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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2장 강해: 사울의 제사장 학살 사건

chukang 2018. 9. 1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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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22장 강해: 사울의 제사장 학살 사건

 

본 장은 1차 도피기 중에 있는 다윗에게 그의 혈족과 추종자들이 결집되는 것과, 자신도 모르게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죄목으로 간신 도엑의 고발에 따라 놉 제사장 85인과 그 가족을 학살한 만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둘람 굴에 피한 다윗의 추종자들 400인과, 모압 미스베로 갔다가 다시 헤렛 수풀로 돌아온 도피 과정의 요약과, 부하들을 향하여 다윗 추적 실패에 대한 질책을 하던 사울이 간신 도엑의 고발로 다윗이 놉을 방문하였다는 사실 알게 되고, 부지중에 다윗에게 음식과 무기를 제공했다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행한 학살 사건, 학살을 피한 제사장 가문의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피하는 순서로 내용이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1-5: 다윗이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하여 이리저리로 도피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는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추종자들을 얻었으며 다시금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갓이 다윗을 찾아와서 유다 땅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하니, 다윗 일행은 유다 땅 헤렛 수풀에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다윗이 400인의 추종자를 얻게 되어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 400명 중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도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다윗을 따르고 지지하던 사람들도 있으며,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다윗을 따르기는 했지만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고난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밝은 미래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후에 다윗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삼하 2:3).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인내로써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8:17).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는 갓 선지자의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진정한 피난처이며 요새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누구든지 대적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담대히 마주서야 할 것도 아울러 교훈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아둘람은 가나안의 왕도(王都) 중의 하나로서 피난처’ ‘은신처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드와 베들레헴 사이에 위치합니다. 가나안 정복 이후 유다 지파에게 주어진 땅이지만(12:15;15:35), 당시는 블레셋 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 지역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을 뿐 아니라 사울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 않았던 곳이므로 다윗이 피신하기 좋았을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4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 동굴을 발견하고 이곳을 다윗의 피신처로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이곳 근처의 굴로 도망하여 그의 가족과 친구들과 결합하게 됩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둘람에서부터 약 15km 거리의 베들레헴에 있던 가족들이 다윗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모반(謀反)에 관한 범죄에는 온 가족이 처벌을 당하는 시대였으므로 사울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도피한 것으로 보입니다.

 

2: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사울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아둘람으로 모이고 다윗은 그 장관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 다윗의 명성은 사울보다 높았습니다. 여인들의 노래에서 사울보다 다윗을 더 위대하게 표현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삼상 18:6-8). 그리고 다윗이 군대의 사령관으로 있을 때에 가는 곳마다 지혜롭게 행하여 모든 일에 성공했었습니다(삼상 18:5, 14). 그래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윗에게 온 사람 중에는 갓도 있었으므로 다윗에 모여든 사람들이 불량배나 각종 난민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추앙을 받았던 다윗이 사울의 질투와 시기로 왕궁에서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자 사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환난당한 모든 자사울의 학정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통을 받던 자들입니다(51:13). ‘빚진 자사울의 그릇된 경제 정책의 일면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즉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어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원통한 자에서 원통(마르: )이라는 뜻입니다. 이 형용사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쓰인 경우는 쓴 포도송이(32:32)’, ‘쓴 물(15:23)’ 등 미각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감정을 묘사하는 비유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이 됩니다. 히브리인들은 비통하고 불쾌한 체험을 미각의 관점에서 즉 쓴 맛이라는 관점에서 표현하였습니다. 다윗에게 모인 사람들은 사울의 불의한 통치와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었습니다. KJVNIV불만을 품은 사람들(discontented)'로 번역했습니다. ’다 그에게로 모였고이렇게 사울 왕권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영적으로 고통을 받던 사람들이 사울을 버리고 혹은 피하여 다윗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많은 용사들과 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5; 대상 12:1-18). 이들은 패역한 사울 왕권 하엣6j 안일하게 살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에게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라면 여호와의 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난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스라엘의 사람 계수법에 따르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전투 요원만 4백여 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다윗이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천부장이었음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효지만 생활 기반을 모두 버리고 가족을 동반해 온 자들이 이처럼 많았다는 것은 다윗의 신앙이나 인감 됨됨이가 얼마나 좋은 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다윗은 아둘람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옮기고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부모와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하여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 이유에는 첫째 다윗의 증조모 룻의 고향이 모압이었으므로 혈연적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며(4:13-22;1:5,6) 둘째 사울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4,5) 이처럼 다윗이 도주 중에도 그 부모를 보살피는 일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마치 자기의 모든 이익을 포기하고 시모 나오미를 따랐던 룻의 희생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윗은 그 후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 한 나머지 자기가 할례 없는 사람’(삼상 17:26)이라고 경멸했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피신했다가 큰 위기를 당하엿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들이 다윗을 좀 더 신중하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구체적인 인도와 계획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때까지 자신의 부모들을 안전한 모압의 왕에게 위탁한 것입니다.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다윗의 요새는 다윗이 산의 고지 혹은 성채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그의 부모는 모압의 왕과 함께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장소는 단지 다윗이 모압 미스베에서 발견한 숨을 곳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5절의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더 이상 이 요새에 머무르지 말고 유대 땅으로 돌아가라는 말에서 이 요새가 아둘람 동굴이나 베들레헴 근처의 다른 피신처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당시 선지자 갓이 어떻게 다윗과 함께 모압 땅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은 모압 땅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해서 유다 땅을 벗어나 모압으로 왔는데 다시 사울이 지배하는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원수가 통치하는 땅으로 과감하게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함으로 이제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삼상 21:10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것입니다. ‘헤렛 수풀은 헤브론 산맥의 등성이에 위치한다고 합니다. ‘헤렛은 아둘람에서 약 5키로미터 되는 것으로 수풀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 다윗이 아둘람을 거쳐 헤렛 수풀에서 그일라로(삼상 23:1) 또 마온 황무지(삼상 23:24)으로 그 다음에는 엔게디 황무지(삼상 24:1)로 도피하였습니다.

