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 제20장 강해: 다윗의 본격적 도피 생활의 시작

chukang 2018. 8. 25. 23:11

사무엘상 제20장 강해: 다윗의 본격적 도피 생활의 시작

 

18장부터 20장까지는 사울의 정치적 음모 및 다윗을 살해 시도가 여러 차례 이루어지게 되며 결국 다윗은 본격적으로 도피 생활로 연결이 됩니다. 이스라엘 신정 왕국의 초대 왕으로 선택을 받은 사울은 신본주의적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여 결국 그 왕위의 폐지를 선고 받게 되고, 신정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된 다윗을 부당하게 핍박하게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결코 스스로의 생각이나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단과 세상의 그리스도와 성도에 대한 핍박과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라는 전 국속사적 현상을 극명하게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다윗은 근 10여 년간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 장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흐름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사울의 살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상호 보호 언약을 맺기도 하며, 사울의 움직임에 대하여 요나단은 다윗에게 알려주기 위한 계획도 세웁니다. 둘은 사울의 살해 의지가 확고해 진 것을 확인 한 후에 이별을 하고 10여 년 간의 도피 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실 요나단은 다윗을 제거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윗을 사울의 살해음모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요나단은 신본주의적 믿음이 확고하였고, 다윗의 의로움과 같은 요소들로 인하여 깊은 우정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아닌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마음의 움직임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이 아니더라도 다윗을 왕이 되도록 보호하셨겠지만, 요나단의 이러한 의로운 행위는 다윗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구속사의 한 기둥으로 세워질 수 있는 큰 도움을 준 것입니다. 이는 비록 구속사에서는 큰 역할을 맡지 못했지만 올바른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돕는 것은 결국 구속사에 동참하는 길이며 큰 영광을 함께 받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1-11: 사울이 다윗을 살해의도가 심각해짐에 따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사울의 위협을 피하여 라마로 도망한 다윗은 그곳에서 나와 요나단을 찾아가 자신의 위급함을 고하며,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요나단이 협조해 주기를 요청하는데, 요나단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의 맡은 직분에 대하여 충실했습니다. 사울에게 살해를 당할 뻔한 고비를 넘기고서도 그의 정신 질환을 위해 악기 연주를 계속했고, 군장으로서의 임무도 계속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더욱 심해지는 살해 위협은 마침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 옆에 있는 것이 매우 위험한 것임을 깨닫고 당분간 다른 곳에 가 잇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도피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단순히 정신 질환으로 자신을 해치려 한다면, 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다면, 그의 도피는 단순한 오해가 되고 불충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가 사울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알게 해 주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으므로 사울의 본심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그의 우정이 진실함을 다시 한 번 입증하였습니다. 물론 요나단이 다윗에 대한 우정은 이성이 결핍된 맹목적인 감정이나 애정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가 단순히 다윗의 인물됨만을 보고 우정을 나누었다면 그의 우정은 지극히 인본적인 것에 불과했을 것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돌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우정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알았고, 자신을 통하여 다윗을 돕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런 하나님의 뜻을 좇아 다윗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 위에서 우정이 맺어질 때에 인간적인 사랑이나 세상적인 사랑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아가페 적인 사랑에 근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와서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사울을 피하여 라마 나욧에 있던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네 차례에 걸친 시도는 모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삼상 19:18-24). 하나님의 신이 사울과 그의 부하들에게 임하여 예언을 하게 함으로써 다윗을 붙잡지 못하게 하셨고, 다윗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사울의 왕궁이 있는 기브아로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기브아로 간 것은 자신의 진실한 친구가 된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으로 돌아와 친구인 요나단에게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다윗을 두둔하며 보호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19:1-7). 그런데 이번 라마 나욧 사건은 요나단이 모르고 있었습니다(3). 그래서 다윗은 삼중적인 질문으로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 자신은 아무 죄도 없는데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요나단이 깨닫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당시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이미 바꾸었으며, 또 다시 그러한 계획을 꾸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대체 나의 죄가 무엇이기에 내 생명을 취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나에게는 전혀 죽임을 당할만한 죄가 없다는 항변이 들어 있습니다. ‘찾느뇨(메바케쉬: מבקשׁ)’는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는 분사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의 진행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울이 끊임없이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함을 말합니다.

