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종의 노래 이사야 42:1-9
이사야 서에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노래가 네 군데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중에 첫 번째로 두 번째(49:1-7)와 함께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종으로 임명을 받은 영광과 주님께서 세울 메시아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노래는 50:4-9이며, 네 번째 노래는 52:13-53:12까지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주님께서 여호와의 종으로서 우리들의 구속을 위하여 당하실 고난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앞에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언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본장에서는 단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초월한 영적인 공동체 즉 영적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4에는 종으로 오시는 메시아의 품성, 5-8에는 메시아의 사역, 9절에는 본 예언의 필연적 성취의 선언입니다.
1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성도를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전 인류의 참된 구원자인 메시아를 뜻합니다. 그 분은 남유다처럼 불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온전히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의 구원을 성취하실 종입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 이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마태복음 3:17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뻐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만족함으로 흠향하실 때에 쓰이는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함을 받은 목적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희생 제물로 드려지기 위함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은 우발적이거나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된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성령을 예수님께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호와의 지혜입니다.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충만하게 부어지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공생에 시작 직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눅3:22;4:18-21을 보면 역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광경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에 대하여 마태복음 3:17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딛으셨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공의’는 ‘정의’(심판:justice) 또는 ‘진리(truth)'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을 비롯한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심판과 구원의 이중적 요소가 동시에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절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인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가장 값진 것과 좋은 것을 전하지만, 그 분의 태도는 교만하지 않고, 매우 겸손하고 조용합니다. 이런 모습은 자기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또 제사장들과 같지 않습니다.
3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상한’이라는 말은 갈대가 외부의 힘에 의해 꺾여서 거의 반쯤 부러진 매우 연약하고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인 인간들을 그 연약한 상태대로 심판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로 상한 인생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감싸주시며 회복시키시는 분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얼마나 관용하신 분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등불’은 베실로 만든 심지를 말합니다. 이 심지는 문학에서 보통 인간의 생명을 수사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연약한 생명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병든 자나 혹은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시는 말씀으로 인용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하게 영적인 문제로서 주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양심의 빛을 잃고 연약해져 점점 사망의 골짜기로 빠져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연약한 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사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4절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메시아 사역에 있어서 역경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승리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분은 연약한 죄인들에게는 온유한 반면에, 그의 사역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에는 매우 강한 분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열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열심은 곧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섬은 세상 나라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교훈’은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에서는 메시아의 말씀, 즉 복음과 복음이 나타내는 교훈을 말합니다. 메시아의 열심 있는 사역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방 국가들이 복음을 삶의 교훈과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의 품성에 대한 노래입니다.
5절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자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종에게 사명을 주신 분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즉 사명을 받는 여호와의 종에게 권위를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종이 그 사역을 감당할 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신’은 생명 혹은 영혼을 가리킵니다(창 7;22).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6절 “의로 너를 불렀은즉” 그리스도를 세상의 메시아로 부르심이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았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에서 ‘힘’(power)이나 ‘폭력’이 정의인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든 면에서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종’을 그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순종하는 종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그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자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메시아의 이중적인 사역을 의미합니다. 백성의 언약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것이며, 이방의 빛은 이방인들에게 게시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구원이 완성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7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소경은 육적인 소경과 영적인 소경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영적인 소경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는 말씀을 복음으로 치료하실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육적인 소경도 고쳐 주셨습니다(마 11:5; 눅 24:31).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이 또한 영적으로 해석해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완전히 해방시키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8절 “나는 여호와니”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출 3:14의 말씀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자존자이십니다. 자존자라는 것은 전능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스로 계시되,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언제까지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우상과 관련하여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과 구별을 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셔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참 신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영광, 즉 구원 사역을 성취하심으로 받게 될 모든 영광이 오직 여호와께만 돌려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며 완성시키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심이시기 때문이며, 이 사역을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영광을 사람이 가로채서는 안 되며, 헛된 것 우상에게 돌려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며, 여호와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에게 마땅한 영광을 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9절 “전에 예언한 일”은 바벨론을 통한 유다의 멸망을 뜻하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포로 생활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일을 고하노라” 궁극적으로는 메시아를 통한 택한 백성의 구원을 가리키지만, 고레스 왕의 ‘예루살렘 귀환 칙령’으로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스라엘이 재건 되게 됨을 뜻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택한 백성들의 구원은 이미 B.C. 7에 이렇듯 세밀하게 주어졌습니다.
다음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리고 4월 첫 주일이 부활주일입니다. 나와 여러분 택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의 구원을 위하여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사 온갖 고초를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가에 대해서는 네 번째 노래 중에서 53:1-9에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1-6)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눈물을 흘리는 감상주의의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 직접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구속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이나, 그것이 바로 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화평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방법입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믿을 수 없는 이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구속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의 죄의 문제 해결이 핵심이지만, 그 속에는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들어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은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신 주님께서 다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도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도 힘들고 어려운 삶에서 해방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절망 속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새로운 소망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해방과 새로운 소망을 위하여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내 뜻 혹은 세상의 뜻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과 말씀을 좇아 행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좇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좇아 살아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내 뜻 보다는 내 욕심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말씀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33,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 주시지 않으시나요? 온전히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와 우리가 생각하는 때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사람의 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교회에 나가도 별 볼일 없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더니. 이런 식으로 핍박을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낙심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을 조롱하는 말이나 훼방하는 말은 서슴지 않고 합니다. 우리가 진리대로 살고자 하면 훼방을 받고 비방을 받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19에서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고립되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적당히 세상에 묻혀 그 속에서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또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진정 의로운 길이라고 확신한다면 세상의 핍박이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확고한 믿음으로 성도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여호와의 종 우리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 응답이 늦다고 불평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인 섭리와 경륜에 따른 가장 적절한 시기에 늦지 않도록 반드시 응답을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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