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여호와의 종의 노래2

chukang 2010. 3. 2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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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의 노래(2) 이사야 53:1-12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아의 수난과 대속에 대해 본격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먼저 1-3절에서는 고난 받는 종 곧 메시아의 초라한 모습과 사람들의 멸시에 대해서, 4-6절에서는 메시아의 수난의 목적이 우리 죄인들의 대속을 위한 것임을, 7-9절에서는 메시아가 대속 사역의 완성을 위해 죄가 없으심에도 묵묵히 모든 고난을 다 맡으심을, 10-1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신 메시아를 존귀하게 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전체적으로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아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대할 때에 우리는 자칫 메시아 수난의 참상만을 생각하면서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기 쉬울 수가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도 은혜를 받은 성도요, 믿음이 있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오묘한 구속의 손길을 우렁찬 음성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본 장의 서두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라고 하는 말씀은 단지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불신앙을 책망하거나 탄식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전 인류의 구속주로 오실 메시아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연약하고 볼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나, 그것이 바로 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구속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기적 중의 기적인 메시아의 대속 방법을 생각할 때에, 그 분만이 우리의 구주라는 것은 그 어떤 논리를 통해서보다 더 강하게 확신하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여호와의 뜻을 이루며 승리를 얻는 비결은 창과 칼로 하는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메시아께서 그의 수난의 삶을 통하여 보여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뿐임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포함한 구속 받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신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 12:37,38“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롬 10: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우리의 전한 것’이라는 말은 이사야에 의해 전달된 메시아적 예언입니다. ‘여호와의 팔’은 여호와의 권능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에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들에게 특별하게 개입할 때에 사용이 됩니다.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그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마치 ‘연한 순’과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연한 순은 ‘어린 나무와 같고’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잘라져서 밑동만 남아있는 나무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새 싹이 움터나는 것과 같이 아무런 힘이나 영향력도 없는 멸망된 다윗 왕조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메시아가 탄생하실 시대의 환경이 인간성이 상실되고 매우 부패한 시대가 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메시아의 출생과 성장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임사하고 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한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외적인 모습이 인간들이 모기에 별로 흠모할 만한 매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재력이나 정치력과 같은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려함을 자랑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섬기시기 위해 고난을 받는 종으로 오셨기 때문에(막 10:45), 수려한 외모를 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철저한 자기 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의 삶이 고난의 연속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멸시를 받아서’ 매우 천대 받는 삶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멸시하는 것은 복음을 듣는 것에 대한 무관심과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날 밤에 받으신 고난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마 25:67; 26:29-31; 막 14:65;15:18,19).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간고는 슬픔(sorrow)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생애의 특징 중 하나가 끊임없는 슬픔의 연속이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슬픔은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멸망에 이르게 된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고를 아는 자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본성적으로 병든 육체를 가져서 질병을 앓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육체적인 고통을 인간들과 똑같이 느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문둥병자와 같은(레 13:45,46) 취급을 받아 철저한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만왕의 왕이요, 만민의 구속자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외면을 받으셨으며 끝내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다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의 의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의 고난은 ‘대속’입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하여 당하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대속적 고난은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 20:28; 요 11:50-52; 롬 3:25; 5:6-8; 8:3; 고후 5:18-21; 8:9; 갈3:13; 엡1:7; 벧전2:24). 주님께서 당하신 ‘간고’는 곧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인간의 내적, 외적 아픔과 고통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인간 내면과 외면의 모든 고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부분과 육적인 부분 모두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치유하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주님의 대속적인 고난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나 지금이나 ’인과응보‘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는 주님을 모욕하였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에도 그를 경멸하였던 것입니다(마 27:39-44).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 큰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본 절에서는 주님의 고난을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찔림” 이는 그리스도께서 가시 면류관과 못과 창 등으로 찔리신 것입니다. “허물”은 우리 인간들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한 인간의 본성과 죄악의 근원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상함” 주님의 상함은 일반적인 질병이나 다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고통은 뼈가 부서지는 것과 같은 처참한 것입니다. “징계” 주님께서 대속적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올 복으로써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서의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대신 징계를 받으심으로써 원수가 되었던 관계가 평화의 관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엡 2:11-18)