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다윗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요나단은 세 개의 부정어를 사용하여 대답하였습니다. ‘결단코 아니라강한 부정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요나단이 이 번 사건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에 한 번 자신이 다윗을 변호할 때에 아버지 사울이 맹세하여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9:1-7). 지금까지는 거의 모든 일들을 아들 요나단과 상의해 왔습니다. 이는 사울이 보기에도 요난단이 지혜롭고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다윗에 대한 극심한 증오나 살해 의지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로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명분도 없으며 스스로의 이성으로도 옳은 일이 아니라는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요나단은 다윗의 말에 강하게 부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부친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 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으로 맹세하오니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요나단은 사울의 상태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심령을 깊숙이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에게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들을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 맹세하여이 말은 앞선 맹세에 이어 두 번째의 어떤 엄숙한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거듭 맹세하는 것은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동시에 생명의 위급함에 대한 상황을 요나단이 반드시 알아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요나단은 이제 다윗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여 다윗을 도와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원수의 아들을 찾아가는 다윗도, 또한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다윗을 도와주겠다는 요나단의 마음도 모두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붙들린바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5: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 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월삭은 한 달의 시작을 가리키며 새로운 달(new moon)'을 가리킵니다. 월삭을 지키는 것은 모든 첫 번째 것은 여호와의 것이므로 마땅히 봉헌해야 함을 기념하기 위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날입니다. 이런 종교적 행사 후에 가족들끼리 모여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식사를 하였습니다(10:10;28:11-15). 월삭 기념 식사는 그날이 시작하는 저녁 식사와 그 날을 다 보내는 저녁 식사 두 번에 걸쳐 행해졌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월삭 하루 전날로부터 제 삼일, 즉 월삭 기념 식사가 마치는 시점까지는 왕의 심경을 알 수 있는 시간으로 제시하였습니다.

 

6: 네 부친이 만일 나를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온 가족은 이새의 가족을 뜻하고, 매년제는 가족 단위로 유월절, 칠칠절, 수장절 중 하나를 택하여 매년 1차례씩 드리던 제사입니다. 다윗이 이런 제사에 참석하여야 한다고 내세운 것은 사울의 월삭 식사에 불참하는 명분이 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여건을 조성하여 사울의 심중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7: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심중이 어떠한지 알아 볼 수 있는 제안에 대하여 만약 사울이 그의 말이 좋다.’고 하면 다윗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것이며, 죽이려는 태도가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달리 그가 노하면악한 마음이 계속 그 속에 있어서 다윗을 죽이려는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라마 나욧에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후에 혹시나 변화된 양상을 보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8: 그런즉 원컨대 네 종에게 인자히 행하라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거든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부친에게로 데려갈 것이 무엇이뇨

인자히 행하라는 말은 상대방과 맺은 언약을 진실하게 이행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울이 다윗의 월삭 식사 불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반응할 경우에는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기에 요나단에게 우정의 언약(삼상 18:3)을 진실하게 이행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너와 맹약케이 말은 다윗이 요나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이 우정의 언약 주체자가 요나단 자신이었고(삼상 18:3, 4)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당사자는 반드시 그것을 이행하여야만 한다는 규례(23:21; 5:4)을 다윗은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근거로 요나단에게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다윗은 또 요나단에게 너도 나에게 죄악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나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매사에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자는 어떠한 환경 아래에서도 떳떳하고 담대한 신앙을 표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9: 요나단이 가로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있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요나단은 다윗에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다윗을 죽이거나 사울에게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나단이 다윗과의 신실한 우정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10: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부친이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혹 엄하게 대답하면다윗의 이 말은 요나단이 그의 부친 사울에게 다윗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사울의 심중을 알아보기 위한 질문에 대하여 사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엄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사울이 아직도 다윗에 대한 살의가 있음을 뜻합니다. ‘누가 그것을 내게 고하겠느냐?’ 이렇게 되면 비록 사울의 심중을 알게 되었더라도 사울의 살해 위협과 방해 때문에 요나단이 위험에 빠진 상황에서 누가 그 뜻을 내게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11: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요나단은 다윗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들로 나갈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에서의 은 사울 왕궁 근처에 있는 들판입니다. 요나단이 이 같은 제안을 한 것을 첫째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거나 혹시 엿듣는 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하는 자세이며, 둘째 둘만의 시간을 가져 요나단 자신이 사울의 의중을 파악하여 어떻게 다윗에게 알릴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12-23: 거듭되는 사울의 살해 위협 속에 다윗은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요나단은 다윗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에게 자비를 구하며 다윗의 요청에 대하여 방도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나단의 모습은 명예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겸손함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고자 하는 신앙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요나단은 이미 아버지인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으로 빠진 것과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만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훗날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요나단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이 큰 도움을 다윗은 결코 잊지 않고 왕이 되었을 때에 그의 가족과 후손들을 구해 주는 것으로 보답하였습니다.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부친을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보내어 네게 알게 하지 않겠느냐

