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누구의 마음을 얻으려는가?

chukang 2010. 1. 2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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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마음의 얻으려는가? 사도행전 25:1-12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와 거룩한 것을 더럽게 했다는 죄명을 씌우고, 당시 군중들은 흥분하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나가서 몰매를 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소요를 들은 천부장이 달려와 바울을 체포함으로써 바울은 다행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21장) 이때로부터 바울은 5년 동안을 옥중 생활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미결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기까지 옥중 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25장까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된 이유는 ‘소요죄’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 원인은 유대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대교는 무엇이고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유대교는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독교의 이단입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전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우리들에게 만들어 주셔서 유일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종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화과로 엮어서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양을 잡아 그 가죽으로 몸을 가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원시복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어린양을 잡을 때에 당연히 피를 보게 되는데,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 시대 즉 율법을 주신 출애굽 시대에는 제사제도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율법은 그림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8:5; 10:1을 보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도를 가르치셨는데, 이 모든 말씀을 가리켜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자신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심을 믿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이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이 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은혜의 강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유대교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기독교가 유대교에셔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기독교에서 파생이 되어 이단으로 흐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교 즉 유대인들이 믿는 종교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표현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후손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지파로 유다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중에는 베냐민 지파도 상당히 섞여 있고, 기타 다른 지파 사람들도 있고, 이방인들도 섞여 있기는 합니다. 주로 유다지파로 구성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인 기독교와는 달리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자기들 편의대로 왜곡을 시켰습니다. 이 사상은 소위 신.구약 중간기에 완전히 형성이 되어 613개의 조항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입니다. 신.구약 중간기라고 하는 것은, 구약 성경의 마지막인 말라기부터 신약 성경의 마태복음까지의 기간으로 약 400년간의 공백기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오해하였습니다. 율법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조상들의 전통 즉 유전이라고 하는 것을 더하여 지키게 되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율법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 중에 가장 잘못된 것은 ‘메시아’사상입니다. 제2위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개념이 없이, 다윗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언젠가는 메시아로 등장할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선민인 유대인 자신들만을, 그리고 이 지상 나라에서만 영원한 지배자 민족으로 만들어 줄 정치적 메시아가 등장할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서도 발견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모인 마리아는 그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게 해 달라고 로비까지 하지 않았습니까?(마 20:21;막 10:37)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는 없다고 외치는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괴수라고 생각되는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런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곡해하고 핍박하는 유대교인들에 의하여 무고히 체포되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대로 당할 수만도 없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으며, 앞으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9:15,16) 그래서 성도들이 위험하다고 만류를 하여도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기꺼이 온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죽음의 고비가 몇 차례나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위기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21:31-36; 23:21-30; 25:3-5).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에 대하여 여러 차례 계시하신 것(20:23;21:11)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받을 고난을 미리 계시해 주심으로써 그 고난에 대비한 신앙의 무장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고난에 대한 성령의 계시를 받은 뒤 비록 마음의 번민은 있었지만,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3)는 굳은 결심을 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유대 지역의 로마 총독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고 붙잡히게 한 것입니다. 그는 눈앞에 닥친 고난을 앞두고도 확고한 마음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1. 절대 순종입니다.

그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 갈 것을 결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 20:22).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을 수행하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심령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바울은 얼마나 신실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거나 그냥 흘려듣지 않고 꼭 기억하여 실행하는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큰 책임감을 가지는 성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고 일을 맡기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절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의 자세, 즉 심령에 매이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자기의 몫에 따른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은 곧 불손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예화를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정말 크고 길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주님께 말했습니다. 이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도저히 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조금만 잘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잘라주셨습니다. 또 가다가 보니 무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 잘라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잘라주셨습니다. 몇 차례 십자가를 자르고 오다보니 앞에는 거친 급류가 흐르는 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 강을 건너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저쪽 편 강 언덕으로 걸쳐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기뻐서 자신의 십자가를 들어서 건너편 강 언덕으로 넘어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건너편 까지 닳지 않고 강물 가운데 떨어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워주신 십자가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너무 크고 너무 길고 너무 무겁게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주신 십자가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야 거친 강물을 건너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나의 삶의 십자가가 너무 힘들고 괴롭게 느껴지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바라보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한 구원의 십자가임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고난의 각오입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고난과 고통의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고난과 결박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재차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인정에 끌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정에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어디든지 갔습니다.

성도는 늘 푸른 초장만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고통과 고난의 가시밭 길도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그 앞에 놓인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해 예루살렘 행을 결심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난의 십자가도 질 것을 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도 바울처럼 고난의 결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각오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도 아낌없이 바치리라는 각오를 할 때에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친 세상을 되는 대로 표류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똑바로 항해를 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늘나라의 귀한 사명을 부여 받은 성도가 바로 ‘나’ 아닙니까? 히브리서 11:36-37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같은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언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각오를 가진 성도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백성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는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 뜻은 좋은 일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까지도 들어있습니다.

 

2. 이 세상은 사단의 세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인 사단의 지배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단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요 12:31; 16:11) 그래서 세상은 사단의 조종을 받아서 하나님께 속한 성도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으로부터 천상에서 쫓겨난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을 통하여 성도를 핍박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일선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핍박하여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는 것을 훼방합니다.

지식이 많아지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사단의 훼방 작전과 방법도 갈수록 교묘해집니다. 이러한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고 낙담하지 말고, 그 핍박의 배후에 사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단의 핍박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더욱 굳건히 무장해야(엡 6:13) 할 것입니다.

 

3. 이 세상의 멸망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로 이 세상에 재림하실 것입니다(마 24:14). 재림하신 후에 성도들에게는 영생복락을 주실 것이며,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불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 전파가 지체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널리 확장되면 될수록 이 세상의 핍박은 더욱 거세어지고 또 교묘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과거처럼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핍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다양해지고 또 교묘해졌습니다. 전에는 감옥에 집어넣거나 고문을 하거나 처형하는 물리적인 방법이었다면, 오늘날은 경제적, 사회적 압력 등의 정신적인 핍박이 거셉니다. 한 개인의 삶은 사회라는 제도 속에, 또 가정이라는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 압박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럴수록 성도는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마귀의 세상이 끝나가고 주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담대하게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든 환난과 핍박,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까지도 주님을 위하여 감내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의 마음에 들고자 하였습니다. 전 총독 본디오 빌라도 역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고 유대인들의 마음에 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와 협의하는 가운데 도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가 바울의 잘못이 없음을 알면서도 즉각 석방하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를 요구했습니다. “가이사께 호소하노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기도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비록 미결수의 신분으로라도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계획과 소명(행 19:21; 23:11)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싶어 합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동창을 따지고, 선후배를 따지고, 고향을 따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에 정의와 진리를 떠나서 불의한 방법을 사용한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우리 성도들이 취해야 할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사람의 마음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얻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는 오직 모든 가치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살았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싶습니까? 온전한 신앙으로 마음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서는 것은 곧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 마음이 자꾸만 그에게로 향하듯이,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 지금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열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보다 더 좋은 삶이 이 세상이 어디에 있으며, 이 세상 그 무엇으로 견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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