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 제18장 강해: 사울의 다윗 살해 음모

chukang 2018. 6. 17. 22:50

사무엘상 제18장 강해: 사울의 다윗 살해 음모

 

18~20장까지 3장은 사울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만 연연하여 하나님의 택한 자이면서 또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다윗을 시기하고 더 나아가서는 살해하려는 음모를 수차례 자행하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사무엘하 1장까지 이 기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기록들을 통하여 저자가 하고 싶은 내용을 축약해 보면, 첫째 사울은 신정 왕국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신본주의적 자세를 갖지 못하여 결국 그 왕위의 폐지를 예고 받았는데, 신정 왕국의 새 왕으로 세움을 받은 다윗을 부당하게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윗은 사울의 부당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생각이나 힘으로만 대항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다윗에 대한 핍박과 이에 대한 다윗의 대응은 영적으로 볼 때에 사단과 세상이 그리스도와 성도에 대한 핍박과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라는 구속사의 현상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1-5: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다윗이 특별한 우정 관계가 되지만 점차 사울의 시기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우정은 진실한 우정이 어떠한 것인가를 너무나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요난단이야말로 다윗을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그가 이어 받아야 할 왕위를 대신 차지할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언약을 맺었다는 것은 요나단의 성숙한 신앙과 인격을 잘 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람을 기뻐했을 뿐, 왕의 자리와 같이 세속적인 일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진실한 자세라고 하겠습니다(3:8). 우리는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우정을 통하여 진실한 우정이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철저히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18:24).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진정한 친구이십니다(13:1; 15:13-15).

 

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블레셋과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에 시작된 다윗과 사울의 대화가 끝이 났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초월적인 우정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마음’ ‘자기 생명이 단어는 네페쉬(נפשׁ)’로 이는 생명영혼‘ ’피조물‘ ’사람‘ ’마음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명사는 구약에서 755회나 사용이 되었습니다. ’연락되어묶다‘ ’공모하다는 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무엇인가에 묶거나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적용이 되는데, 긍정적으로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다는 의미와(44:30;삼상 18:1), 부정적으로는 나쁜 일을 공모하느라고 뭉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왕상 16:9).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다윗과 요나단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는 쇠사슬로 굳게 묶어 그 우정을 끊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을 지시하며 피차가 꼭 같이 깊은 내면에서 일어난 생각인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블레셋과의 전투 후에 사율이 약속했던 것처럼(삼상 14:52), 다윗을 궁중의 악사(삼상 10:23)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의 보호와 통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신하로서 사울 곁에 있게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의 곁에서 왕의 역할에 관하여 배우고, 앞으로의 통치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에 궁중의 악사로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과는 달리 이제 궁중에 오랫동안 있어야 할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의 통치를 보필하게 된 것은 앞으로 다윗을 들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기 위해 궁중의 법도를 배우며 정치적인 감각을 익히는 계기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본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요나단이 다윗과 함께 언약을 맺었다. 왜냐하면 그를 그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요나단이 맺은 언약은 우정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단어가 1절에서 3번이나 쓰였고 이 구절에서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명과 같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처럼으로 번역됩니다. 둘이 맺은 사랑과 우정의 언약은 신실하게 지켜졌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를 변호해 주며(삼상 19:5)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비밀 정보도 제공해 주었습니다(삼상 20:1-23). 다윗도 요나단이 죽었을 때 슬퍼하며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 중에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삼하 1:26)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과 다윗의 서로 위해 주는 사랑의 우정은 이기적인 삶만을 영위해 나가려는 현대 교회의 모습에 귀감이 됩니다(고전 13:4,5; 딤후 3:2).

 

4: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은 왕자의 신분으로 일개 목동이었던 다윗과 평등한 언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언약의 징표로 자신의 겉옷을 주었습니다. 겉옷은 덮는다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상류층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입었던 옷입니다. 다윗이 받은 옷은 왕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시려는 하나님의 숨겨진 암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군복과 칼과 활과 띠는 군장 일체입니다. 고대 용사들은 상대를 높이거나 자신의 생명을 상대방에게 의탁한다는 표로 이와 같이 자신의 무기를 주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신분과 목숨의 상징물까지 증여할 정도로 깊이 신뢰한 것입니다.

