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택 마태복음 7:13,14
우리 인생의 삶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놀 것인가? 내가 어떤 공부를 할 것인가? 취직을 할 것인가 아니면 공부를 더할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아니면 혼자 살 것인가? 부모와 살 것인가 독립해서 살 것인가? 오늘 밖에 나가면 버스를 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전철을 타고 갈 것인가? 외출 할 때에 어떤 옷을 입고 나갈 것인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재미있는 것들이 많은데 어느 것을 볼 것인가? 물건을 살 때에도 자기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서 삽니다. 모든 것이 선택입니다. 다만 우리가 태어나는 것과 죽는 날은 선택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언제 어느 나라에서 내가 어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야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 날도 선택해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야 태어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셔야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든 모든 것이 선택이라면, 어떻게 선택을 해야 성공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선택을 할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자기 나름대로는 많이 생각도 해보고, 이것저것 참고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즉흥적으로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소한 한 두 번은 생각해 보지 않고는 결정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더 많은 생각과 자료를 검토하게 될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방향을 잡아서 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선택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부모님의 바람도 참고가 될 수 있고,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학교 선생님을 통하여, 많은 지식과 경험들과 조언을 종합하여 점점 자신의 앞날을 위한 구체적인 선택을 확정짓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수많은 참고 사항과 고민 속에서 선택을 하였지만, 과연 그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도무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답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하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에서 먼저 신앙적 교훈을 살펴본 후에, 확장하여 우리 삶의 선택과 연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앙적인 가르침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성도의 삶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 성도가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0:7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양이므로 주님의 문으로 들어가야만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좁은 길을 통하여, 좁은 문으로 나아갈 때에, 그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처음에는 어려우나 나중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좁고 협착한 삶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 삶을 살기로 작정하게 되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고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세상 끝 날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따라 교회가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전도지를 보면 보통 첫째는 행복하게 살게 된다, 둘째는 풍성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첫 번째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였습니다. 세상이 물질주의로 변함에 따라서 전도하는 것도 물질주의로 변화가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지금도 구원 받아야 할 죄인에게 ‘구원의 길’에 대하여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성도들도 전도를 받는 사람도 다 그런 문구에 대하여 싫어합니다. 성도의 입장에서는 불신자들이 반발하기 때문에 그렇고,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불신자는 기분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에게 전도를 해서 교회에 출석을 시켰는데, 교회에 출석을 해도 기쁜 일이 없고, 잘 되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미처 깨닫기도 전에 교회와 주님께 대한 불신만 더 키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2:51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주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부터 시작을 하여, 가족의 반대로 인한 불화가 시작이 됩니다. 교회에 나가니까 되던 일도 안 된다고 하는 원망의 화살도 날아옵니다.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쉽게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직 주님께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좁은 문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넓은 문은 들어가기가 쉬우나 그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누가복음 13:24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힘쓰라‘는 것은 경기에서 이기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무기를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전투에서 살육당하는 자와 같이 영원히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요, 승리하는 군인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2. 인생의 선택
가.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우리 앞에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어떤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마 저 같아도 쉬운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그 길이 협착합니다. 협착하다는 말의 원래의 뜻은, 괴롭히다, 깨트리다, 좌절시킨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말은 사도나 교회가 받는 고통을 가리키며, 골로새서 1:24에서 이것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특별한 노력과 죄악 된 자신을 깨트리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우선 평안합니다. 주의 사람들과 마찰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평안은 위장된 평화요, 불안한 평안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주의 사람들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인생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를 잘 새겨보아야 합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도 어떤 사람은 윗사람의 비유를 잘 맞추며 아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인 관계를 잘해서 쉽게 쉽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것도 경쟁력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코 오래 갈 수 있는 경쟁력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눈만 뜨면 뉴스를 접하게 되는데, 권력과 손을 잡고 뇌물을 주고 향응을 베풀면서 사업을 한 사람들은 반드시 망하고,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법의 처분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을 잡고 뇌물을 받은 사람도 결국에는 탄로가 나서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고 노력해서 얻은 좋은 자리를 빼앗기고 범죄자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우직하게 일을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출세도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완수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는 못할지라도 정년을 채우고 퇴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에게 화려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뛰어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평가는 ‘잘했다.’ 이 한마디를 들을 줄로 믿습니다.
