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군의 비유 마태복음 20:1-16
마태복음 19:30을 보면 주님께서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19장을 끝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포도원 품꾼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두 장에 걸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올바른 천국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리새인들은 어떤 천국관을 가졌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선행과 계명 준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사상에 대하여 확실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나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 가운데에서는 자신들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봉사의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서열이 정해진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28을 보면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생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열 두 제자에게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는 약속을 하심으로서 이제 민족적 이스라엘인 12지파가 영적 이스라엘의 시초인 12제자들로 대체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이런 특권은 사도라고 하는 역사상 유일하고 단회적인 독특한 직분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특권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만 관련이 된 것이지만 제자들은 이 땅에서의 권세나 지위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런 세상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천국관을 바로잡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말씀을 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관 혹은 천국관은 당시의 세상 사람들의 관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구원의 원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요? 율법에 의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주신 율법은 그들을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김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근간이 처음에 주신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각종 규례와 법도를 주셨는데, 그들은 바로 도덕법과 사회법(재판법, 시민법)과 의식법입니다. 도덕법은 일반 양심에 의거한 생활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회법은 말 그대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상업, 죄와 관련된 법입니다. 의식법(儀式法)은 제사와 제사에 따르는 방식과 절차 등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 ‘율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의 한 조항이던 “이에는 이, 눈에 눈”이라는 ‘동해복수법’은 현대 사회에서는 지킬 수가 없고, 만일 지킨다면, 지킨 사람이 오히려 범죄자가 되고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법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므로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회법은 폐기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아랍권에서는 이와 비슷한 율법이 지켜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도적질을 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고 간음을 하게 되면 돌로 쳐서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법도 폐기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주님의 십자가의 예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속죄제물이 되신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약의 제사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산 제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구원과 제사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곧 구원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원의 핵심은 율법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만드시고 속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산 제물로 바쳐지셨고, 영원한 대속 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율법’은 물론 구약의 율법이 근간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그 근본인 구원의 은혜 즉 사랑과 용서와는 멀리 떨어져서, 그들이 만들어 낸 613가지 조항으로 된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은 행위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불러일으키고(엣세네파), 행위 즉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치우치게 되었으며(율법주의), 제자들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위나,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 지위와 서열을 결정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이나, 또 하나님 나라에서의 서열은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 또는 공로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노력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한 반응으로 순종하고 봉사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이 순종이나 복종은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가에 대해서 연연해서도 또 바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오전 6시로 해 뜨는 시간)과 제 3시와 제 6시와 제 9시와 제 11시 다섯 차례에 걸쳐서 장터로 나가서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내고, 이들 모두에게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9시와 11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았는데, 자기들에게도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자 반발을 한 것입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일을 조금 밖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데나리온은 받았는데, 자기들은 일찍부터 와서 일을 많이 하였는데 왜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까?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네가 받은 그것이나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였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바로 자신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품삯을 지불할 때에도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고,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바로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은 ‘공로 교리 개념’입니다. 천국을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로 보지 못하고, 인간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성과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있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지은 죄와 착한 일을 한 것을 비교해 보아서, 착한 일을 더 많이 했으면 하늘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공로 교리 개념’입니다. 이 공로 교리 개념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613 조항의 율법’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도 이러한 공로 교리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천국도 세상의 질서처럼 계급과 지위에 따른 차등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무리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을 받은 자들로서, 더 많은 헌신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옾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높은 지위를 보장 받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천국관을 고쳐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서 실제로 천국의 법칙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계시하신 천국은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헌신의 양이나 순서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고, 다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는 세상의 일등이 꼴찌가 되고, 세상의 꼴찌가 일등이 되는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의 우열의 법칙은 무시되고 하나님의 신적인 평등이 지배하는 천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공로교리개념은 지금은 더욱 확장이 되어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면죄부’라는 이름으로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이 면죄부가 현재에도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제는 면제부를 금판으로 만든 것도 있다고 합니다. 이 면죄부와 동일한 개념이 무속신앙입니다. 부적이 무슨 효력이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무속인들이나 절에서는 공로개념을 이용하여 비싼 것이 더 효력이 있다고 유혹을 합니다. 굿을 해도 몇 십만 원짜리는 별 효험이 없고 몇 백만 원짜리, 혹은 천 만원단위를 해야 효험이 크고 좋다고 유혹은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 전에 나와서 열심히 봉사했으니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로개념’입니다. 이런 것은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장성한 신앙인은 봉사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기부금을 내면 대접을 받습니다. 상장도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헌금은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요,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서 일부를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 시대의 감사제요, 화목제요, 서원제입니다.
