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chukang 2010. 2.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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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11

 

여러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마지막으로 부르짖은 말씀이 생각나시지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부르짖음은 하나님과의 영혼의 단절로 인하여 괴로워하면서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영혼의 외침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택해 주신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왕인 사울과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찢어지는 듯 한 영육간의 고통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 토로하고 있는 시입니다.

비탄과 절규 속에서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시는 그 순간은 하나님에게조차 버림을 받으시는 처절한 심판과 또 연약한 육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극한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의 외침 소리를 오늘 말씀 첫 절에서 듣게 됩니다. 다윗의 이 처절한 외침은 천 년 뒤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난에 대한 생생한 예언이며, 그 예언은 훗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오늘은 먼저 결론부터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큰 환난과 고통은 곧 십자가의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신앙의 대선배인 다윗이 그토록 처절한 고난 중에서 때로는 절규하고 때로는 비관하면서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던 것은, 우리도 역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이 없고, 굽힘이 없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답입니다.

 

전반부 1-21절은 고난에 처한 시인 다윗의 비통한 심정과 그가 처한 고난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절박하게 구원을 호소하는 비탄의 노래입니다. 후반부 22-31절은 전반부의 비통한 분위기에서 급반전되어 시인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선취적 신앙에 따라 구원을 확신하며 이스라엘 온 백성과 더불어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노래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깨닫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그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그의 억울한 고난에 대한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여호와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는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부르짖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 성도는 단지 절망 속에서 좌절로 끝나지 않고 여호와 신앙으로 그 절망을 극복해 나가는 자이며, 그러한 자만이 여호와의 예비하시는 궁극적인 승리의 기쁨을 맞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넘어질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 신앙입니다. 시편 37:24을 보면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4:7-9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왜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왜 우리가 우겨 쌈을 당하여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나심하지 않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을까요?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잇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질그릇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심령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이렇게 약해도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토록 연약해도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더럽고 추해도 주님께서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함께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그 믿음으로 반드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의 인내, 성도의 용기, 성도의 신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부르짖었습니까? 낮이나 밤이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수많은 고통 속에 부르짖음에도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6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을 ‘벌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음을 의미합니다. 원수들로부터 당한 치욕이 얼마나 크면 그렇게 표현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황소, 바산의 힘센 소들이 마치 사자와 같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위급한 상황입니까? 사자는 대적들이 얼마나 포학하고 잔인한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으로 인하여 탈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절대 절명의 상황에 이른 모습입니다.

흔히 사람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역시 편안할 때 보다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굳건한 신앙인처럼 보이고 행동하던 성도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자신의 신앙적인 약점과 모순을 드러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실로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성도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오히려 놀랍고 커다란 신앙의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간혹 우리 성도들을 고난 중에 처하도록 만드시고, 얼마만한 신앙이 있는지, 그 믿음의 깊이 어떻게 되는지를 시험하시도 하며, 그 고난을 통하여 보다 바르고 굳은 신앙의 모습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고난을 만날 때에라도 바른 신앙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바른 신앙의 자세를 견지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믿음을 지속해야 합니다.

성도의 믿음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때는 고난이 올 때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산성이시며, 요새시라고 하는 그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참된 구주시라고 고백하던 그 입술이 고난이 닥쳐오게 되면 그 모든 고백들은 없어지고 의심의 늪 속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만유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그 자녀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신 32:10; 시 48:14) 영원히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참된 성도라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변하지 않고 지속시킴으로써 그 믿음의 진실함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요?

 

2. 찬송을 지속해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속에서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과 핍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내 구원의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믿음의 시인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21절까지 고난으로 인한 탄식과 부르짖음이 22절부터는 찬양으로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반드시 구원해 주실 줄로 확신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으므로,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형제 된 성도들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2:12). 다윗은 자신이 찬양하는 이유가 주님께 있다고 25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송은 피조물인 인간이 해야 마땅한 도리이기에 앞서(사 43:21). 하나님께서 먼저 찬송할 이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11:36).

사실 고난을 받게 되면 제일 먼저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바로 깨닫고 확신에 거하는 성도라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시 138:2).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의 은혜로 인해 영생의 복을 받아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할 넘치는 이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잠간의 고난을 참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는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간의 이 세상의 곤고한 삶을 이유로 불평하고 불만하고 원망하고 찬송을 멈추게 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고 누리는 성도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께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매달리고, 찬송하는 입술이 될 때에 응답은 더 빨라질 줄로 믿습니다.

 

3. 소망을 지속해야 합니다.

성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소망’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소망은 어떤 소망입니까? 하늘나라의 소망이 아닙니까? 그것은 구원의 소망입니다. 영생의 소망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로마서 8:18을 보면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잠시잠간 오는 환난의 경함으로 인하여 그 아름답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된 삶을 잃어버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왜 십자가의 그 모진 고통을 참으셨을까요? 당장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의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하여 잡으러온 로마 병정, 유대 병정 모든 군대를 멸할 능력을 가진 분입니다. 그런데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고, 끝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소망을 가지셨을까요? 바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소망이었습니다. 할렐루야! 내 이 모진 멸시와 천대를 다 겪고,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창세전부터 택해 놓은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소망은 우리 택한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부자가 되는 소망입니까? 자식이 잘 되는 소망입니까? 건강하게 되는 소망입니까? 남에게 인정받고 높임을 받는 것입니까?

제가 그야말로 생초보 신앙을 시작할 때에 서울 영락교회에 다녔습니다. 춘계대심방을 구역별로 나누어서 실시를 하는데, 저도 심방신청을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심방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구역 목사님과 권사님 두 분이 심방을 오셨습니다. 그날 언제 올지 몰라서 아침부터 청소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뛰어나가서 맞이하고 안방에서 간단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바라는 게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당시에 기도 제목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부모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건강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이 구원 받기를 소망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가셨습니다. 권사님은 얼마나 많은 신앙생활과 또 심방을 다녀보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살짝 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였습니다. “심방 올 때에 맞이하는 것을 보면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아직 잘 몰라서 그렇지만 믿음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을 하고 가셨습니다.

심방 오신 귀한 종을 대접할 줄도 모르고, 헌금할 줄도 몰랐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다만 심방이 받고 싶었습니다. 막연하게 주의 종이 우리 집에 와서 심방을 한다는 것이 좋게만 느껴졌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소망이었습니다. 주의 종을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사실 우리의 믿음이나 소망이로 하는 것은 너무나 막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막연한 마음이 점차 뚜렷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즉 믿음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엡 4: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반석과 같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비가 오고 물 나면 무너지고 마는 모래 위에 세운 믿음입니까? 조금만 힘이 들면 찬송이 그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신앙입니까?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큰 것인가요?

 

시인은 나라가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28).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오, 온 인류의 왕이 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공의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놓으시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입니까? 악인에게는 벌을 주고 의인에게는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악인은 지옥에 들어가고, 의인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 우리는 악인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롬 3:10) 우리는 악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판결을 받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치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영원한 영광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승리의 소망입니다. 현재 고난의 길을 걸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우리 성도들은 또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이므로 기뻐하며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롬 8:17, 18).

헤릭 존슨이라는 유명한 설교학의 대가는 “모든 실패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바로 영혼의 실패이다. 즉 다시는 아침이 오지 못할 죽음의 밤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건강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물질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자식 농사를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영혼의 경작을 실패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믿음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또 믿음이 있기에 소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자만이 찬송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고 나갈 때에 우리에게서 모든 환난과 근심과 역경이 어느 사이에 물러가고 없는 것을 발견할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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