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명절 요한복음 7:10-24
오늘은 설날입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입니다. 좋은 날 즐거운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좋은 날이 주일이라서 어떻게 보면 감사하고, 어떻게 보면 좀 불편하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서 더욱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의 입장에서 제사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설날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명절을 어떻게 지내셨는가를 살펴보는 가운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초막절은 무교절과 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입니다. 무교절은 보리 수확과 관련이 되고, 칠칠절은 밀 수확과 관련이 됩니다. 초막절은 말 그대로 초막을 짓고 집을 떠나 광야 생활의 체험을 하는 것이지만, 초막절의 다른 이름인 ‘수장절’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 보면 가을의 추수가 끝난 뒤에 오는 명절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은 7월 1일이 새해의 첫날이 되므로 신년 명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 12세가 지나면 무조건 일 년에 3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번 초막절에는 가족과 함께 올라가지 않고 비밀히 올라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개적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해 보이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에 대한 불신입니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명절 중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형제들이 요구한대로 이적은 행치 아니하시고, 말씀만을 가르치셨다고 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형제들은 왜 예수님께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나타내소서’라고 했을까요?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시면 전도하기에 매우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하여 정말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인정을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잠깐 마태복음 4장으로 가 볼까요? 주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을 때에 사탄이 찾아와서 제일 먼저 시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면서 물리치셨습니다. 이 시험은 단지 먹는 것에 대한 시험은 절대로 아닙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주님께 있어서 너무나 쉬운 일이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시지 않습니까? 왜 그러셨을까요? 돌이 떡이 되는 것은 어떤 현상입니까? “기적”입니다. “이적”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사탄이나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육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그 이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시던 때에도, 당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 등은 동방박사들의 방문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소동만 하였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것도 알고 있었으나, 이방인들이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도 정말 ‘그리스도’께서 나셨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당연히 죽음입니다. 혹 요행으로 살아난다고 해도 전신불구 상태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사가 그 발을 붙들어 줄 것이므로 절대로 다칠 염려가 없다고 시험을 합니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2)”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시험에도 단호히 거절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셨지만 조금도 상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전도하기가 더욱 쉽지 않았을까요? 이 시험도 전적으로 육적인 시험입니다. 나타나는 기적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에서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지상최대의 과제라고 생각을 했고, 앞으로 오실 메시아 즉 ‘그리스도’께서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친히 보좌에 앉으신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으신 것이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으신 것은 이와 같은 세상적인 또 정치적인 목적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그 사명을 감당하셔야만 창세전부터 택하신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시험과 같이 주님의 육신의 형제들의 요구도 또한 세상적이요, 정치적이요, 육신적인 요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 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 먼저 올라가라고 하신 후에 나중에 비밀히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14절을 보면 ‘가르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성경에 관한 말씀입니다. 천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치지는 않더라도 배운 사람, 모두 랍비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즉 말하는 형식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랍비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용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랍비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그 계보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 22:3) 이런 계통이 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는 랍비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글은 성경을 말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랍비로부터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모르는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지도 않았으면서 그 지혜나, 학식에 있어서 그들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당시 평범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게 되면 일반적으로 회당이라는 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쉐마’ 본문(출 13:2-16; 민 15:37-41; 신 6:4-9; 11:13-21)을 암송하는 정도의 교육을 받았을, 일개 목수의 아들이요, 또한 목수 일을 하던 예수님께서 상상할 수도 없는 가르침을 받자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6을 보면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교훈하는 내용의 정통성 내지는 정체성을 의심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는 자신의 교훈의 근원이 어떠한 훌륭한 랍비가 아닌 자신에게 사명을 주셔서 성육신하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스스로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 한 개인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분명하게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곧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뜻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요? 혹시 모르고 있다면 알 수는 있을까요?
성경에는 서로 상반되는 내용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해야 하고, 어떤 때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가장 좋은 판단은 과연 이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면 기뻐하실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으로, 혹은 세상적인 관점이나, 관습대로, 때로는 내 유익이나, 내 출세를 위해서, 권위를 위해서 행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닐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항상 모세와 연관을 시켰습니다(요 9:28; 마 23:2) 그리고 모세의 중재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에 큰 긍지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지키지 않은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율법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신 18:15-22 등등)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 세부적인 사항들을 자꾸 추가하여 규정하면서도 그 근본정신이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3:2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들의 모든 지식의 근거는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근거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는 것입니다(23; 요 5:16).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을 부분적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올무를 씌웠을 뿐 아니라 이를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불의를 지적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그들과 주님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고 공격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이 파괴자라는 것을 19절에서 밝히고 있으며, 현재 문제가 되는 율법의 핫 이슈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일‘ 문제에 대해 해명하는 기회가 부여된 것입니다(21절).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제6계명을 범하려는 짓에 해당합니다(출 20:13). 주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아시고 지적을 하심으로써 율법을 범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도리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하여 상대방을 귀신이 들렸다고, 상대방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에 ‘한 가지 일을 행하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요 5:1-9). 유대인들은 이 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요 5:16-18).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수많은 순례객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던 사건이므로 더욱 더 설명이 필요한 일이며, 이 사건의 핵심은 안식일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해야 하며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22,23절에 보면 모세의 할례에 대하여 설명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주는 할례는 모세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창 17:10, 11) 이 할례는 생후 8일 만에 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창 17:12; 레위기 12:3). 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안식일에도 할례를 주는 것이 불가피하였습니다. 랍비들이 성경으로 인정하고 지키는 것 중에 ‘미쉬나’라는 것이 있는데, 그 미쉬나의 네다림 편 3:11에는 랍비 요세가 말하길 “할례는 엄중한 안식일 규례를 능가하기에 위대하다.” 언급도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할까 지극히 세세한 규정들을 지키면서도 반면 이같이 안식일에 할례 베푸는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중한 것, 즉 한 사람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기 위하여 행한 예수님의 안식일의 치료 행위가 정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언약이나 율법의 진정한 의미는 한 사람의 전인(全人)이 회복되는 일이 의식적 행위로서의 할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을 트집을 잡고 죽일 음모를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질이 아닌 피상적인 것으로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공정한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상 16:7에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판단의 원칙에서 멀어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않은 인간의 교훈 즉 장로의 유전을 율법에 첨가하여 인간을 억압하였습니다(막 7:5-13).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는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학문적 연구나 인생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따르고 복종하여 지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는 모든 영광을 버리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만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와서 이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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