포도원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일꾼들이 일할 수 있도록 마련된 터전으로서의 교회 혹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또 집주인은 천국 복음을 위해 일하도록 일꾼, 곧 성도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품꾼은 하나님께서 천국 복음을 위해 부르신 일꾼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믿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면서 봉사했는데도 구원을 받고,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만 했는데도 구원을 받는다면, 그러면 우리도 교회에 다니지 않고 세상에서 마음껏 향락을 즐기다가 죽기 전에 교회에 오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구원관에 대해서 다시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주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죽기 전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여러분들보다 더 많이 받았을까요? 그들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생활한 것이 정말로 부러워할 만한 것일까요? 은혜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이렇게 일찍부터 나를 부르시고 주님의 뜰에 거하게 하셨을까 하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성도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온 품꾼들은 나중에 온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은 처음 계약과는 달리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대하였지만, 꼭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두 마디 불평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 더 받을 줄 기대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은 자나 나중에 부름을 받은 자나 동일한 하나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간사는 상대적이지만 신앙의 세계는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잘못한 점이 없다는 것을 정리해 볼까요. 첫째 주인이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는 점입니다.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한 것을 그대로 지불했습니다. 둘째 품꾼들이 포도원에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인의 자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셋째 주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고 그들이 비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상급은 인간적인 요소나 부르심의 선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불만의 대상이나 원망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감사의 대상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본 비유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온 자나 나중에 온 자가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고 하여 천국에서도 상급이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천국 상급과 관련이 없고, 구원의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떤 교훈일까요?
1.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입니다.
포도원은 좁게는 교회, 넓게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장터는 이 세상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계획에 따라 사람들을 포도원 일꾼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장터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신을 일꾼으로 써줄 주인을 기다리며 무의미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만을 선택하여 포도원으로 보내어 일하게 하였습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이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엡 1:4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들을 예정대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선택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 포도원인 교회의 성도가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들이 선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도 텔레비전 앞에 있을지 혹은 어제 밤에 즐기던 향락에 지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을지 혹은 휴일이니 놀러갔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것이 좋아 보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적인 장터에 불과합니다. 그곳은 일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돈을 벌고 싶어 벌 수 없는 곳입니다. 교회를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는 곳이 영적인 장터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어도 방법이 없는 곳입니다. 영적인 장터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심판을 받기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좋아 보입니까? 우리는 그저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2.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품꾼들이 포도원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일하였는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주인 마음대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신 자는 반드시 구원을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엡 2:8,9) 만일 인간의 공로를 따져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면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우편 강도는 결단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강도에게 “정녕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온 품꾼들 중에는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대충 대충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었지만 다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대충 대충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 것은 동일합니다. 일찍 와서 일을 한 품꾼은 일찍부터 신앙생활을 한 성도입니다. 늦게 와서 일한 품꾼은 늦게 부름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동일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이라고 해석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단지 동일한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고, 하나님께서 한 번 택하신 자들이라면 반드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 택하신 자들은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상 시간적으로 차이 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로 불러주시고 교회에 일꾼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늦게 온 품꾼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고 원망하는 일찍 온 품꾼과 같은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나, 건강이나, 입신양명의 복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에서 제외된 것도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나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내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일했으니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비우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반드시 하늘 보좌 앞에 높인 행위록에 기록이 되고, 금, 은 면류관, 의의 면류관과 여러 가지 상급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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