 

6-23: 다윗이 놉 땅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에 그곳에는 도엑이라는 자가 있어서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즉 그 광경을 도엑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도엑으로 인하여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그 같은 예견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급기야 도엑에게 놉 제사장들을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제사장 85인과 놉 땅의 거민 모두가 진멸당하고 말았습니다(11-19).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만이 겨우 다윗에게로 도망하여 사태를 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자기의 왕위를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사울의 잘못된 욕심과 도엑의 기회주의적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처세술이 빚어낸 추악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야 할 신정적 왕정 체제의 왕으로서 이런 악한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기술하여 그가 앞으로 몰락할 것이 필연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령이 사울을 떠나고 사울은 악령에 사로잡혀 이런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게 되고 도엑이라는 악한 자가 그 도구가 되어 악과 악이 만나 이런 엄청난 살육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가문에 대하여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삼상 2:31,32;3:11-14) 엘리와 그 아들들의 패역으로 인하여 그 가문의 멸절을 선고하셨는데, 엘리, 홉니, 비느하스 및 그의 처의 죽음(삼상 4:11; 18:20)에 이어 그 후손들인 제사장 85명이 죽음으로 또 한 번의 예언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천지는 변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하며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사울이 자신의 왕위 보존을 위해 죽이려 했던 다윗이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많은 무리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사울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행방을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나타났다(야다: ידע)’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안다는 것과 동일어로 피상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고 있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높은 곳(라마: רמה)’로 일차적 의미는 높이 쌓아 올린 대이지만 많은 경우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사용이 됩니다(19:29;4:5;삼상 7:15)여기에서는 당시 사울의 수도였던 기브아란 지명이 나오므로 개역성경처럼 일반 명사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라마가 대부분 신적 존재를 섬기기 위해 쌓아놓은 높은 곳애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착안한다면 당시 사울은 자신을 신처럼 높이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손에 단창을 들고일반적으로 고대 근동의 왕들은 왕권의 상징으로 홀을 들고 있었으나 사울은 흔히 단창을 소지한 듯 합니다.(삼상 18:10;26:7;삼하 1:6) 이는 당시 상황이 전시였다는 점과 더불어 여기서는 특히 다윗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셀 나무 아래 앉았고에셀 나무는 주로 수분이 많은 와디(WADI)에서 자랍니다. 따라서 고지대였던 기브아에서는 자라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에셀 나무가 있었던 것은 사울이 에셀 나무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삼상 31:13), 이 나무가 과거 아브라함과 관계되었으며(21:33) 자신의 권위를 높여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모든 신하가 그 곁에 섰더니마치 동양의 절대 군주가 자신의 위용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하들을 기립시킨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사울은 몹시 흥분된 상태였고 그 부하들을 질책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전회의를 이끌기 위해 이런 상태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사울은 그의 측근들을 거의 같은 지파 사람인 베냐민 지파로 구성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포도원과 밭을 주었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준 포도원과 밭은 일반 백성들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인데 이러한 현상은 일찍이 왕의 제도를 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무엘이 경고햇던 내용들입니다(삼상 8:10-18). 사울은 그의 신하들에게 다윗이 너희에게 포도원을 주며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 속에는 다윗이 다른 지파인데 너희에게 내가 해 준 것처럼 그렇게 해 주겠는가? 그가 유다 사람들에게 주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내 편에 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은근함 압박을 주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서도 사울은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게 모든 유익을 나누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실로 너희 모두가 나를 대항하여 공모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공모는 어떤 것을 무엇인가에 묶거나 연결시키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인간들끼리 함께 뭉친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울은 모든 신하들이 다함께 뭉쳐서 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맺어 서로 정보를 교환한 것을 알면서도 자기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발하는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나의 귀에 드러내는이라는 뜻으로 곧 보고하는 것입니다. KJV에서는 나에게 드러내는(showth me)으로 번역했고, NIV에서는 말하다(tells me)'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의 일에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고발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그의 부하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선동하는 것은 일으켜 세운다는 뜻인데, 배반하도록 선동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의 신하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이제는 요나단까지도 다윗 편에 가담해서 자기를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극심한 피해 의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 표현을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 자기가 포도원과 밭도 주고, 천부장과 백부장의 직책을 주었는데 자기편에 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여 부하들의 이기심을 부추기며 충성이 약하다고 질책하고 있습니다.

