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으로 빌립보서 2:1-18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빌립보에 있는 교회에 편지한 글입니다. 빌립보는 ‘시’로서 B. C. 350년 마케도니아의 대왕 빌립 2세(Philip II, B. C. 359-336)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로서 원래의 이름은 ‘작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크레니데스(Krenides)’였으나 빌립 대왕이 도시를 확장, 증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Philippi)라고 칭하였습니다. 그 후 이곳은 로마에 정복을 당해 바울 당시에는 마게도냐라는 로마 속주의 한 식민지 성읍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금과 은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며, 스트리몬 강의 지류인 강기츠 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지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로마의 군사적 전초기지였으며, 전략상 마게도냐 지방에서 제일로 꼽히는 성이었습니다.(행 16:12)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A. D. 49-52)에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함께 빌립보를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본래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했으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달아 빌립보에 도착한 것입니다(행 16:7-12).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자주색 옷감 장수인 루디아와 점치는 소녀, 빌립보 옥의 간수와 그 가족에게 전도를 하였고, 그들은 회개한 후 루디아의 집에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행 16:13-40), 그것이 마게도냐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비록 적은 수로 시작하였으나 열심히 주을 섬기며 성도들 간에 서로 봉사하였습니다. 특히 그들은 사도 바울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자신들의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수차례에 걸쳐서 헌물을 보내기까지 했습니다.(빌 4:14)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어 바울을 돕게 하였습니다(빌 2:25). 이렇게 하여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만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사랑으로 인해 큰 기쁨을 얻었으며 또한 교회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머물며 바울을 돕던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들어 중태에 빠졌고(2:26,30), 이 일은 바울 뿐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까지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피차 근심하던 중,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그간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며 자신의 투옥으로 근심하여 염려하는 저들을 안심시키고 도리어 격려하고자 한 것이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의 문제점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도들 간의 분열 양상, 둘째,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와 반도덕주의자들의 위협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첫째 교회의 일치와 둘째 반복음주의적 사상과 행동에 대한 경계, 셋째 천국 시민권을 소유한 성도들의 영적 무장과 올바른 생활 자세를 제시하였습니다.
본문은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분열 및 기타 제 문제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부분과 교회 생활에 과한 권면을 하는 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 분열이라는 상처를 안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원리는 ‘권면’(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교훈하고 경고할 뿐만 아니라 위로와 격려를 통하여 믿음이 연약하거나 시험에 든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건히 서로돌 하는 것), ‘사랑의 위로’(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하여 늘 베푸시는 사랑의 격려에 힘입어 영육간의 고난과 좌절 속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격려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 ‘성령의 교제’(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인 성도들이 서로 다른 지체들을 필요로 하고 서로 유익하게 하는 상호의존적인 삶, 곧 성령의 인도에 순종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공동체적 삶을 의미), ‘긍휼과 자비’(긍휼은 전인격을 동반한 사랑의 관심과 도움이며, 자비는 사랑의 연민 속에서 연약한 자에게 대하여 베푸는 은혜로운 행위 또는 동정)의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한 성도들의 마음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하나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겸손을 제시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겸손의 모본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겸손
바울은 교회의 일치와 관련하여 겸손한 마음을 가장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 까닭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남을 돌아볼 수 없으며 따라서 서로가 한 마음 한 뜻을 이룰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겸손의 모본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야말로 겸손의 극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우주의 창조주요 주재자로서 신적 영광과 존귀를 계속적으로 누릴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성육신하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의 자세이며 얼마나 철저한 자기 부인의 행위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비천한 죽음이었고 하나님께는 저주의 죽음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십자가의 처형은 노예들과 이방인들에게만 행해졌던 형벌이었고, 유대인들이 나누에 달려 죽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기 되기도 했습니다(고전 1:23).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의 절정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교제를 가능케 하는 놀라운 사역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신을 낮추사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리스도를 같은 주로 섬기는 성도들이 서로 다투거나 시기하며 분열하는 것은 결코 가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연합해야 합니다.(에베소서 4:1-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승귀하게 하셔서 모든 피조물들이 저를 주로 시인토록 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3:12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명심하면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의 생활 속에서 겸손이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고 결국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이 없다는 것은 또한 성도들의 신앙이 나태하고 나약해졌을 때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성도들 간에 싸움과 분리의 동기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불평이나 다툼으로 할 때에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성도들의 일치단결된 헌신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2. 성도의 성화
성도들이 겸손으로 하나가 되어 일치된 교회를 이룬 후에는 자기 자신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힘쓸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촉구함으로써 그가 하고자 하는 내용의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두렵고 떨림은 노예적인 공포심이 아닌 신앙인의 경건하고도 건전한 경외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를 나타낼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런 두려움과 떨림은 자신의 자아의 죄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될 때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방법으로 첫째,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할 것과, 둘째, 흠이 없고 순전하여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심할 것은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공로교리”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구원의 효력을 발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구원을 소망하는 의지와 마음, 그리고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심으로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빌립보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바울의 애끓는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성도 각자의 성숙한 삶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각자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자신의 영적 성장에는 힘쓰지 아니하고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외적 모습에 관심을 둘 때 원망과 불평, 시기 등을 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교회의 일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린아이가 장성하여 어른이 되지 못하면 정상이 아니듯이 성도들도 역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불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엡 4:13)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우리는 비록 하나님 앞에서는 법적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지만 육신은 여전히 죄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탓에 육신으로는 할 수 없으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빌 4:13) 것을 알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 날마다 더욱 성숙된 삶을 살아가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성숙한 신앙의 구체적인 삶
1) 성결한 삶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성도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흠이 없고 순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레위 19: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였습니다. 이는 구별된 삶을 뜻합니다. 불순물이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러한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우리를 연단하시는 가운데 정금과 같이 만들고 계시는 중입니다.
2) 말씀의 준행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하신 첫 번째 일이 바로 “말씀”(십계명)을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지 그 나라의 법을 따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방종 된 삶을 살 때에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3) 복음 증거
주님을 본받고 따르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증거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올바른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흠이 없는 자녀들은 세상에서 빛들로 나타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빛은 자체 발광하는 빛이 아니라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입니다. 즉 성도는 빛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요 8:12). 성도는 자신의 빛을 비추기보다는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전도지 돌린다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라고 외친다고 불신자가 교회에 나옵니까? 성도가 말씀을 따라 흠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불신자들이 주님을 알게 되고 마음이 열리고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4) 기쁨의 삶
구원 받은 성도들이 받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재물이 많다고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출세했다고 행복한 사람도 아닙니다. 진정한 부요와 행복은 기쁨의 분량과 비례합니다. 세계적인 구약학의 권위자인 ‘에드워드 영’은 “만일 성도의 생애 가운데 기쁨이 없고 찬양이 없고 탄식과 한숨뿐이라면 그러한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불경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도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합니다. 감옥 속에 갇혀 있어도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에게 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서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죽음이 그리스도께는 영광이 되는 것이요, 바울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기쁜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얼굴이 슬픔이나 수심이 가득하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로마서 5:3,4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들을 연단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으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환난 중에서 자신을 알게 되고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 속에는 환난의 풍파, 죄악의 파도가 쉬지 않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성도는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능히 이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환난 때문에 연약해지는 성도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환난 중에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씀 가운데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인정을 받아야 하고, 충성하여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인정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정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전부가 될 때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삶이 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삶이야말로 형통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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