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 제19장 강해: 사울의 살해 명령과 다윗의 피신

chukang 2018. 7. 14. 15:48

사무엘상 제19장 강해.hwp


사무엘상 제19장 강해: 사울의 살해 명령과 다윗의 피신


 

   18-20장은 사울이 자신의 입지에만 연연하여 자신에게 충성하는 다윗을 시기하고 더 나아가서는 살해하려는 음모를 수차 자행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결국 21장부터 삼하 1장까지 계속되는 다윗의 도피 생활의 배경 및 발단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스라엘 신정 왕국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신본주의적 자세를 갖추지 못하여 결국 왕위 폐지를 예고 받은 사울이 순수한 여호와 신앙으로 무장하여 새 왕으로 선출된 다윗을 부당하게 핍박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결코 스스로의 생각이나 힘으로만 대항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울과 다윗의 모습은 사단과 세상이 그리스도와 성도를 핍박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7: 다윗을 제거하려는 두 번의 시도를 실패한 사울은 이제 공공연하게 다윗 제거 명령을 내리자 요나단이 다윗을 보호하려 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의 명령을 알려서 당분간 숨어 있도록 하였으며, 부왕 사울에게도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고하였습니다. 사울도 잘못을 깨닫고 잠시나마 마음을 돌이켜 다윗 죽이기를 포기합니다. 다윗이 살해 위험을 맞이해야 했던 이유는 오직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직하고 지혜롭게 행하여 자기의 맡은 임무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과 자신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버린바 된 사울 간에 역설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 세상이 항상 갈등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96:13;13:39). 이런 갈등은 역사상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인으로 몰려 죽임을 다하셔야 했던 사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14:6). 하나님은 그러한 갈등을 오히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선용하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 어떠한 상황 아래허도 항상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8:12-39). 요나단의 행동은 다윗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한 진실한 것이었음도 보여줍니다. 이런 사랑이 다윗을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나단의 구정은 인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정을 예표합니다. 주님께서는 진실된 사랑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던 것입니다.(5:2)



 

1: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

18장에서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들이 3번에 걸쳐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11), ‘그가 생각하기를’(17), ‘스스로 이르되’(21) 이런 표현은 다윗을 제거하려는 사울의 은밀한 계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들이 실패하자 이제는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죽이다(레하미트: להמית)’에서 전치사 관하여라고 해석하면 죽이는 것에 관하여라는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 본문과 같이 부정사 연계형과 연결될 때는 죽이라고또는 죽이기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문맥에 있어서도 단순히 다윗을 죽이는 주제로 토의했다기보다는 사울이 심중에 깊이 간작했던 문제를 명령조로 이야기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NIV에서도 ‘to kill David'라고 번역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기뻐하므로에서 우리 성경에는 접속사 (ו)‘를 불분명하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KJVNIV에서는 이를 명확하게 그러나(but)'로 번역했습니다. 따라서 원문을 직역해 보면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그리고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매우 기뻐했다.’가 됩니다. 이처럼 사울이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에게 명령했음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과 같이 또는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삼상 18:1). 그래서 다윗에게 사울의 계획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기뻐하므로는 어떤 것에 대하여 큰 호의를 느끼는 감정을 말해주는 동사입니다. KJV에서는 ‘deilghted much', NIV에서는 ’very fond'로 번역하였습니다.


 

2: 그가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괴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요나단이 다윗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말해줌으로써 행동에 옮기는 참된 우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ו)’를 살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알려 주었다.’로 번역하면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살릴 수 있습니다. ‘꾀하시느니라(메바케쉬: מבקשׁ)’바카쉬(בקשׁ)’의 분사형이며 그 뜻은 찾고 있다.’입니다. 즉 사울이 다윗을 죽일 기회를 계속적으로 노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용맹에 대한 여인들의 노래 소리를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는 은밀히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다윗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조심하여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음모가 이미 세워졌다는 것과 그 음모의 진행이 아침에 있을 것에 대한 정보를 다윗에게 미리 알려주어 이 위기를 모면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3: 내가 나가서 너 있는 들에서 내 부친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부친과 말하다가 무엇을 보거든 네게 알게 하리라 하고