 

9: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때에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자기편에 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여 부하들의 충성을 요구했을 바로 그 때를 말합니다. 즉 에돔 사람 도엑이 바로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놉에서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일을 고발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우리 성경은 그를 위하여라고 한 번만 번역하고 있는데 원문에서는 3번이나 쓰였습니다.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물었고, 그를 위하여 식량을 주었고, 그를 위하여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위해 한 행동들을 조목조목 자세하게 고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께 묻고라는 말은 삼상 21:1-10에 나오지 않지만 15절 아히멜렉의 답변으로 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11: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들은 조금도 사울 왕에게 범죄 한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도망하거나 다윗에게 피하려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아히멜렉 혼자였는데 사울은 놉에 있는 제사장 모두를 소환한 것입니다. 자기의 신하들과 요나단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던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도엑의 말을 듣고 극도로 흥분하여 처음부터 제사장들을 모두 살해하려고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악령이 강하게 역사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분명하며, 그러나 그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12,13: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아히멜렉에게 반역죄를 씌우고 있습니다. 아히멜렉과 다윗의 공모한 죄목은 도엑이 말한 10절의 세 가지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된 사울은 이제 하나님의 종인 제사장도 반역자로 다스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문은 모세 율법의 형사 소송법상 재판에는 2명 이상의 증인이 요구되는 것도 무시한 것이기도 합니다(19:15).

 

14: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아히멜렉은 여기에서 사울의 말을 통해 다윗이 자기에게 왕명 수행의 일로 왔다고 한 것이 거짓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광적인 모습 앞에서 아히멜렉은 자신의 안위를 꾀하기보다 다윗의 의로움과 왕이 그를 사위로 삼을 만큼 존귀한 자였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충실한 자(네에만: נאמן)’신실하다’ ‘성실하다의 뜻을 가진 아만(אמן )’ 동사의 수동 분사형입니다. 확증된 사람’ ‘충성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아히멜렉은 왕의 신하들 중에서 다윗과 같이 충성된 사람으로 입증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하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윗의 신분이 왕의 사위요, 왕의 시위대 장관이요, 왕궁에서 존경 받는 자가 아닙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모신(謀臣)’왕의 개인적인 감정을 얘기하고 토론하는 왕의 비밀스런 보좌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15: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 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21장에서 아히멜렉이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이번 경우가 처음이 아니라 이전부터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의 전투 수행 시 우림과 둠밈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히멜렉의 질문 속에는 내가 다윗을 위하여 물은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자신이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다윗의 앞길이 평탄할 것인지 하나님께 물어 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기에게 왕의 명령을 수행 중에 있다고 한 말은 고하지 않았는데, 이는 다윗의 말과 상관없이 양심상 자신의 행위가 떳떳하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아히멜렉은 자기에게 사울이 반역을 꾀했다고 한 말에 대해 이 모든 일의 대소 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라는 말로 왕에 대해 반역의 음모를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자기와 자신의 온 집에 책임을 묻지 말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16: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사울이 도엑의 말을 듣고 아히멜렉을 불러 반역 공모 죄를 씌워 이제는 사형의 판결을 내리는 말입니다. 이는 관원이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해야 하며 자신의 사사로운 이기심의 충족을 위해 권력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13:1-7) 점에서 볼 때, 사울의 판결은 여호와의 뜻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국사범의 경우 많은 증인을 확보하여 설차 범죄 행위가 적발되더라도 당사자만 처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의 영혼은 온 가문을 멸절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범죄자임입니다. 이런 경우에 성도는 정권에 공의를 제시할 책임이 있다고 잠어서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24:21).