다윗의 제안에 대답하기 전에 요나단은 자신의 약속과 맹세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셨습니다. 요난단 자신의 맹세에 대한 신실함의 증인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그러나 만일 내 부친이 너를 해하려 하거늘 내가 이 일을 네게 알게 하여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다윗에 요청에 대하여 요나단이 맹세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다윗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중단이 되고 사울이 다윗과 화해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기의 부하를 보내어(12) 그 소식을 알릴 것이고, 반대로 사울의 음모가 계속되면 요나단 자신이 직접 그 소식을 전해서 다윗을 도망하게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언약을 어길 경우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요나단 자신에게 임할 것을 말합니다. 요나단의 이 같은 말은 동물을 죽여 둘로 갈라 사람이 그 사이로 지나하게 하는 히브리인들의 언약 체결의 풍습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약을 어기면 그 동물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이 언약 당사자도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5:9, 10)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모든 복의 근원임을 보여줍니다. “내 부친과 함께 하신(하야: היה)”너와 함께 하시기를(하야: היה)”을 살펴보면 히브리어에서는 모두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사울에게 사용된 것은 완료형입니다. 즉 과거에는 있었으나 현재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사용한 것은 미완료형입니다. 즉 앞으로도 계속 있게 되기를 기원한 것입니다.

 

14: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8절에서 다윗이 요나단에게 인자하게 행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오히려 인자를 내게 베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인자(헤세드: חסד)는 친절, 인자, 자비, 사랑, 충성, 꾸준한 사랑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로서 다윗을 체포하여 그 아비에게 넘겨주어 왕권을 견고히 하여 다음에 승계 받을 수 있었지만, 요나단 자신이 다윗에게 자비의 요청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사울과 다윗에게 장차 발생할 일, 곧 사울과 그의 집이 몰락하고 다윗이 장차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왕가의 패망은 곧 일가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요나단이 성령의 감동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장차 왕이 되었을 때, 원수들을 모두 멸망시킨다고 할지라도 요나단 자신의 가계만은 특별히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요나단의 솔직한 본능적 표현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후일에 이 약속을 지켜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자처럼 대접하였습니다(삼하 9:9-13).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였는데, 첫째는 자신에게 인자를 베풀 것, 그리고 둘째는 자신의 집에 인자를 영원히 베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나단과 다윗은 둘 사이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이행을 다짐하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여기서 다윗의 대적은 요나단의 아버지인 사울을 비롯하여 다윗의 생명을 노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치실지어다’(바카쉬: בקשׁ)는 찾기를 원한다.’ ‘요구하시기를 바란다.’입니다. 즉 다윗의 원수들에게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NIV에서는 ‘May the Lord call Devid's enemies to account.'(책망하시는 것을 원하다. 책임을 추궁하기를 원한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부자지간의 혈연적 정에 얽매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17: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이 다윗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고, 다우시은 후일 요나단의 후손을 돌볼 것을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맹세를 쌍방 중 어느 한쪽이라도 지키지 아니할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했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동성애라고 착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우정이 사랑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우정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으며 또 가장 어렵고 절망 속에 있을 때에도 변함없이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우정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바탕 위에서만 맺어질 수 있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18,19: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게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너는 사흘을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평소 식사 자리는 형편에 따라 참석여부가 갈려질 수 있지만, 월삭과 같은 절기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했습니다. 또 한 번 정도 빠지는 것은 용납이 될 수 있었지만 계속하여 빠지게 되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한 것이었습니다. ‘사흘을 있다가3일에라는 뜻입니다. 이 날은 월삭 절기가 끝난 다음 날입니다.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은 과거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널리 명령했을 때 다윗이 숨어 있었던 곳(삼상 19:1-3)을 말합니다. 사울 궁전 근처의 은밀한 들판을 뜻합니다. ‘에셀 바위’ ‘에셀출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아마도 길의 방향 표시를 위한 표지판 역할을 한 바위인 것 같습니다.

