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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5장 강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의 승리와 범죄

chukang 2018. 1. 27. 23:42



사무엘상 제15장 강해.hwp


사무엘상 제15장 강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의 승리와 범죄




이스라엘 제1대 왕으로서의 사울의 치세에 대한 내용이 13~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왕으로서의 통치 내용이나 왕정 체제 정비 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며, 그가 즉위할 때부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던 사실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의 초기 실정(失政)을 보여 주는 일련 기사의 마지막 부분인 본 장에 사울이 아말렉 정복 전쟁 중에 범한 불순종의 죄 및 그 결과로 주어진 2차 사울의 왕위 폐지 예언 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다음에 세워질 신본주의적 왕인 다윗의 기름 부음과 연결해 볼 때에 다윗이 왕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권세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대행자에 불과한 것이며 역사의 근본 주권이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으므로, 모든 권세자들이 교만하게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에 의하여 폐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새 왕을 예비하심으로써 또 역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1-9: 불순종하는 사울의 내용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또 다시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쳐서 그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각 왕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육축 가운데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는 것만 진멸하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들에 대하여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지 말고 완전히 진멸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야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개인적 명예욕과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사울이 이번에 전적인 순종을 했다면 지난번에 지은 불순종의 죄(삼상 13:8-14)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또 다시 기회를 놓치고 완전히 버림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운 인간의 욕망은 다른 모든 죄의 시발이 될 뿐만 아니라(3:6;15:150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올무가 됩니다(1:18, 19; 딤전 6:9). 그러므로 성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하며 자기 마음을 다스려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무엘이 이처럼 다시금 사울을 찾아 온 때는 그가 사울을 떠나간 때(삼상 13:15)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로 추정됩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때(삼상 16:1-13)와 믹마스 전투(삼상 13:1-15) 사이의 기간을 연대기적으로 계산하여, 적어도 20년의 세월이 경고한 후에 사무엘이 다시금 사울을 만난 것으로 주장합니다. 과거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미 그에게 심판이 예고되기는 하였으나(삼상 13:13, 14), 이번에 사무엘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은 일전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왕을 삼으신 것은 열방의 왕과 달리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 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왕적 소명과 권한을 부여하셨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삼상 9:15-17;10:1). 그러므로 사울은 자신의 주인이 되시는 여호와께 마땅히 순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이 말은 사무엘이 사울이 왕 된 것이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심판을 경고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삼상 13:8-14) 이 번 만은 온전히 순종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여호와의 긍휼을 덧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비록 범죄하기는 하였으나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징벌을 더디 하시며 긍휼과 사랑으로 오래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고 하였습니다(18:23;2:40. 그러나 사울은 이번에도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니 그에게 예고되었던 심판은 변개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24-29).

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만군의 여호와는 천군천사를 지휘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관련해서는 출전하는 이스라엘을 친히 지휘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로 종종 사용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워야 할 일과 관련하여 총사령관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군사 된 사울과 그 휘하의 군사들에게 엄숙히 명한다는 의미에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예들입니다(36:12, 16). 이들은 주로 유다 남방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입니다. 이들은 과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르비딤 광야에서 공격한 일이 있습니다(17:8-16;25:17-19).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대한 저들의 그 같은 공격은 단순한 민족 간의 분쟁의 차원을 넘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도전 행위였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대적하고 있었습니다(3:13;6:3;7:12).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방해하는 아말렉의 죄를 매우 중한 것으로써 진노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17:14;25:19). 이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통해 그 심판을 단행하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추억하노니에서 추억하다(파카드: פקד)는 말은 어떤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가 다시금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아말렉의 도전 행위를 기억하시어 이제 그에 대하여 보응하시겠다는 뜻입니다.

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아말렉 진멸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추호도 인간적인 사정이나 동정심에 이끌려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멸하다(하람: חרם)’는 본래 봉헌하다’ ‘금지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진멸할 것 중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그 밖의 것들은 불태우거나 여호와께 바치는 헌신적 행위를 의미합니다(6:17-24).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예언의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17:14, 16).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말렉을 멸하여 천하에 거역함이 없게 하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때가 되매 아말렉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들 모든 사람과 가축까지도 철저하게 진멸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4: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보병이 이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일만이라.

델렘(15:21, 24)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되는 성읍입니다. 유다 남쪽의 국경 지대에 위치했는데 아말렉족의 거주지와 가까운 곳입니다. 이러한 위치상의 이유로 인해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를 위한 병력을 이곳으로 집결케 하였습니다. 전체 20만 명 중에 특히 유다만 일만 명임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과 그 출신 지파인 유다 자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북 분열 왕국 이전부터 이미 여러 이유로 인해 유다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에 알력이 있었음도 시사하고 있습니다.

5: 사울이 아말렉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사면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후 적들을 유인해 내어 기습 공격하는 전술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종종 사용하던 것입니다(8:1-23). 여기서는 아말렉족을 기습 공격하기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섞여 살던 겐족을 무사히 구출해 내기 위한 조처로 보입니다(6).


