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몸이 되어 로마서 12:3-13
지난 금요일에 중계 된 김연아 선수의 경기 모습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다 보았다고 합니다. 최고의 시청률을 올렸다고 하네요. 마침내 김연아(20·고려대) 선수는 꿈에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김연아의 이날 대회 최종 점수는 228.56점. 세계신기록입니다. 피겨 팬들과 외신은 그녀에게 어떠한 찬사와 수식어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말 금메달 따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정말 장한 일을 해 냈습니다. 그렇지만 김연아 혼자서만 잘한다고 하면 절대로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세계 선수권이나, 그랑프리 대회나 그 어떤 대회에서도 금메달은 차지하고서라도 입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김연아의 뒤에는 그녀를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하는 한 팀이 있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땄기에 최상의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브라이언 오서(48), 데이비드 윌슨(44), 트레이시 윌슨(49)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힘든 연습마저 즐겁게 만드는 매력 만점의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제프리 버틀, 사샤 코헨 등 정상급 피겨 스타들의 안무를 맡아 명성을 떨친 최고의 안무가로 손꼽힌다고 합니다. 드림팀의 홍일점이자 김연아의 스케이트 기술 코치를 맡고있는 트레이시 윌슨(48)은 유명 해설가이기도 하고 하네요. 트레이시 윌슨은 1988년 동계올림픽 동메달 리스트로서 올림픽 첫 무대에 서는 김연아에게 '맞춤형 조언'을 해주며 뒷받침했다고 합니다.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은 “연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녀 자신을 밑고 훈련을 마무리하는 것”이라며 "그렇게만 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미 연아는 이미 환상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등 김연아에 대한 높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르침을 이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브라이언 오서 코치가 될 것입니다. 이 외에도 그녀의 뒤에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뒤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게을리 하면 혼을 내며 벌로 100바퀴를 돌게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김연아 선수는 그 벌을 꼭 채웠다고 하네요. 그리고 아버지는 집안일을 전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늘 거명한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연아의 금메달 프로젝트라고 하는 톱니바퀴의 한 부분들입니다. 전체 톱니바퀴의 한 부분만 깨어져 나가도 돌아가는 것은 멈추고 말 것입니다. 설사 돌아간다고 해도 균형은 맞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 김연아 선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녀가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것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것과, 또한 그녀의 금메달을 위하여 뒷받침해준 사람들 이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갔으며, 그 결과 좋은 결실을 맺은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각자 그 믿음의 분량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있다는 사실과, 그 은사대로 모든 성도들이 서로 지체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충실하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다른 지체를 섬기는 마음으로 예언하고, 가르치며, 권면과 위로를 베풀고 성실과 즐거움으로 구제하며, 부지런함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부여하신 것은 그들 각자를 높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서로 협력하여 연약한 부분을 보완함으로 성도를 온전케 하고 그리스도를 높인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12절을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이라는 말씀을 제일 먼저 주목해서 읽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 성도들에게 획일적이지 않고 인격적으로, 그리고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까? 모든 성도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너는 믿음이 부족하니까 은사를 주지 않았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하면 그 누구이든지 반드시 은사를 받았다는 선물로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은사를 나누어 주셨을까요?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데 정해진 성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또 묻습니다. 교회의 일을 하지 못할 성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역시 없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모든 성도가 다 교회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바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해야 됩니까?” 이런 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든지 받은 은사가 있고, 그 은사는 제각기 다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각 부분 부분, 요소요소마다 배치가 되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은사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언의 은사(6절)
본래 예언의 은사는 고전 12:28에 의하면 사도의 직분 다음 가는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예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 계시’를 말합니다. 특별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특별한 방법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말씀’이라는 것을 통하여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언자 자신의 직관이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특별한 계시”입니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성령으로부터 받았습니다(행 111:27,28; 21:1).
이 예언은 단순히 미래적인 예고하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고, 위로와, 권면과, 판단과, 교훈의 개념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직분은 교회에서 선포되던 설교와도 연관이 되므로, 교회 내의 직분 중에서는 가장 먼저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섬기는 은사(7절)
섬기는 일은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service)'입니다. 개인적인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즉 음식을 준비하는 일(눅 10:40), 말씀을 전하는 일(행 6:4), 화목케 하는 일(고후 5:18) 등등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회의 직분으로 시행되어 오던 ’집사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집사들은 실제로 사도의 일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일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집사직의 특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직분은 ‘행동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집사라고 하는 직분은 실제적인 행동을 통하여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섬기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설정해 주신 부분에서 실제적으로 섬겨야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 가르치는 은사(7절)
가르치는 자는 고전 14:6에서 “계시-예언”에 상대되는 ‘지식-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직접적인 계시는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기록이 되어진 계시는 늘 존재하므로 그 말씀을 체계적으로 해석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가르치는 자‘가 하였습니다. 이 은사는 말씀의 ’선포‘를 담당한 사도의 직분과는 구분이 되는 초대 교회의 교사들이 주로 감당했던 것으로 이들을 통해서 교회가 형성되고 양육되었습니다(롬 15:4; 딤전 4:16; 딤후 3:16). 이 은사도 역시 다른 은사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은사와 관련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요구가 되는 것은 말씀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이며, 조심해야 할 것은 말씀을 억지로 풀거나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리를 발견하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벧후 1:20,21).