 

5-16: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 떠난 사울의 상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과 사단의 지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더 나은 자를 시기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는 자기 위치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것 같으면 즉시 제거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당연히 사단의 즐겨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5: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지혜롭게 행하매는 본 장에서 4번이나 나올 정도로 다윗이 정치, 군사, 행정적으로 뛰어났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칼(שׁכל)인데 현명하다’ ‘이해하다’ ‘번영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모든 백성과 신하들도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즉 야타브(יטב) ‘좋다’ ‘기쁘다’ ‘만족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백성의 눈과 신하들의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성공하자 사울이 그를 군대의 지휘자로 삼았고, 이 일이 백성들과 신하들의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각을 시키는 것입니다.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무리가 전쟁에서 다윗과 함께 돌아왔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다윗이 돌아 온 것은 그가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에게 돌아온 것과는 다른 때로, 엘라 골짜기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를 완전히 패주시킨 후의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 진행될 때 사울이 다윗에게 군대 장관의 직을 주었다는 것과, 블레셋 징벌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백성들이 다윗에게 보여 준 찬사에 사울이 증오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모순이 없습니다. ‘소고는 일반적으로 탬버린(tambourine, timbrel)으로 번역합니다. 고대의 가장 일반적인 타악기로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작은 북들의 형태와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고 있습니다. 이 악기는 주로 여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는데, 기쁨을 표현하고(31:27;삼하 6:5; 대상 13:8;21:12;5:12;24:8;31:4)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15:20;11:34;삼상 18:6;30:32) 특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경쇠(솰리쉼: שׁלישׁים)’은 삼각형이거나 세 개의 막대기가 있는 악기이거나 세 줄이 달린 삼현 악기 등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KJV에서는 단순히 음악 기구’(instruments of music)로 번역했고, NIV에서는 현악기인 루우트(lutes)'fh 번역하고 있습니다.

 

7: 여인들도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로다 한지라.

예상 외의 큰 승리에 대해 이스라엘 여인들이 기쁨에 겨워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서로 교대하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창화하다(아나: ענה)’는 말은 대답하다란 문자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인들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노래를 이어 받아 계속 노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승리를 아주 위대하게 본 것입니다. 이처럼 무명의 목동이 민족의 영웅이 되고 민심이 다윗에게 쏠린 것은 자연스럽게 왕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 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 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여인들의 노래 소리를 들은 사울이 다윗에게 자기보다 더 큰 명예를 돌리는 것에 대해 대단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불쾌하여(: רע)’불쾌하게 하다’ ‘해롭게 하다에서부터 나쁘다또는 악하다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의 영역이 넓다고 합니다. 이 어근은 빈번히 ‘~이 보기에라는 공식 문구와 함께 사용이 됩니다. 여기에서도 그의 눈에또는 그의 보기에라는 말이 있는데 개역 성경에서는 생략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은 여인의 노래를 듣고 자기 위주의 판단으로 마음에 온갖 악한 생각을 품은 것입니다. 노하여(하라: חרה)’불타다’ ‘(분노가) 타오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사울의 마음 한 구석에 다윗을 시기하는 질투의 싹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사울의 이러한 투기는 결국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까지 이르게 됩니다(삼상 19:1).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27:4)’라는 구절이 바로 사울에게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여인들의 노래 소리를 들은 사울이 혼자서 중얼거린 말입니다. 문자적인 뜻은 나라 밖에 그에게는 없다.’입니다. 다음번에는 저들이 다윗을 자기들의 왕으로 세우겠구나.’(현대인의 성경 번역본)라는 뜻이 됩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이를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로 번역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그의 왕국을 정복하려는 정복자가 다가와 서 있는 중요한 시기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괴감과, 과거 사무엘이 선언한 왕위 폐위에 대한 생각이(삼상 13:14; 15:28) 새삼 떠올라서 더욱 심란했을 것입니다.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의심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기와 증오에 찬 질투의 시선으로 그를 관찰하며 견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0: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하나님의 악신이며 원문에는 부리신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16:14에서는 부리신(메에트: מאת)’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악신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의 단축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악신은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악한 능력을 말합니다. 이 영은 여호와의 영 대신에 임했는데 그에게 선언된 폐위로 내적 사기 저하는 물론 그것이 점점 우울증으로 발전되었고 때때로 정신 이상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힘 있게 내리매(찰라흐: צלח)’ 이것은 불같이 임하는’ ‘밀고 나아가는의 뜻입니다. 이는 초자연적인 악령이 사울을 그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사로잡는 상태입니다. ‘야료하는(이트나베: יתנבא)’는 예언하다는 뜻으로, KJV에서는 예언하다(prophesied)'로 번역을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정상적인 예언을 뜻하지 않고 헛소리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예언이 아니라 예언을 모방한 어투로 말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울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분노해서 소리를 지르며 화인을 저주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에게 내적인 번민과 혼란의 상태가 다시 시작되고 다윗을 향한 질투심과 분노로 이것이 더욱 고조되었던 것입니다.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과거 사울이 악신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다윗의 수금으로 나을 수 있었으나(삼상 16:23), 지금은 악신이 힘 있게 내리고또 다윗에 대한 강한 질투심으로 오히려 더 큰 광기가 일어났습니다. ‘던지다’(: טול)는 주로 던지다로 번역이 되나 찌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던지거나 찌르는 행위로 다윗을 죽이려 했으나 다윗은 전혀 대항치 않음으로써 사울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이런 표현은 다윗이 고난 가운데서도 온유하며 지혜로울 수 있었던 까닭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신이 임한 정도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으로 표현될 정도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권능을 힘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전에는 왕권 경쟁자로 질투를 했으나 이제부터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워하다(야레: ירא)’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자신과는 비교될 수 없는 신적 존재에 대한 지..의의 전인적 경외감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로부터 버림받은 사울은 영적 공허감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심한 공포감을 느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사울은 다윗을 변방으로 보내어 자기 자신의 왕권 유지는 물론 다윗이 전쟁 중에 죽기를 바라고, 다른 상류층들에게 탁월한 다윗의 정치적 능력이 보이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14: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이 구절을 번역해 보면 그리고 다윗이 모든 길에 형통하였으며(성공적이었으며)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의 직역을 모든 길입니다. ‘은 비유적 표현으로 다윗의 행위와 행동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는 표현이 다윗의 성공의 원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다윗의 모든 길이 형통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이러한 다윗의 형통함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성공과 사울의 두려움이 대조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15: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사울은 다윗의 매우 성공적인 것을 보고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니라는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말입니다. 성공은 지혜로운 행동의 결과입니다. 다윗의 하는 모든 행위가 형통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도 거기서 형통한 것과(39:2-22)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왕위가 바뀔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었습니다(삼상 15:23, 26, 28). 그래서 다윗을 보는 눈이 질투에 가득 차 있었고(삼상 18:9), 다윗의 지혜로움과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보고 위기감을 느겼던 것입니다.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 앞에서 들어오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15절과는 정반대의 묘사가 나옵니다. 사울의 두려움과 백성들의 사랑이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새로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보고 위기를 느끼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새로운 지도자의 군사적 능력과 행정력의 탁월한 솜씨를 보고 환영한 것입니다. ‘출입함은 백성들을 열심히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또한 백성들이 다윗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다윗을 하나님께서 선택한 그들의 다음 왕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보면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7-30: 앞 단락에서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한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였습니다. 이에 사울이 재차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이 음모는 혼인을 빙자하여 진행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딸 메랍을 다윗과의 결혼을 미끼로 하여 다윗을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음모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요구 조건을 거뜬하게 완수함으로써 사울의 사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그 이름이 더욱 귀중하게 여김을 받게 됩니다.