은 궁정에 딸려있는 뜰, 혹은 들판으로 왕이 산책을 즐기는 곳이며, 2절에서 말한 은밀한 곳과 동일한 장소입니다. 당시 다윗을 죽일 사울의 계획은 다 짜여 있었으며 왕의 명령에 따라서 모사를 진행시킬 신하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음모에 다윗이 희생될 위기에 처하자 요나단은 자신이 아버지 사울에게 간청하여 그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다윗이 숨어서 나오지 말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무엇을 보거든여기에서 보다(ראה)’는 단순히 목격하다는 의미 이상으로 본질을 파악하다’ ‘혹은 증명하다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시 한 번 문제의 본질을 규명해 사울을 설득시키며 사울의 진심을 안 후에 이를 다윗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4, 5: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들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위하여 아버지에게 호소했습니다. 다윗은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것과 그의 공적을 상기시키고, 그 당시에 사울의 기쁨이 어떠했던가를 말한 후에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설득을 한 것입니다. ‘포장하여(토브: טוב)’선하게’ ‘좋게’ ‘이야기했다는 뜻입니다. ‘범죄치 마옵소서(하타: חטא)’는 구약 성경에서 580회 가량 쓰였으며 죄를 가리키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기본적인 의미는 표적을 놓치다또는 길을 잃어버리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이처럼 표적을 잃은 행위이며 얻을 것이 없는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에게 혐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이어 5절에서 다윗에게 혐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의 문자적인 번역은 ‘(그가 블레셋 사람을 죽였을 때에) 그의 생명을 그의 손 안에 두었다.’입니다. 이것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다윗은 손에 물매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회상시키는 것입니다. 골리앗은 280cm가 넘는 거인이요, 용사이며 칼과 창으로 중무장을 했지만 다윗의 손에는 물매와 막대기가 있었을 뿐인데, 이것은 생명을 자기의 손에 있는 물매에만 맡길 만큼 그가 하나님을 의지한 자며 나라의 충신임을 보여줍니다. 요나단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과 당시 사울의 심정을 회상시킴으로써 사울의 양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

요나단의 진실한 간청을 들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사울은 비록 악신에 사로잡힌 자로서 악을 획책하는 자이지만 아직도 그 안에는 선한 열매가 맺혀질 수 있는 고귀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맹세하되(솨바: שׁבע)’는 원래 일곱 번 말하다란 의미로서 서약함으로 반드시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이 특히 재귀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어, 맹세로 자기 자신을 묶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맹세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알게 하고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여전히 있으니라.

다윗이 예전처럼 천부장으로 또 사울의 악사로 계속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8-17: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미갈을 통하여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또 다시 승리하자 다시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이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집으로 피신하자 사울이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하지만 미갈이 지혜롭게 다윗을 도주시켰습니다. 사실 미갈은 사울이 다윗을 올무에 걸리게 만들기 위하여 다윗에게 준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도리어 그 딸로 말미암아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어떤 인간의 악한 계획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앞에서는 헛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까지도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에는 다윗이 환난 중에 기도하였다는 것에 대한 응답의 결과이기도 합니다(59:1-11). 

 

 

8: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매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니라.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엘라 골짜기 전투(삼상 17) 이후에도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습니다(삼상 18:30). 그럴 때마다 다윗은 천부장의 임무를 맡은 자로서 블레셋을 격퇴시켜 이스라엘을 크고 작은 위기에서 구원하였습니다. ‘크게 도륙하매의 본 뜻은 적에게 큰 손실을 안겨 주다.’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말합니다. 이 같은 다윗의 용맹이 백성들에게는 큰 위안과 자랑이 되지만, 사울에게는 질투와 시기를 가중시키게 되었습니다.