 

20-22: 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살 셋을 그 곁에 쏘고, 아이를 보내어 가서 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 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 편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요나단과 다윗 사이에 정보 전달 방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화살 세 개를 다윗 곁에 쏘고, 아이를 보내어 살을 주어오게 할 때에 요나단의 말에 의해 상황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화살이 네 이편에있다고 하면 다윗이 안심할 상황이고, ’네 앞 편에 있다.‘고 하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니 빨리 피하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을 택한 것은 혹시라도 요나단 자신이 다윗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경우를 대비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나아르: נער)‘는 요나단이 항상 데리고 다니면 여러 가지 일을 시키는 시종 혹은 병기 든 자를 가리킵니다. ’네 길을 가라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상황가지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요나단의 신앙이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켜 주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요나단은 이 약속의 확실함과 진실 됨을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라는 말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23: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영토록 계시느니라.

요나단은 다윗과의 사이에 언약이 결코 변치 않을 것임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재확인하였습니다. ‘너와 내가 말한 일이란 단지 사울의 의중을 다윗에게 전달하는 방법 뿐 아니라,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우정의 확인도 포함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계신다.’는 것은 우리 둘 중의 하나가 맹세를 깨뜨릴 때에 하나님께서 증인과 심판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NIV에서는 “the Lord is witness between you and me forever."(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영원한 증인이다.)로 번역했습니다.

 

24-42: 이 단락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 한 직접적인 동기가 처음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왕위가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일찍이 자신의 왕권이 박탈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지위가 넘겨지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바 있었습니다(삼상 15:26-29). 그리고 그는 다윗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차기 왕이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삼상 18: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다윗만 제거하면 그의 왕권이 지켜지리라고 인본주의적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어리석고 우매한 인간의 생각은 다윗을 살해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4, 25: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았고 요나단은 섰고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았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으나

당시 어전 식사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왕과 그리고 왕의 사촌과 사위였습니다. 이들은 왕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며 당시 이스라엘 군사, 행정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던 주요 인사였습니다. 월삭이 되어 사울은 언제나 벽 곁 자기 자리에즉 윗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자리는 가장 높은 귀빈석으로 오늘날에도 동양에서는 문의 맞은편에 위치한 안쪽 좌석이 상석으로 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섰고이는 요나단이 왜 서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다윗에 대한 사울의 생각으로 인한 불안감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26: 그러나 그 날에는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니 이는 생각하기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서 부정한가 보다 정녕히 부정한가보다 하였음이더니

부정한가보다사울은 다윗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부정한 일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모세 율법 상 부정한 행위는, 부정한 동물을 먹거나 만지는 것(11; 14:3-20), 자연사한 주검과 접촉하는 것(19:11;11:4-8), 금지된 성행위(18) 등이 있습니다. 당시 월삭 의식은 종교적인 행사였으므로 이런 부정한 행위를 한 사람은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부 정한 채로 성회에 참석할 수 없어서 불참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27: 이튿날 곧 달의 제 이 일에도 다윗의 자리가 오히려 비었으므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에게 묻되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뇨

식사 첫 날은 다윗이 부정해서 불참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부정한 것은 하루가 지나면 정결케 되기 때문에 또 다시 보이지 않자 요나단에게 질문을 시작하였습니다.

 

28, 29: 요나단이 사울에게 대답하되 다윗이 내게 베들레헴으로 가기를 간청하여, 가로되 청컨대 나로 가게 하라 우리 가족이 그 성에서 제사할 일이 있으므로 나의 형이 내게 오기를 명하였으니 내가 네게 사랑을 받거든 나로 가서 내 형들을 보게 하라 하였으므로 그가 왕의 식사 자리에 오지 아니하였나이다.