 

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이미 골리앗을 이겼을 때에 다윗이 취할 수 있었던 권리였습니다.(삼상 17:25) 그러나 당시까지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은 다윗에 대한 질투와 그의 연소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장했으며 백성의 존경을 받으므로 이 약속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럴 즈음 사울은 다윗에게 또 다른 조건을 제시하여 이 일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너는 나를 위하여고대 근동에서는 결혼하는 남자가 다른 가문의 장성한 여자를 아내로 데려올 때에는 그 대가로 많은 예물을 주어야 했습니다(24:53). 그러나 다윗의 경우에는 이미 골리앗을 죽임으로 그 의무를 완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또 다른 조건을 부여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응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싸움을 정적 다윗을 제거할 기회로 생각하면서도 명분만은 여호와의 싸움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사악한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사울은 이미 스스로 다윗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했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아 위험에 노출시켰으나 이 역시 실패했습니다. 이제 다윗이 자원하는 형식으로 위험한 적진에 가서 죽게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이처럼 대적 마귀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자를 각양각색의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제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8: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다윗은 자신의 소양이나 사회적 신분, 친족 관계로 보아 왕의 사위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며라는 질문은 자신의 신분이 보잘 것 없는 목동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내 친속이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무엇이관대역시 다윗이 속해 있던 사회적, 혈연적 관계을 가진 사람들이 귀족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의 뜻한 바는 그의 개인적 바탕으로나 사회적 신분으로나 그의 친속 관계로나 그는 왕의 사휘가 되는 명예를 얻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울이 자기 딸을 이용하여 다윗을 해치려는 의도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신문에 맞는 일을 하려는 다윗의 겸손한 태도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는 하나님께서 들 사용하신 기본적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4:6).