 

9,10: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

요나단의 중재로 사울과 다윗은 얼마 동안 화해를 하였으나, 블레셋과 전쟁에서 다윗이 큰 승리를 거두자 사울에게 시기심이 폭발하여 광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본 문은 사울의 첫 살인 미수 사건(삼상 18:10)과 유사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다윗 살해 미수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신에 의한 것임이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지금가지 다윗을 살해하려는 사울의 흉계는 질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만큼 사울에게는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의 폭이 점점 더 줄어든 것입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보고도 그를 이해하고 그의 정신 질환 치료를 위해 수금을 타는 사랑과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는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죄의 종이 된 자의 사악한 모습과 의의 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두 보습을 본 문은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11,12: 사울이 사자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그를 지키다가 아침에 그를 죽이게 하려 한지라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에게 일러 가로되 당신이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미갈이 다윗을 창에서 달아 내리우매 그가 도망하여 피하니라.

이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한 모두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가운데 공공연하게 군사를 보내어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악한 마음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살해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침에사울은 군사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밤새 지켜보다가 아침에 죽리라고 하였습니다. 미갈은 남편의 위험을 직감하고 다윗에게 이 밤에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면 내일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갈이 어떻게 이 상황을 파악하였는지 모르지만, 공주의 신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보망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고 직접 무장한 군사들이 집 근처에 있는 것을 목격하여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이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사랑하는 자녀를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살리기 위하여 미갈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13: 미갈이 우상을 취하여 침상에 뉘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을 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그것을 덮었더니

여기에서 우상은 드라빔입니다. 이 드라빔은 이교도들이 가정 수호신으로 섬기는 것이며 점을 치는 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삼상 15:23;왕하 23:24;21:21). 드라빔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31:19-21;21:21), 족장 시대로부터 포로기 이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드라빔의 크기는 안장 밑에 감출 수 있는 정도에서부터(31:34) 미갈이 다윗으로 위장할 수 있는 사람 크기의 것까지 다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1926년 누지(Nuzi)지방에서 발견된 서판에 의하면 드라빔은 단순한 가내 우상의 소유보다 한 씨족의 지도권을 결정했다는 점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유추하여 생각하면 미갈도 라헬과 마찬가지로 드라빔을 종교적인 목적이나 점술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 지위를 이어받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훔쳐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 신앙에 충실한 다윗이 이방 우상인 드라빔을 지니고 있었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염소 털로 엮은 것을미갈은 드라빔의 머리를 사람의 머리로 보이게 할 목적으로 염소 털로 엮은 것을 씌웠습니다. ‘의복은 넓은 천으로 온 몸을 둘렀던 상의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취침할 때 이것을 덮고 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14: 사울이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잡으려 하매 미갈이 가르되 그가 병들었느니라.

미갈은 아침에 되어 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우상으로 다윗어철 위장하여 그가 병들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다윗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사울의 군사들은 다윗을 반드시 죽이려고 생각했던 사울과는 달리 미갈의 말을 듣고 다윗을 끌어내지는 못할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15: 사울이 또 사자들을 보내어 다윗을 보라 하매 이르되 그를 침상 채 내게로 가져 오라 내가 그를 죽이리라.

사울은 다윗이 병들어 움직일 수 없다면 침상 채 들고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죽여야 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반역죄를 지은 것과 같은 범죄자로 간주하여 지체 없이 처단함으로써 후환을 없애려는 강렬한 욕망을 분출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처럼 자기의 하수인으로 하여금 악에 길히 빠져들게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된 성도는 반대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지 않으면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6,17: 사자들이 들어가 본즉 침상에 우상이 있고 염소 털로 엮은 것이 그 머리에 있었더라. 사울이 미갈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하였느냐 미갈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를 놓아 가게 하라 어찌하여 나로 너를 죽이게 하겠느냐 하더이다 하니라.

