

chukang 2010. 4. 25.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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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고난과 죄의 고난 베드로전서 2:11-25

성도의 성화 즉 성도가 되어서 그 성품이나 생활의 모습이 점점 더 거룩하게 변하여 가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갓난아이를 비유로 들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동시에 거듭나게 된 성도 개개인은 갓난아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령한 젖을 먹고 성장하면서 점차 과거의 죄악 된 행위를 버리게 되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 중에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에 있는 ‘버리라’, ‘사모하라’는 두 단어가 명령형으로 주어졌습니다. 영적으로 갓난아이의 상태에 있는 성도가 성화를 위하여 소극적으로 버려야 할 것과 적극적으로 받아먹어야 할 것에 대하여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버릴 것은 “모든 악독, 모든 궤휼, 외식, 시기 모든 비방하는 말”입니다. 악독은 ‘남을 해치려는 심사’를 말하며, 궤휼은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타인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며, 비방은 ’악의에 찬 중상모략‘을 의미합니다. 이런 것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버린다는 말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버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성경에서는 주로 ’죄를 버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죄 씻음을 상징하는 세례 의식을 행할 때에 옷을 벗고 물 속에 잠기는 침례의 관습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할 다섯 가지는 어느 시대에도 공통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사모할 것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입니다. 거듭난 자를 갓난아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거듭난 자는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이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입니다. 갓난아이들은 단순히 젖을 원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본능적인 충동에 이끌려 젖을 찾습니다. ‘사모하다’라는 강한 어감의 동사를 사용하여 갈망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성도들은 오직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과 신령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영양이 풍부한 좋은 젖은 공급 받은 아기의 육체는 날마다 건강하게 자라가듯이, 거듭난 성도들도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공급 받을 때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마지막 때에 나타내시기로 예비하신 영광과 복된 자리에 이르기까지 자라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젖은 먹으면서 자라나지만,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베드로는 3가지로 나누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11,12절에서는 사회생활 자세에 대한 원론적인 교훈, 13-17절에서는 국가 위정자에 대한 자세를, 18-25절에서는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도의 사회 생활에 대한 일반적 교훈

1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사랑하는 자 곧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와 행인 같은’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는 이국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이나 낯선 땅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행인은 외국 땅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만 체류하는 방문객을 의미합니다. 두 단어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베드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같습니다. 즉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빌 3:20), 이 땅에서는 나그네들이며 영원한 시민권이 없는 행인이라는 것입니다(히 11:13).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전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현실 도피적인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자라는 사실이 성도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 힘들게 할지라도 일상생활을 힘 있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육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몸으로서가 아닌 인간 본성이 존재하는 영역을 말하는데, ‘정욕’이라는 말과 합해지면 인간의 전체적인 본능과 죄의 자리 그리고 죄의 매개체를 의미하게 됩니다. 따라서 육체의 정욕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욕구들을 말합니다. 이것들을 갈라디아서 5:16-21에서는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고 하나님을 거스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영혼의 거룩함을 파괴시키는데 앞장서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정욕이 의미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서의 사단의 영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절제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적극적인 절제를 통하여 육체의 정욕이 발 붙일 틈을 주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은 12절에 보면 ‘행실을 선하게 가져“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16절을 보면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행실은 ’망령된 것”(벧전 1:18)입니다. 성도의 삶은 선해야 합니다. 겉모양도 선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안의 성격조차도 옳고 정의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시대에는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악행을 한다고 비방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미신이라는 오해를 받았는데, 로마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평판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추행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추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도들이 애매한 오해와 비난을 받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쨌든 성도의 사회생활 중 대인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극적으로는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는 것과, 적극적으로는 선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대부분의 불화가 개개인의 정욕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에, 성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세상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 외에 선을 행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을 볼 때에, 선을 행하는 삶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핍박을 받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국가 위정자에 대한 자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회생활 영위를 위하여 여러 사회 제도들을 허락하셨으므로, 이러한 사회 제도들에 대하여 순순히 따를 때에 모든 인간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의 틀이라는 개념에서 ‘국가의 위정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국가 제도는 상선징벌(賞善懲罰)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회제도이므로 성도는 선행을 요구하는 위정자에 대해서는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국가나 위정자의 권세 때문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복종이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순복하듯 능동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무조건 국가에 대해서 복종해야 할까요? 만일 위정자들의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권세도 역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이며(롬 13:1-3), 국가의 명령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에만 순종할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국가에 복종하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15절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도들이 신앙을 핑계 삼아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방인들의 비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비록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듯 그 자유를 절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6,17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사회생활을 올바로 영위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사회 제도를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국가로 하여금 상선징벌(賞善懲罰)을 통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사회는 극도의 무질서의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국가 제도를 주시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평안히 할 수 있었으며, 주님의 지상명령인(the Great Commission)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국가에 대한 순종은 직접적으로는 평안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궁극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3. 주인에 대한 종의로서의 자세