그러므로 성도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 평화를 주는 것은 그 어떤 물질이나 이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골 1:20). ‘채찍에 맞음’ 주님께서 대속적 고난을 당하심으로 받을 두 번째 복입니다. 죽음의 병에서 놓임을 받아 영적 강건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인간들의 죄악 된 속성을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 배회하기를 좋아하는 양의 속성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죄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자기 본능대로 행하는 존재입니다(민 27:17; 왕상 22:17; 대하 18:16).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즉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기 보다는 자기가 가고 싶은 본능대로 가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며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롬 1:24).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그의 뜻을 물어보아야 하며, 또 인간은 죄악 된 존재여서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아무런 공로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그 죄에 따라 그대로 보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그들의 죄의 대가를 모두 넘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자랑도 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만 할 것입니다(고전 1:29-31).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이는 주님께서 잡히신 후에 육체적 고문을 당하시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때를 말하며, 그 감당할 수 없는 모진 고통 중에서도, 까닭 없는 모욕과 조롱에 대해서도 주님은 불평하거나 변론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종의 침묵은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의 적극적인 변론의 자세와 매우 대조가 됩니다. 주님은 이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당할 고난의 뜻을 완전히 알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0:15-18).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이는 아무런 불평 없이 순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양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입니다(요 1:29).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곤욕과 심문을 당하였다는 것은 강제적인 압박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고난이 심각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산 자의 땅은 이 세상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주님은 남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궤사, 거짓말이나 속임수나 악한 말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오직 인간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주님을 악인으로 취급하여 강고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또한 그들과 함께 매장하려 했던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계획은 아리마대 요셉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예언의 말씀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마 27:57-60). 그러나 이는 주님의 승귀나 좋은 무덤에 묻힌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 묻히는 순간까지 지속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주님이 묻힌 무자의 무덤조차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은 속건 제물로~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며, 주님은 그대로 순종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요 5:19,30)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여기에서는 주님을 ‘속건 제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5,6절은 주님의 ‘속죄 제물’이 되심을 설명한 것입니다. 두 가지의 제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의 대속적 죽음의 성격이 이 두 제사의 성경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는 속죄의 성격이 강하며, 속건제는 속죄보다는 배상의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속죄와 관련하여서는 용서라는 의미를, 속건과 관련해서는 만족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속죄로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고, 주님께서 인간들이 배상해야 할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드림에 만족해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씨를 보게 되며’ 메시아의 대속적 죽음의 결과가 ‘그 씨’입니다. 주님의 대속적 죽음의 열매인 그의 영적 후손, 곧 구원 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 날은 길 것이요’ 이는 예수님께서 가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영생에 들어갈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의 손’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권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의 사역과 권능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여기에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고난의 종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충분한 결과를 주셨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만족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고난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모두 구원하게 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자기 지식은 주님께서 알고 계신 구원 사역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는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실천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죄악 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력을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주님께서 얻게 될 영광을 세상 정복자의 영광의 모습에 비유한 것으로, 세상의 정복자가 그 전리품을 그의 신하들과 나누어 가지듯 주님께서도 그의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신 후 그의 대속적 죽음으로 인해 얻은 영광을 취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왕으로서 메시아 왕국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주님의 존귀하게 되심의 근거입니다. 대속적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시키셨으므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빌 2:9).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존귀케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고난을 스스로 감당하셔서 끝내 비참한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존귀케 하신 것입니다.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주님은 범죄자의 취급을 받아 돌아가셨으나, 사실은 그의 죽음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를 짊어진 대속의 죽이었으며(히 8:28), 그 죄인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눅 23:34).

이 예언은 문법적으로 보면 미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범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주님께서 부활 후에도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부좌 우편에서 범죄자들을 위해 계속 중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롬 8:4; 히 7:25)

 

이처럼 주님께서는 이천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할 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주님의 크신 희생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큰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더욱 더 주님 앞에 나오기를 힘쓰며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다음 주 부활 주일에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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