4. 권위하는 은사(8절)
권위한다는 말은 위로한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예언하는 것과는 판이하며, 가르치는 것과는 다소 가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선포된 말씀을 적용하며 복종하도록 장려하고 권고하는 은사입니다. 이러한 직분을 가진 사람은 다른 성도들의 사정을 잘 아고 깊은 사랑으로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5. 구제의 은사(8절)
구제는 섬기는 일과도 연관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개인적인 자선의 의미가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가 재산을 공유하였던 적도 있었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또 이방인 교회들 가운데서는 더군다나 공유재산이라는 것은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구제의 원리는 성실함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구제는 ‘관대하게’(약 1:5)라는 의미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비와 관용의 태도로 자신의 재물이 줄어드는 것에 구애되지 않고 넉넉하고 후하게 주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6. 다스리는 은사(8절)
다스리는 사람은 초대교회의 감독이나 장로 등으로, 교회의 치리와 운영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디모데 전서 1장에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자들의 체제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 ‘복수’ 즉 여러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행 15:2, 4; 16:4; 20:17, 28; 딛 1:5; 히 13:7). 이들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부지런함으로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지도자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주의 교회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이러한 근면함과 도덕적인 긴장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긍휼의 은사(8절)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금전적인 구제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봉사로써 자비를 베푸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교회는 환난을 당하며 곤고한 자리에 있는 자를 직접 찾아가서 돕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기쁨으로 상냥함으로 상처를 받고 고통 중에 있는 성도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이 긍휼의 은사입니다.
이러한 은사들이 공통적으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고 하여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의 다양한 은사들은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전 13장은 소위 ‘사랑장’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은사를 주셨던지,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던지, 또 그 직분과 은사에 맡에 정말 열심히 일을 하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결코 가식이나 편견이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그대로의 순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앞에서 사랑을 강조할 때에는 ‘아가페’였는데, 여기에서 ‘필로스’의 뜻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형제사랑은 ‘필라델피아’입니다. 우애하고는 ‘필로스트로고이’입니다. 형제 사랑은 말 그대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제는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애는 가족, 친족, 종족 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들 간의 사랑 즉 혈육적인 사랑이 강조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하는 것에 답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가족 관계’라는 친밀함을 지니는 구성원들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는 흉허물이 없습니다. 이런 가족의 사랑으로 성도들과의 친밀한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부지런함입니다.
다스리는 자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근면을 제시하였지만, 모든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바로 이 덕목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가졌던 처음 사랑의 열심을 잃어버리고 타성에 젖어 나태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 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일에서도 누구든지 처음에는 열심히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변함이 없는 열심을 가지고 부지런하게 주님을 섬기듯이 교회와 성도를 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그 얼굴빛이 어둡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소망이 있는 사람은 비록 좋은 화장품을 바르지 못해도, 좋은 옷을 입지 못해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하지만, 그 얼굴이나 눈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잠언 3:8의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말씀과도 같습니다.
소망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내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게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되고 마음은 평안을 얻게 되고, 평안한 마음은 얼굴을 밝고 빛나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소망은 또한 모든 어려움을 참을 수 있게 합니다. 따라서 참을 수 있는 것은 즐거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하여(롬 8:18) 생활 가운데 닥쳐오는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는 삶이, 성숙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소망 중 인내하는 방법으로 바울은 힘써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계속적인 기도가 없이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과 인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소망 중에 인내하는 자는 반드시 기도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 구제입니다.
7, 8절에서 ‘섬김과 구제, 긍휼을 베푸는 은사’에 대해서 이미 언급을 했지만, 또 다시 여기에서 모든 성도의 필수적인 덕목으로서 또 다시 구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는 것은 헌금이나, 친교나, 참여 등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들의 물질적 어려움을 살피며 그 어려움에 동참하는 뜻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에는 로마의 압정과 부자들의 수탈로 인하여 노예로 전락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성도가 많았고, 교회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행 4:32-35참고)
여기에서 손대접 하는 것과 연결해서 보면, 단순한 구제 개념이상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성결한 생활을 하던 성도들은, 숙박업소 즉 로마사회의 숙박업소들은 대부분은 좋지 않은 향락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행하는 성도를 자신의 집에 숙박을 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그 가운데 봉사가 시행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바로 나그네의 대접을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주신 은사들과 또 이 은사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사랑과, 근면함과, 소망과, 기쁜 마음의 봉사가 없이는 거룩한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와 성도는 교회 안에서, 주님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한 몸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봉사하기를 친 가족과 같이 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럴 때에 교회가 바로 서고, 성장하고, 성도가 잘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나타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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