베드로는 먼저 가정 내에서의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데, 가정 속에서의 주인에 대한 종의 자세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 종의 신분을 가진 성도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당시 상당수가 종의 신분으로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해서 보면 회사에서 고용주에 대한 피고용인의 자세에 대한 교훈도 될 수가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해야 하고 순종의 대상도 선한 주인만이 아닌 까다로운 주인까지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주인과의 관계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인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19,20절). 그러나 이러한 권면은 일방적으로 상전의 입장에서 상전들의 횡포를 옹호하며 하인들게만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노예 제도가 사회의 제도로 인정되고 잇는 당시 사회에서 노예 신분을 가진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최선의 것은 주인에게 항의하고 당시 사회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노예 생활 중의 고난을 성도 자신의 믿음을 연단하는 계기로 삼음으로써 성숙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바로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르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21절). 그리고 주님께서도 죄가 전혀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의 고난까지 받으셨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의 구속을 위한 것이거니와 또 달리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본받아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인내함으로써 신앙이 성숙되어 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1-25절).

 

이러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우리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은 첫째, 피고용인의 입장에 있는 성도들은 고용인에 대하여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첨하거나 비굴하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용인의 요구에 대해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원만한 인간관계와를 가지고, 이런 성도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회생활 중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순간적인 이익을 위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억울함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인내함으로써 그러한 고난을 자신의 신앙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쩌면 불신자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이러한 억울한 핍박까지도 인내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말씀 가운데 특별히 19절과 20절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물론 이 말씀은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도와 세상이라고 하는 관계로 해석을 해 보아도 큰 교훈이 될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많은 애매한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이 됩니다.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이며,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을 가지기 보다는 남이 자신에게 해준 것만큼만 혹은 그보다 적게 되돌려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은 좀 더 많이 받고 상대에게는 조금만 주길 원하며, 해가 되는 일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보태서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믿음과 사랑으로, 형제 된 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대하라고 교훈하시지 않으셨습니까?(마 5:1-7:29). 사람의 생각으로는 고난을 받을 대에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결코 쉽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바 되셨지만 이를 스스로 감당하시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도 불의한 자에 대해 친히 보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0절에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19절과는 반대로 죄가 있어서 그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대 그것 역시 참기 힘든 것이지만 그러나 참는다고 그것이 칭찬을 받을만한 것이 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고난은 부끄러운 일임을 서로 대조시키면서, 우리 성도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유한한 나그네 길의 인생입니다. 인생 나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지나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90:10)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들과 이 땅 위에서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여 이 땅에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육체의 정욕이라고 하는 무섭고도 강력한 힘에 의하여 이끌려 갈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악한 영의 역사를 깨닫고 물리칠 수 있을까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방법은 내게 지금 다가오고 있는 생각이나 일들이 ‘성령의 역사’인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은밀한 사전 작업을 하기 때문에 알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녕 성도로서 말씀을 의지하고 있다면, 말씀에 나의 생각과 행동을 비추어 본다면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이때에 주의할 점은 스스로 합리화를 시키거나 면죄부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지만, 잘못된 사랑은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그런 모습은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 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마귀가 역사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면, 그 아픔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참고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성도로 바로서기 위하여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 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주위로부터 오는 애매한 고난과 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통까지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겨내고 참아내고 제거하는 노력이 아름다운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나날들 동안에 믿음으로 소망으로 사랑으로 채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나그네의 인생길이라면 결코 헛되지 않고 복되고 아름다운 저 천국에 도달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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