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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4장 강해: 엔게디 동굴의 다윗과 사울

chukang 2020. 8. 29. 10:52

사무엘상 제24장 강해: 엔게디 둥굴의 다윗과 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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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23:1-26:25까지 2차 도피기로 다윗이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다윗은 계속 살해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도피 생활 중에서도 따르는 무리들과 백성들에게 큰 신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왕 사울과 예비 된 새 왕 다윗의 극명한 대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떠나 자와 여호와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사단과 그리스도의 마지막 대결을 보는 것과 같기도 합니다. 사울은 갖은 핍박을 가하고,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을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가 마침내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표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7절은 다윗이 엔게디 동굴에서 극적으로 사울을 만나 그를 죽일 기회를 얻었으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다윗이 신앙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도 그는 자신의 장인이자(삼상 18:27) 그의 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아도, 자신이 사울을 죽이면 백성들로부터 반역자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신본주의적인 왕이 되어야 한다면 사울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존중하였으며, 사울에게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갚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도(23:34; 7:60) 돌을 맞아 죽으면서도 저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1-2: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지난 장에서 다윗이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블레셋의 침입 때문이었습니다(23:27). 사울은 요행히 블레셋을 쫓아내었고 또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추격을 시작했습니다. 국가적인 체계 안에서는 다윗은 군대 장관이므로 지휘관으로 삼아 블레셋의 침입을 물리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다윗을 제거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갔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이 말은 패주하는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다가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진멸시키지 않고, 대충 쫓아내고는 다윗을 죽이려고 돌아온 것입니다.

혹이 그에게 고하여누군가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에게 밀고했다는 것입니다.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엔게디 황무지에 대한 지리가 밝은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삼상 23:19; 26:1). ‘엔게디염소의 샘이란 뜻을 가진 지역으로 유다 또는 예쉬몬 광야의 가장 황량한 곳 중의 하나입니다. 후일 선지가의 환상을 통하여 변형된 사해로 언급되기도 합니다.(47:10) 다윗이 있는 곳을 알아낸 사울은 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쫓은 것은 그만큼 다윗에 대한 증오 내지 적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군사가 3천명이라고 해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한 사람을 잡으려고 3천명이 동원된 것은 한 지역을 샅샅이 훑을 정도의 인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사울의 심령 상태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악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여기에서 길 가 양의 우리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지형적인 지식이 조금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길 가 양의 우리는 찻길 옆에 목책이나 철책 등이 쳐져 있고 그 안쪽에 양들이 있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엔게디 황무지는 지역이 험준하여 농사에는 부적합하지만 양을 치는 데에는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합니다. 인적이 드물고 풍성한 목초도 있었고 물도 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축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목동들은 당시 흔한 자연적 동굴을 손질하여 우리나 숙소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사울도 이런 잡초 속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발을 가리우러이 표현은 잠을 자는 것혹은 용변을 보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용변을 보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면 사울이 아무리 급한 용변을 보고 있는 중이라고 할지라도 군인으로써의 경계심이나 주의력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다가와서 사울의 옷자락을 칼로 베기까지 했는데 어찌 알 수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블레셋과의 전투와 다윗을 쫓아다니느라고 피곤에 지쳐서 굴 안에 들어가자마자 긴장이 풀리고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입니다. 굴 상태는 매우 깊었고, 다윗 일행이 그 안쪽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사울의 상태였다고 하겠습니다.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 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을 따르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람들은 사울이 그 굴에 들어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다윗의 손에 죽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해석을 해도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용히 칼을 들고 가서 사울의 겉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이는 사울의 처단에 대한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다윗은 역시 군왕의 재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다른 지혜와 통찰력과 절제력까지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도 사울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참을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이 있었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정말 신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한 심한 불만이 있었을 수 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왕의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에 마음이 찔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베면서 살의를 느꼈기 때문에 마음이 찔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특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다윗과 다윗을 좇는 사람들의 생각은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심입니다.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선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에게 내 주(: 주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משׁיח)인데 보통 메시아(משׁיח)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기름을 붓다라는 동사인 마솨흐’(משׁח)에서 나왔는데,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것(21:5), 집을 칠하는 것(2:14)에 사용이 되었습니다. 종교 의식에서 성막, 제단, 물두멍, 속죄제물(29:36) 같은 것들에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택한 자에게 직분을 맡길 때에 뿔에 담긴 기름을 붓는 행위를 지칭할 때에 사용이 됩니다. 즉 왕(삼상 16:13;삼하 12:7), 제사장(29:7;35:25), 선지자(왕상 19:16;61:7;35:25) 등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에는 4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이나 물건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을 붓는 자가 제사장이든 선지자든 기름 부음을 받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들로 기록하고 있습ㄴ지다. 즉 권위를 부여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므로 가름 부음을 받은 자는 신성 부가침의 존재라는 뜻입니다(삼상 24:8). 그래서 특별한 종경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신이 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한 권능이 기름 부음을 받는 자에게 부여됩니다.(삼상 10:6;16:13) 넷째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장차 올 약속된 구원 즉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통치자에 대한 기대는 구약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9:1-7;11:1-5;61: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행들이 죽일 것을 주장하여도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사무엘에 의하여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 기름 부음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름을 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그 판결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다윗입니다.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일행들에게 ”‘금하여’(שׁסע:솨사)”이 단어는 강조형으로 사용이 되면 진압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즉 다윗이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일행들에게 사울 죽이는 것을 제지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사울은 잠에서 깨어 굴에서 나갔습니다. ‘자기 길또 다시 계속해서 다윗을 찾으려 가는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왕궁으로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8-15절은 다윗이 사울을 해하고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9)은 사실이 아니니, 자신을 추적하지 말아 달라고 다윗이 사울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임당할 까닭이 전혀 없음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원수에게 대한 모범적인 자세입니다. 첫째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를 선대하며 선을 베풀라는 것입니다.(25:21,22;5:44;살전 5:5) 둘재 원수 갚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20:22;12:19;10:30). 셋째 원수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여 회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같이 할 수 있을까요?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다윗과 그 일행들은 사울의 일거수일투족을 깊숙한 곳에서 매우 긴장하면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잠에서 깨어 굴 밖으로 나가자, 다윗도 곧 따라 나갔습니다. ‘내 주 왕이여라고 부르는 것을 볼 때에, 그의 신실한 신앙심과 함께 이스라엘의 왕으로 또 장인어른을 대접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또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자신은 사울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역시 다윗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토록 사랑하신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잘 나가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밟고 올라가려고 하는 작금의 세태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9: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사람의 말을이란 사용하였지만 실제로 부하들이 사울에게 아첨을 하며 그의 마음을 부채질하기 보다는 사울 자신의 마음 중심이 악령에휩쓸려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간접 화법을 통하여 그의 양심을 일깨워 보고자 함입니다.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또한 자신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충동질하여 사울을 죽여야 된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결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울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윗의 한 마디였습니다.