 

17: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아히멜렉이 그의 결백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당시 상황에 대한 일고(一考)도 없이 대제사장뿐만 아니라 놉의 다른 제사장들에게까지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는 그의 시위자 즉 창기병(槍騎兵)에게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반역 행위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5:4) 사람들 편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제사 업무를 수행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사울의 명령 가운데서 여호와의 제사장이란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사형죄목은 첫째 다윗과 협력하여 다윗의 편에서 합세하여 공모했다는 것이며, 둘째는 다윗이 도망한 것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히멜렉은 무죄임을 증언했으므로 즉각 사형은 온당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이 매우 잔인하고 미친 짓에 가까운 것이어서 왕의 신복인 창기병들조차 여호와의 제사장들에게 손대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싫어한지라원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사울의 명령에 직접적인 거부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왕의 창기병들이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자 이제 사울은 도엑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왕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도엑은 이방 사람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출세할 기회를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이 사건은 일찍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예언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삼상 2:27-36). 아히멜렉은 이다말의 후손으로서, 아히둡의 아들이며, 사악한 비느하스의 손자였고 엘리의 증손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손에 엘리 자손들이 몰살당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아비아달도 다윗의 생전에는 제사장 직무를 잘 수행했으나 다윗 이후 왕자들 사이에 왕위 찬탈전이 벌어졌을 때, 아비아달이 아도니야 편에 가담함으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에 제사장 직무를 박탈당하고 아나돗 지역으로 귀양을 갔습니다.(왕상 2:26) 이렇게 하여 엘리 집안에 예고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놉 땅은 본래 제사장 성읍으로 지정 된 곳은 아닙니다. 실로가 함락된 후 사울이 놉에 제사장들을 정착시키고 여호와께 대한 예배를 회복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이 같이 놉에 있는 사람들과 가축들까지도 몰살시켰다는 것은 당시 사울이 얼마나 사악한 영혼으로 변질 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을 죽이라는 사울의 명령에 이 같이 백성들과 가축까지도 몰살시킨 것은 도엑 스스로 한 짓이라기보다는 사울의 추후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만행에 도구가 된 도엑 그 자신도 얼마나 흉악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가 타락한 영혼은 불신자보다 더 반기독교인(antichristian)이 되어 마귀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0: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아버지는 부유하시다.’는 뜻을 가진 아비아달은 엘리 제사장 계열에서 생존한 유일한 자입니다. 아마 그는 모든 놉의 제사장이 사울에게 나아갈 때 성소를 지키기 위해 놉에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기브아에서 발생한 살육 소식을 듣고 즉시 에봇을 챙겨(삼상 21:9;23:6) 도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위기 상황에서도 에봇을 챙긴 것은 후에 압살롬 반역 시 하나님의 연약 궤를 메고 다윗을 좇은 것과 마찬가지로(삼하 15:24-29), 그의 여호와의 제사장으로서의 충성된 일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로 가서당시 다윗에게는 사울의 폭정에 시달려 도피한 자들이 많았으므로 아비아달 역시 자연스럽게 이들과 합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아비아달은 다윗이 다음 왕위를 계승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임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이런 도피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21: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당시 다윗이 받았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그는 더욱 악인을 증오하게 되고,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고발하는 기도가 시편 17, 35, 109, 140 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22: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다윗이 아비아달로부터 놉 제사장 학살 사건의 내용을 듣고 그 사건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다른 놉의 모든 제사장들이 사울에 죽임을 당한 것은 다윗 자신이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여 그의 도움을 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삼상 21:2).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거짓말로 인한 범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비아들을 보호해 주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성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세입니다.

 

23: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에게 장차 이스라엘의 왕권을 주실 것임을 믿는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다윗에게는 선지자 갓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있어서 다윗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제22장 강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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