특히 성도라면 우리 앞에 편한 방법과 어려운 방법이 있는데, 편한 방법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길은 절대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다 알 것입니다. 영어 단어 한 단어 한 단어 외우고, 한 문장 한 문장 외우고, 문법도 하나씩 하나씩 익히는 가운데 좋은 성적도 나오고 회화도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수학도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4칙이 기본이 되어 공식을 배우고, 연습해야 시험문제를 잘 풀 수 있습니다. 어느 과목이든지 외울 것 외우고, 이해할 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절대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배우고 익히는 것이 없이는 절대로 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지 그 길을 갈 때에 한 걸음 씩 한 걸음씩 걸어 나가야 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면서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어떤 때는 고루하게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숨에 뛰어넘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갓난아이가 돌이 가까워지면 일어서서 걷기를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잘 걸을 수 없습니다. 일어서다가 넘어지고, 붙잡고 일어서다가 스스로 일어서고, 걷다가 넘어지고, 또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걷습니다. 그 다음에 조금씩 빨리 걷고, 뛰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이렇게 주어진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과정이 귀찮고 힘들다고 쉬운 길을 택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이렇게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6:24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서 지고 따라오라고 주신 그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힘들고 귀찮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마 10:38)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반드시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내게 힘들고, 내가 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내가 지고 가겠다고 하는 결단을 하는 즉시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함께 져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여 편한 길을 찾지 않고, 말씀에 근거하여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을 갈지라도 주님께서 안내자가 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힘들고 지칠 때에 손 내밀어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넓은 길보다 더욱 안전하게 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 욕심을 부리지 말라.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화에 보면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뼈를 발견하고 기뻐서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서 먹으려고 가는 중에,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우연히 물을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 속에는 다른 개 한 마리가 뼈를 물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개는 그 뼈가 욕심이 나서 ‘멍멍’하고 짖었습니다. 그 순간 물고 있던 뼈는 물속으로 빠지게 되고 자신의 몫을 잃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특히 세상적인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물론 주신 몫을 챙기지 못하는 것은 불성실과 불충이 되지만, 성실하게 내 갈 길을 가게 되면 그 몫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영적인 몫은 무엇일까요? 집사, 권사, 장로, 전도사, 목사라고 하는 직분으로 나타나는 몫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기도의 분량도 영적인 몫에 해당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도 영적인 몫입니다. 물질적인 몫도 있습니다. 같은 장로라고 해도 어떤 장로는 힘과 기술로 봉사하는 장로가 있고, 물질로 봉사하는 장로도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남이 잘 될 때에 시기하는 것이 교회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여 안수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데, 어떤 성도는 남 보기에도 별로 하는 것도 없이 직분을 받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정말 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도 잘 섬겨서 물질의 복을 받았는데, 어떤 성도는 자기는 왜 이렇게 못 받느냐고 불평하고 남을 시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성실하게 지고, 힘들어도 좁은 문으로 협착한 길로 가는 성도는 결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과 성실함으로 그 길을 갈 뿐입니다. 그런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기의 몫을 반드시 받게 될 줄로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라.
원망과 불평은 불신앙이요, 육신의 소욕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9:62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이 들고 어려울 때에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인내하는 것은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힘이 들고 어려우면 남이 하는 일이 쉬워 보입니다. 남이 하는 세상적인 말이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성도의 귀에 속삭이고 쟁기를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어떤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 혼자만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간다는 생각이 들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쉬운 방법 보다 어려운 방법을 택하는 것으로 느껴지면 또한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모진 광야의 길을 걸어올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12명 중 10명의 정탐꾼들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게 되자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 이상 좁고 협착한 길을 가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쟁기를 놓아 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힘들고 어렵게 살기보다는 편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 좋은 가나안이 눈앞에 있었는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물론이요 교회 내에도 좁은 문을 택하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며 넓은 문을 향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좁은 문을 통과한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을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니고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이미 들어선 이 길이 후회가 됩니까? 쉽게 가고 싶습니까? 아니면 쉬어 가고 싶습니까?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이스라엘을 광야 길로 38년을 더 돌게 하신 것처럼,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을 더 겪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길은 내가 미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나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기억하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힘들게 보이지만, 어렵게 느껴지지만,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요, 주님의 손잡고 가는 길입니다. 이 보다 더 좋은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보다는 저차원적이지만 내 자신을 위하여, 오직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며 나를 부정하며 좁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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