 

19: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사울이 맏딸을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는 의미보다는 맏딸을 다윗에게 줄 여건이 무르익은 시점이라는 뜻입니다. 사울이 요구한 블레셋 사람에 대한 전공을 세우고 또한 다윗의 나이 역시 결혼 적령기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킴으로써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이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증오심이나, 왕의 사위가 되려는 자가 제공한 많은 예물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인위적인 이 결혼은 사울 왕가의 몰락과 더불어 비극을 맞게 됩니다(삼하 21:8). 아드리엘은 바실래의 아들로 언급되나(삼하 21:8)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피할 때 도와준 바실래와(삼하 17:27-29) 동일 인물은 아닙니다.

 

20: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게 된 시기는 메랍의 결혼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일을 좋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울의 간교한 마음에도 또 한 번의 다윗을 죽일 기회를 엿볼 수 있도록 토대를 제공한 것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다윗이 훌륭하기 때문에 사위로 맞을 욕심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21: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11, 17절과 같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의도입니다. ‘올무(모케쉬: מקשׁ)’함정입니다. 이 단어는 함정을 놓다.’ ‘덫을 놓다는 단어에서 파생이 되었습니다. 동물을 잡기 위해 올가미를 설치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린다는 은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이 됩니다. 은유적 올무란 어떤 사람을 꾀어내어 그의 진정한 의도에서 벗어나게 한 후 그를 멸망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울은 다윗을 망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어 결혼시킴으로써 그녀가 다윗에게 올무가 되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22: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다윗은 사울의 이 두 번째 제안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은 신하들에게 다윗을 설득하도록 명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23: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는 폐백금을 지불할 만한 충분한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다윗은 메랍과의 결혼이 깨진 것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겼음을 짐작케 합니다.

 

24, 25: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여차여차히 말하더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 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幣帛)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은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는 말로서 결혼지참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한다고 하면서도 폐백 대신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를 요구했습니다. “폐백(모하르: מהר)”은 신랑측 결혼 비용을 말하는데, 성경에서 3번 사용이 되었으며(34:12;22:16; 삼상 18:26) 모두 약혼자가 약혼녀의 부친이나 그 가족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할 총액 또는 그에 상당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의 액수는 약혼 시에 부모들과 상의하여 결정하며, 보편적인 경우대로 그 돈이 일정한 액수로 결정되면 신랑이 즉시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틴의 아라비안인들 사이에서는 오늘날에도 약혼자가 약혼녀의 부모에게 모하르를 지불하는 관습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폐백 대신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를 요구하였습니다. 이 양피를 베는 행위는 블레셋 인들은 할례 받지 못한 백성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모욕적인 일인 동시에 블레셋 인을 죽여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면 블레셋 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여 그들로부터 보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이 같은 제안은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음이 분명해 집니다. 이처럼 신앙적으로 마비된 양심의 소유자는 악을 도모하는 데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다윗은 사울의 간악한 계략에 대한 의심도 없이 사위가 되는 것을 좋게 여겨 사울의 요구를 들어 주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폐백 기한이 다 되기 전에 사울의 요구를 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사울의 요구 속에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음모를 깨닫지 못한 다윗은 사위가 되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왕이 요구한 기한이 차기도 전에 군사적 행동을 감행했습니다. ‘그 종자는 그의 부하들을 말합니다. 원문에는 그의 사람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윗이 천부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휘하에 있는 부하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부하들과 출정하여 블레셋 군과 큰 전투를 치뤘습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블레셋 군인을 이백 명이나 죽이고 그 양피를 베어서 사울에게 갖다 준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는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다윗에게 딸 미갈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히브리어 어순대로 번역을 다시 해 보면 그가 보았다. 사울이 그리고 알았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이 됩니다. ‘그가 보았다는 자신이 세운 악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다시 한 번 깨달았던 것입니다.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이 구절도 다시 번역하면 그 때에 사울은 다윗 때문에 두려움이 날로 더해갔다.’가 됩니다. 날이 갈수록 사울은 두려움이 더 증가했습니다. 15절에서도 사울이 다윗이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자기의 계획 즉 다윗을 살해할 음모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물거품이 된 것을 깨닫고 그 두려움이 증가된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평생에 다윗이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본 장에서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3번이나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자 그의 왕위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더 고조되었던 것입니다.

 

30: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방백은 군사지휘관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는 계속적인 군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천부장이었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성공적인 전쟁을 이끌었습니다. 전시 체제에서의 거듭되는 승리는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에 대한 신뢰감을 높여 주며 결국 왕으로 받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이름(: שׁם)’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지위’ ‘인격’ ‘권위등과 같은 복합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귀중히 되니라(야카르: יקר)’무겁다’ ‘가치 있다’ ‘희귀하다는 뜻을 가져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을 뜻한다는 점에서도 명백합니다. 이처럼 사울은 다윗을 죽임으로써 존재 자체를 없애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점점 그를 귀히 쓰심으로 모든 역사의 진행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