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 하나님의 뜻 베드로전서 4:1-6
어느덧 긴 겨울이 가고 곳곳마다 봄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은 고난을 상징한다면, 봄은 소망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봄은 어떻게 시작이 될까요?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추운 겨울은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런 저런 수많은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들은 우리의 심령과 영혼을 겨울과 같이 만듭니다. 이 겨울을 잘 이겨내야만 봄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 움츠렸던 생명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땅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 위에는 또 눈이 쌓였습니다. 나무도 풀도 그 어디에도 생명의 싹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덧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눈은 녹고 땅도 풀리더니, 나무에는 꽃망울이 터져 나오고, 파란 싹도 나오고, 얼었던 땅 속에서도 싹이 고개를 내밀지 않습니까? 겨울을 이겨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놓았습니다. 내 뜻은 곧 겨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따뜻한 봄날입니다. 사람의 정욕을 좇는 나날들이 추운 겨울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날들은 따뜻한 봄날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겨울은 사람의 정욕을 좇는 날들입니다. 그 추운 영적인 겨울의 날들은 곧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날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추운 영적인 겨울에서 벗어나 따뜻한 봄날의 때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영혼이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여 아름다운 싹과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값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없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제일 앞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3:18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언급과 연결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그와 같은 마음의 무장으로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가지셨던 것과 같은 마음가짐 혹은 확신을 말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적인 생명을 가져오며, 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렇게 무장한 성도들은 그들에게 닥쳐오는 박해나 고난의 현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을 우리의 갑옷으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표현도 동일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권면은 ‘스스로 무장하라, 스스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로마서 6:1-11의 내용과 같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나와 주님의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뜻이 죽어질 때에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이루어지는 원리입니다. 내가 전에 좇던 생각들을 버릴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그쳤음이니’라는 말은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고 해서 죄를 없애버리거나 용서를 받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을 의지하여 죄를 제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를 그쳤다는 것은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죄의 삶입니다. 이방인의 삶입니다. 악한 삶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정욕과 세속에 의해 지배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인도를 받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욕에 의한 삶은 그 양태가 다양하며 수시로 변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항상 동일하며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은 육체 안에서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육체의 정욕, 즉 세속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육체의 정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넘치도록 육신의 정욕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러한 날들을 살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삶에 대하여 베드로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6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은 개인적인 죄악이며,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는 사회적인 죄악을 말합니다.
'음란‘은 색욕과 관련된 모든 무절제를 말하며, ’정욕‘은 난폭하고 걷잡을 수 없는 육체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의미하고, ’술 취함‘은 술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가리킵니다. ’방탕‘은 온 마을의 축제 때에 흥이 나서 온 마을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신약에서는 ’술 마시고 흥청거리다.‘ ’음란한 연회를 베푼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롬 13:13; 갈 5:21) ’연락‘은 함께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말하며, ’무법한 우상숭배‘는 이교적이고 비종교적인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든 죄악들은 색욕과 술에 대한 죄악으로 그 근원은 우상 숭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자유분방한 서구에서와 같이, 1세기의 소아시아 도시들에서 많은 사회 집단들의 특징을 이루었던 호색과 만취와 무질서에 대한 생생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볼 때에도, 나 개인의 삶을 통하여 볼 때에도 ‘사람의 뜻’ 혹은 ‘내 뜻’은 곧 이방인의 뜻이므로 사단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뜻은 곧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요, 배반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기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은 내 뜻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일까요?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첫 번째로 내가 먼저 목표를 정해 놓고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목표 혹은 내 목적이 곧 기도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의 제목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목적을 놓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보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경계해야 할 것은 내 목표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이 된다고 하더라도, 기도를 오래해도 응답이 없으면 내 방식대로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경계해야 할 것은 끈질기게 조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경우
창세기 15:4,5을 보면 “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사래가 가나안 땅에 와서 10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얻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창 16:3). 사래는 결국 자신의 종인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람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은 ‘이스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스마엘은 나중에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그의 후손은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목적, 목표는 단지 자식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인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으려고 했고, 첩을 통하여 자식을 얻어서 후손을 번성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둘 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 만이 지정한 후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창 15:4). 아브람과 사래의 뜻과 목적은 단지 후손을 낳고 번성시키는 육적인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후손을 통한 온 인류의 구원이셨던 것입니다.
2. 발람의 경우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적은 다만 물질이요, 명예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어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자를 가라고 허락하실 수가 있으셨겠습니까?(민 22:12) 그렇지만 발람은 이미 목적을 정해 놓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들어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들의 악한 꾀를 오히려 선으로 바꾸시려고 하는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악을 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오히려 선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발락의 요청과 발람의 응대, 나귀의 입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시며, 저주하려고 하는 입을 통하여 오히려 ‘축복’의 말이 흘러나게 만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3. 베드로의 경우
마태복음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신 후에, 베드로가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곧 사단의 생각입니다.
4. 사도 바울의 경우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은바 은혜로 인하여 혹시나 자고할까 하여 ‘가시’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가시가 너무나 괴로워서 3번씩이나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면서 고쳐주시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고후 12:7-9). 바울은 선학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고 하는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여전히 이방인의 생각과 행동을 좇아 그들과 같은 삶의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주님을 통한 참된 의와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참된 진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있습니까? 사람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조물주이신 하나님만을 좇아가고 그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만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그들의 참된 창조주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세상의 헛된 것을 좇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어리석고 가증한 우상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안개와 같이 곧 사라질(잠 21:6) 세상의 부귀와 명예, 권력을 좇아가기도 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이방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그들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허망한 것을 좇는 자는 그 허망한 것들과 함께 결국 허망함과 멸망에 이르게 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욥 15:31). 우리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이방인과 같이 헛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면 불신앙이며 불경건입니다. 그곳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의로움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나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은혜를 받고도 왜 주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은혜란 좋은 것이고, 은혜를 받으면 자신에게 유익이 있다고만 생각하여 맹목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이유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과 응답도 동일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내가 기도를 하면 왜 응답을 하실까?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은혜를 주시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 성도라면 왜 응답하시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응답을 받으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어서 기도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육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기도를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의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응답을 하신다면, 그 목적에는 ‘고난’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응답을 주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없이 승리의 면류관만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은혜로 성도와 함께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신앙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그 은혜로 더욱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만들며, 그 은혜로 인해 어떤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담대할 수 있는 장성한 분량의 믿음을 소유하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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