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저가 나를 사랑한즉

chukang 2010. 1. 30. 23:28

 

첨부파일 저가 나를 사랑한즉 시편 91.hwp

 

저가 나를 사랑한즉 시편 91:1-16

 

사람은 물론이지만 동물들과 식물들도 자신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여러 가지의 도구를 만들어 내고, 그 도구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내어서 그 속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동굴이나 바위틈이나 혹은 땅 속이나 물속이나 나무속이나, 풀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합니다.

또 연약한 동물일수록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카멜레온과 같은 동물은 자신의 몸 색깔을 바꾸어 상대방을 위협하기도 하고, 고슴도치는 가시를 세워서 방어를 하기도 합니다. 스컹크라고 하는 동물은 악취를 내뿜어 방어를 합니다. 몸의 모양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색깔을 바꾸기도 하고, 악취를 내뿜기도 하는 것은 지상의 동물들만 아니라, 물속의 고기들도 같습니다. 식물들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진액을 내기도 하고 냄새를 내기도 합니다.

안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거리입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먹을거리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라고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아니면 먹기 위해서 삽니까? 이런 토론을 할 정도로 먹을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북한에서는 죽은 사람을 장사를 치르고 나면 그 날 밤으로 시체가 없어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은 가장 먹을 것에 대하여 보장을 받고 있다는 군대에까지도 심각한 식량부족사태가 일어나서, 병이 들어도 낫지를 않아서 집으로 돌려보낸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가 발전하여 이렇게 풍족하게 살고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을 것보다는 입을 것, 집, 자동차, 즐길 것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인류 초기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먹기 위한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생활입니다. 환경이 좋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열매도 풍족하게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이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안전’입니다. 전쟁을 하는 목적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국 나의 안전, 내 가족의 안전, 내 부족, 내 국가의 안전을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에도 북한에서는 서해 NLL 상에 포탄 사격을 하여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예의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조치들이 대한민국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적들의 공격을 피하여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화살을 쏘면 화살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어야 합니다. 창으로 찌르면 박을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합니다. 방패가 없으면 몸을 숨길 수 있는 지형지물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얼마나 많이 도망을 다녔습니까? 그 때마다 다윗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방어할 수가 있었을까요? 화살과 칼과 창에 대항하여 싸우기도 하지만, 힘에 부칠 때에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바위 뒤는 안전합니다. 화살을 쏴도 뚫지 못하니 얼마나 안전합니까? 적군이 쳐들어오면 성안으로 피해야 합니다. 성은 요새입니다. 이렇게 피하여 안전하게 될 때에 다윗의 입에서 찬양이 나왔습니다. “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이것은 찬양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누가 알려 주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 시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찾아오는 각종 역경 가운데 체험한 신앙을 바탕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살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내일에 대한 불안감, 갖고 있는 소유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근심과 걱정 사람과의 관계 등과 같은 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아리가 어미 닭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안전을 보장 받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만 그 어떤 위험에서도 보호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렇게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1절에 나오는 바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지존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보다 뛰어나시고 탁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누구도 감히 맞설 수 없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무한한 신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곳’은 어떤 곳일까요? 아무도 모르는 곳일까요? 이상한 곳일까요? 그곳은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의 지성소를 지칭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성전의 지성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법궤 혹은 언약궤라고 불리는 궤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연결을 시켜보면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피난처요 요새로 삼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물리치지 아니하시며,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능히 깨뜨릴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새 사냥군의 올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냥꾼의 올무는 하나님의 백성을 실족하게 하거나 훼방하기 위한 악인의 은밀하고 음흉한 술책입니다. 극한 염병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악인들의 극심한 비방과 모략을 의미합니다. 연약한 새가 스스로 그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갑자스러운 전염병에 인간이 제대로 손쓸 수 있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따라서이러한 악인들의 적대 행위에 대하여 성도들 스스로는 능히 다 방어할 수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지 만물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심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벗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 아래 거하는 자는 그 모든 화를 면할 줄로 믿습니다.