요나단은 다윗이 제안한 대로 다윗의 불참 이유를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의중을 떠 보려는 것으로, 당시 다윗은 에셀 바위 근처에 숨어 있었습니다.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생의 아들을 태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월삭 식사 시간을 통하여 다윗을 죽일 또 한 번의 기회를 잃은 사울은 요나단에게 크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패역 부도의 계집의 소생아이는 사악하고 반항적이며 배타적인 여자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자기 아들 요나단에게 한 욕설입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들먹이며 욕하는 것은 극도의 증오와 분노입니다. 사울은 지금 다윗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 더욱 더 가득 찼고, 자기 아들에게 그토록 흉악한 욕설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악령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요나단은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다윗과 가까이 지내는 것, 즉 요나단이 다윗과 친구로서 다윗의 편에 서서 행동했던 것을 사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요나단은 사울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되었지만 우일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로서 왕위에 올랐고,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켜 그의 가족들을 돌봐주었습니다. ‘네 어머니의 벌거벗은 수치’ ‘어미가 그런 아들을 낳은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뜻입니다. 실상은 이런 말을 한 사울 자신이 역사의 부끄러운 자였고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며 우정과 의리가 깊은 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사울의 왕권이 다윗으로 말미암아 요나단에게 계승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이렇게 말을 하여 그로 하여금 이기심을 부추키어 자신의 계책에 동참하게 하려한 것입니다. 이는 차기 왕권이 이미 다윗에게 이어질 것을 알면서도(삼상 8:12;23:17) 이렇게 말을 하고 요나단에게까지 획책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하나님께 대한 적대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자는 사울과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삼상 31:2-6)

 

32: 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요나단은 자기 부친 사울이 격노하며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자,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답답한 마음과 화도 나는 가운데 아버지 사울에게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악령의 강한 역사로 말미암아 요나단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33: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한지라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

아무 죄도 없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잘못에 항변하는 요나단을 사울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우리에게 인간의 사악한 모습과 혈기가 사리분별은 물론 자식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 죄성(罪性)과 악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34: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달의 제 이 일에는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심히 노하여를 원본대로 번역하면 분노의 열기 속에서라는 뜻입니다. 죄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에 대한 요나단의 의로운 분노입니다. 요나단의 분노는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는데 있다기보다는 의로운 다윗을 해치려는 사울의 불의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에게 는 불의에 대한 의연한 대처와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악한 영혼은 성도까지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려고 혈안이 되어 찾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35: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월삭 식사가 이틀 동안에 끝나고 다음 날인 제3일에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나단이 들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요나단은 제2일에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다윗의 위기 상황을 걱정하며 다윗을 만나러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알려줍니다. 그만큼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할 때에 마귀는 더 강하게 역사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36: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나의 쏘는 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요나단은 화살을 그 아이가 간 지점보다 더 멀리 쏘았습니다. 이것은 지금 다윗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약속된 것입니다. 화살이 네 앞 편에 있다.’(22)는 말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상황은 위급하니 다윗으로 하여금 도망하라는 알림이었습니다.

 

38, 39: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요나단이 아이에게 이처럼 말한 이유는 아이가 숲 속에 숨어 있는 다윗을 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다윗에게 임한 현재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빨리 피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모든 악한 상황을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40: 요나단이 그 병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으로 가라.

요나단은 아이에게 병기 곧 활, 화살, 화살통 등을 주고 그에게 사울의 궁성으로 들어갈 명령했습니다. 당시 이 같은 주인의 명에 따라 홀로 돌아가는 것은 흔히 잇는 일이었으므로, 그 아이는 아무 의심 없이 돌아갔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아이를 이처럼 먼저 보낸 것은 다윗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41: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다윗은 요나단을 향하여 왕에게 하는 것처럼(삼하 9:6;14:33)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였습니다. 이것은 형식적인 예우가 아니라 위기의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였습니다. 이들은 같이 울었습니다.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는데 앞으로 닥쳐올 시련도 시련이지만 당장에는 그토록 절친했던 친구인 요나단과 기약도 없는 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또 가정을 뒤로 떠나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와, 사울 왕과 원수가 되어 도망해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서러움이 북받쳤을까요.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평안히 가라.’ 요나단의 작별 인사입니다. ‘평안(샬롬: שׁלום)’이라는 작별 인사는 다윗이 안전과 평강을 빌어주는 기도와 같은 심정으로 인사한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은 이미 앞에서도 밝혔듯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윗을 지키시며 보호해 주시고 왕위에 올리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인 사울의 앞날도 걱정이 되고, 또 자신의 처지도 괴롭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날이 너무나 확실하게 보이는 요나단은 도망하는 다윗에게 재차 나와 너’, ‘내 자손과 네 자손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약속한 내용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하고, 요나단은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다윗과 요나단은 단 한 번의 기쁨의 재회를 하게 됩니다(삼상 23:16-18). 다윗은 기브아(삼상 19:8-17)에서 도피하여 라마(삼상 19:18) (삼상 21:1) 가드(삼상 20:10) 아둘람 굴(삼상 22:1)로 심히 괴로운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