사울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은 방에 들어가 침상을 들고 나오려고 했습니다. 확인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병들어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임을 발견하고 사울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사울은 딸 미갈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당연히 추궁을 했을 것입니다. 미갈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놓아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런 인물은 결코 아니지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다윗을 도망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18-24: 무사히 도피한 다윗은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갔습니다. 이를 알게 된 사울은 세 차례에 걸쳐 자객을 보내어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환난 날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간 것 그 자체가 하나님께 의지하고자 하는 신앙입니다. 성도는 사단이 통치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우는 사자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기 위해 찾아다니는 사자들이 있기 때문에 안전한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피할 곳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나, 오직 여호와의 품은 유일한 성도의 피난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피하는 자를 반드시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91:9, 10).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고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거하였더라.

한 밤 중에 집에서 도망한 다윗은 그 길로 사무엘에게로 갔습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사무엘 외에는 달리 없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 위에 오를 것은 예언한 선지자이며 그에게 기름을 부운 당사자이라는 점에서 다윗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위험한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도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지에 대한 인도를 받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욧(נוית)’은 지역 명칭이 아니라 거처’ ‘처소를 의미합니다. 갈대아 역에서는 기숙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학생이 거하는 처소입니다. 추측해 보면 나욧은 사무엘이 그의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세운 선지 학교로 보입니다. 이곳에 모인 그의 제자들은 선지자 무리라고 불렸습니다.


19: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은 이미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선포를 하고 이스라엘 전지역에 이미 다윗의 소재 파악을 명령해 놓은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다윗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다윗의 소재는 즉시 사울에게 보고가 된 것입니다.

 

 

20,21: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 고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사울이 공개적으로 다윗을 잡으려는 두 번째 시도입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울은 사자들을 그곳으로 급파했습니다. 그런데 사자들이 라마 나욧에 이르러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도 임하여 같이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에 사울은 또 다시 2, 3차 사자들을 보냈지만 동일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예언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신에 의하여 사울의 암살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해 주시기 위한 초자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선지자 무리는 라마에서 사무엘이 지도하던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공공건물(나욧)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이 선지자 무리의 역사에 대하여서는 불분명하지만 삼상 3:1을 보면 사무엘이 어린 아이였던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그 때까지는 아직 선지자 무리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므로 사무엘이 선지자 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무리가 또 다시 성경에 언급되는 것은 선지자들의 생도’(왕상 20:35)로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였습니다. 이 선지자의 무리가 등장한 것은 아마도 시대적 상황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의 말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발전에 있어서 전환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소명을 받은 직후 제사장들의 타락으로 더럽혀진 성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겼고,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에게 종교적 생호라을 영위할 새로운 집을 건설하라는 임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은 영적인 사람들을 모아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교훈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가 만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녀들을 위하여 선지자를 일으키심으로써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우상숭배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수령으로 선 것을즉 사무엘이 지도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세구에 있는 큰 우물’ ‘세구망대라는 뜻으로서 라마 북쪽 4.8km 지점에 우치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원문에는 큰 우물앞에 정관서 ה’()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하여 3차례나 사자(군병)들을 보냈지만 실패하자 직접 자신이 라마 나욧으로 출동을 하였습니다. 사울은 라마 나욧에 도착하기도 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24: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울은 라마 나욧에 도착한 후에는 옷까지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해석할 때에 사울이 왕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상징합니다. ‘벌거벗은은 완전 나체를 의미하지는 않고 상반신 탈의로 가리킵니다(20:2;1:8;21:7). 사울과 그가 보낸 사자들이 모두 함께 사무엘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런 영접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돌이키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사울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결국 돌이키지 못하고 계속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로 안전하였고 결국 왕위에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은 다윗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바로 이런 점을 성도는 주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생활, 즉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앙생활을 하여도 이런 시련과 고통은 반드시 찾아오고 이런 것들을 이겨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입을 수 있는 것임을 믿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제19장 강해.hwp
0.06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