 

4절을 보면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함은 전혀 거짓이 없으시고 당신의 언약을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이렇게 비유적인 표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보다 실감있게 표현합니다. 어매 새의 포근한 날개 아래에서 피난처를 얻은 새끼들은 폭풍우도 사나운 맹수의 위협도 아 잊고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방패’라고 하는 표현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대적과 맞서 싸우시는 적극적인 보호자로서의 하나님의 강한 이미지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밤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공포, 낮에 날아오는 화살에서도, 또한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으로부터,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 즉 전쟁이나 질병이나 홍수와 태풍과 같은 모든 재앙들로부터도 반드시 보호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려집니다. 그러나 택한 성도는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안전하게만 보호하시는 것으로 끝내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를 공격하는 악한 자들을 그대로 두어서 성도를 연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악인은 반드시 징계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8절에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성도를 공격한 악인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입니다. 이는 악인이 이 땅에 사는 동안 반드시 징벌당하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 땅에서는 제 마음대로 악을 행하며, 형통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욕심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복수심이 있기 때문에 나를 괴롭히는 자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자가 잘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왜 저런 자를 그대로 둘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제발 징계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는 것은 그 악인을 위함이 아닙니다. 성도를 연단시켜서 정금같이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담겨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이 땅에서 그렇게 잘 살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자(使者)를 명하셔서 모든 길에서 지키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에만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을 때에도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지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생 동안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시 23:4), 물과 불 가운데서도 상함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사 43:2).

12절에서는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에 빛이 되어 비추어 주시듯이(시 119:105) 특별한 보호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두운 밤길과 같은 죄악 된 세상 중에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결코 실족하여 넘어지지 아니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마 4:5,6) 마귀도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반드시 지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13절을 보세요.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섭고 사나운 이미지를 지닌 사자는 대적하는 사나운 악한 자요, 독사는 마음 속에 악의를 품고 있는 자입니다. 성도가 이들을 밝고 누른다고 하였습니다. 적군과 싸워서 승리하고 정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악한 것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요, 저들을 정복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결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보호와 안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사랑한다’ 이 말은 어떤 자세를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히브리어로는 ‘하샤크’라는 말인데, ‘달라붙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길 갈 때에도 어떻게 갑니까? 뚝 떨어져서 걷지 않지요?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습니다. 사랑하면 조금 더 가까이 있게 되는 것이죠.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있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 1절에서 ‘은밀한 곳’은 지성소라고 하였습니다. 지성소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것입니다. 또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태초부터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1) 또 말씀은 성령님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증거는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주님의 은혜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보호를 받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존재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순결이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순결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사랑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진정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긴다면 또 다른 누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순결하게 지키기 위해 이전에 사랑하던 세상의 헛된 것들은 분토와 같이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전 1:14). 참된 사랑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들의 마음에서 다른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 것들에 집착하며 사모하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심히 가증히 여기시고 진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그 뜻을 바로 헤아리고 그 뜻에 맞추기 위해 애쓰지 않겠습니까?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랑은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우리가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게 되고, 결코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랑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요일 2:4,5).

“사랑의 세계에는 복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 사랑하는 관계에 있어서 ‘너와 나’, ‘내 뜻 네 뜻’ 이라는 따로의 모습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깊고 진실 된 사랑의 관계일수록 한마음 한 뜻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에 따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에는 의심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상대를 귀히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긴다면 그 사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슬픔을 멀리하고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들의 소중한 사랑과 가장 귀힌 여기는 사랑의 대상을 자랑하게 되고 기쁘게 여길 것입니다. 우리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으로 인해 항상 기뻐하고(합 3:18; 살전 5:16), 가장 소중하고 귀하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시 64:10).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믿고 의지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널리 자랑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한없는 위로와 사랑하심과 보호하심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명절  (0) 2010.02.14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0) 2010.02.07
누구의 마음을 얻으려는가?  (0) 2010.01.23
주님의 마음으로   (0) 2010.01.16
포도원 품군의 비유  (0) 2010.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