 

11: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 옷자락만 베었은 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은 역시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을 자극하는 말입니다. 사울도 이런 다윗의 모습에 사울은 잠시 동안 정신을 되찾기도 했습니다. ‘겉옷자락만 베었은즉자신은 사울을 결코 죽일 의향이 없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는 조용하게 사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하였습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할 위기 속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모습이요 차기 왕으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 13: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제 마지막 외침이라고할 수 있는 다윗의 말입니다. 결국 모든 악인은 하나님께 징벌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모든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결백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며,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12:9) 선으로 악을 싸워 이긴 것입니다(12:21). ‘옛 속담’(마솰: משׁל)으로 번역된 우리 말의 어감으로는 짧은 교훈 정도로 생각할 수 있으나, 구약에서는 긴 비유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성경적으로 모두가 알 수 있는 내용으로 사울의 마음을 찌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악한 마음에서 악행이 나온다는 것으로, 사악한 사람은 스스로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6:45)고 하셨습니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좇음이니이다.

13절의 옛 속담의 방식을 따른 비유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죽은 개나 벼룩을 상대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이스라엘 왕으로,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으로 비유함으로써 사울이 자기보다 훨씬 귀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자신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쫓는 것이 무익한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적개심을 완화시키고자하고 있습니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사정’‘신원하시고는 모두 리브(ריב)’인데 사정은 명사, ‘신원하시고는 동사로 사용하였습니다. 동사로는 다투다’ ‘싸우다이며, 명사로는 싸움’ ‘논쟁’ ‘송사를 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공정하신 법률적인 판결로써 다윗과 사울 사이에 있는 분쟁에 대하여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울은 매일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쫒아오지만 자신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맞았어도 죽이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사정을 잘 살펴서 자신의 결백함을 알아달라고 하는 호소인 동시에 사울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잘 처리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16-22절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선대한 다윗의 진정에 탄복하여 일시 회개하고 사과하며 다윗 추적을 중단하고 기브아 본영으로 돌아간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의 말에 사울은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지만 그 마음에 감동을 받고 소리 높여 울며 회개하며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역시도 하나님의 기름부름을 받은 자였고, 그럴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다윗을 택하셨고, 교만한 사울은 물리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18:12"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16: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다윗을 보고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양심의 가책과 함께 감동으로 전에 골리앗과의 싸움의 전쟁터와 자신의 딸을 아내로 준 일들과 자신이 그를 사랑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그의 감정선을 건드리며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진실한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롭다(차디크: צדיק)는 법정에서 무죄를 뜻합니다. 즉 다윗이 율법에서 벗어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다윗이 선대한 것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다윗에게 넘겨주었지만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붙이셨으나(사가르: סגר)’닫다’ ‘폐쇄하다는 뜻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넘겨주다’ ‘양도하다는 뜻입니다. 동굴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수중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이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데, 자신의 수중에 들어왔음에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기억하는 그 믿음에 대하여 사울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으로 갚아주실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사울도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도 이미 인정하였으므로, 다윗의 왕권이 합법화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사단도 알고 사단에 사로잡힌 자도 알고 그 앞에서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 바뀌거나 왕조가 바뀌게 되면 한쪽은 권세를 잡고 패한 자들을 가문까지 몰살시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은 결국 죽게 될 것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사울은 기브아로 다시 돌아가고 다윗은 그의 은신처인 요새로 돌아갔습니다. 둘은 화해를 하였지만 각자의 길로 갔습니다. 이는 사울의 회개는 일시적이며 인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단의 강한 힘에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과 함께 돌아갈 수가 없었으며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