6: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내려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겐족은 본래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했던 자들입니다. 유목 생활을 하면서도 금속 제련 기술이 뛰어나 금속 세공이나 대장장이 일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였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훨씬 오래 전에 이미 팔레스틴으로 들어와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였습니다. 모세의 장인 르우엘이 바로 이 겐족인데(1:16;4:11) 그는 가족들과 더불어 미디안 지역에 거주하면서 제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2:15). 이들 겐족은 모세와의 인연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우호적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향할 때 길 안내를 해 주기도 하였습니다(10:29-32). 그러다가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 점차 남방으로 내려가 사울 당시에는 아말렉족의 영내에 섞여 살았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암랄렉족을 치기에 앞서 그들 중에 섞여 있는 겐족을 구별해 내고자 한 것입니다. “선대하였느니라”(선대:헤세드 חסד)긍휼’ ‘자비등의 의미로 대개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19:19; 23:6). 여기에서는 출애굽 당시 겐 족이 이스라엘 베푼 호의(10:29-32)를 가리킵니다. 행군 도중 계속해서 대적만 만났던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겐족으로부터 입은 호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고마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7: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하월라는 이스라엘 남방의 변경 지대인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곳이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몇 몇 학자는 페르시아 만 연안의 북쪽에 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들어간 시내 반도의 한 광야입니다.(15:22) 일명 에담 광야(20:1; 33:8)’로도 불렸는데 지중해로부터 홍해 사이에 펼쳐 있는 넓은 광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남방 애굽의 경계 지역으로부터 페르시아만 북쪽 연안 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이 흩어져 살던 전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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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광포한 자란 의미인 아각(אגג)’은 아말렉 왕을 가리키던 공식 호칭입니다. 이는 애굽의 왕을 바로(Pharaoh)로 부르던 것과 같습니다.(1:22) 사울이 아각을 생포하였을 뿐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로는 그를 포로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떨치기 위함 그를 살려줌으로써 응분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의견 중에는 아각을 노예로 삼기 위해서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사울이 아말렉 족속의 대부분의 지역을 다니면서 거의 모든 자들을 진멸시킨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다른 곳으로 달아나 목숨을 보존했거나 미처 사울의 손이 닿지 못한 곳에 거주했던 탓에 화를 면한 자들이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삼상 27:8; 30:1-20). 그리하여 이들은 훗날 히스기야 시대에 시므온 지파에 의해 소탕을 당했습니다(대상 4:41-43). 사울과 백성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였습니다. 이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도해야 할 사울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탓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그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23; 삼상 12:13-15, 25). 이처럼 지도자는 그를 좇는 무리들에게 본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0~23: 앞 단락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연거푸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사실이 언급 되었습니다. 이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사울의 범죄 사실을 안 사무엘이 사울의 범죄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사울의 죄를 엄중히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회개하기는커녕 자신의 죄를 변명하며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이 옳지 못함을 지적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음을 통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죄는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죄를 낳고 결국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불순종의 죄를 은혜하기 위해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무고죄까지 범하여 결국은 파멸을 통고 받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비록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간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가장 아름답고 기본적인 자세는 순종이라는 점입니다. 사무엘은 그것을 한 마디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식과 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보다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4:23)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외면한 자의 아름답고 값진 예물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상한 심령을 더 아름답고 값진 예물로 흠향하신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11, 19).

10, 1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후회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다만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아픈 심정을 표현한 것입니다(6:6, 7). 이 말은 사울에 대한 심판 때가 가까이 왔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을 신인동형동성론이라고 말합니다. ‘근심하여(하라: חרה)’분노로 인해 속이 불타다란 뜻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노여워하다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4:1). 이는 곧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사무엘의 의분을 나타냅니다. 여러 번 경고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1; 12:14, 15) 사울이 또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사무엘은 실망과 함께 심한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이 사울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이는 기도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삼상 12:23). 사무엘의 기도 내용은 사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사함을 얻게 해 달라는 것과, 사울의 범죄로 인한 징벌이 백성 전체에까지 미치지 말해 해달라는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 중에 사무엘은 사울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계시 받았을 것입니다.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횅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승전비를 세웠다는 언급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은 사울의 그런 행위가 그의 이름을 드러내려 한 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즉 사울은 여호와께서 승리하신 것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성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린 행위였으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죄 위에 또 하나의 죄를 더한 죄악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갈멜은 헤브론 남동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입니다(15:55). 이곳은 아셀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갈멜 산지(19:26)와는 다른 곳입니다. 길갈은 요단강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요단 골짜기 일대에 위치한 성읍입니다(4:19). 여기서 내려갔다는 표현은 이러한 지리적 상황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사울이 갈멜에 기념비를 세운 후 기브아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내려간 것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21).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사울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사무엘이 채 묻기도 전에 미리 이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악을 은혜하기 위한 것으로 사울은 불순종과 교만에 이어 거짓의 죄를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25:44).

14: 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여호와의 명령을 행했다는 사울의 거짓말에 대해 사무엘의 예리한 추구입니다.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했다면 짐승들의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사울이 자신의 양심을 속이자 도리어 짐승이 사울의 죄악을 소리쳐 증거했다.’(Smith)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15: 사울이 가로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우리가라는 말로 사울은 자신의 범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3:12).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명령을 받았으니 그것을 온전히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또 사울의 허락 없이는 백성들 중 누구도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입니다(삼상 14:24-26). 따라서 사울은 백성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순순히 자신의 죄악을 자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완고히 하고 끝내 스스로를 변명하려 하였으니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 떨어지고 말 뿐이었습니다. 짐승을 살려 준 것에 대한 사울의 변명은 여호와께 제사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울의 그 말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으로, 자신에게 전쟁의 승리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행위로 볼 때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비록 사울의 진술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와 백성들이 저지른 행위는 분명한 범죄 행위라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의 생각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제사를 드린 후 그 고기를 자신들이 먹을 수 있다는 다분히 계산된 생각에서 비롯된 불순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가로되 말씀하소서

가만히 계시옵소서.’의 뜻은 그만하라는 뜻입니다. 즉 변명을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다는 사무엘의 단호한 말입니다.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죄에 대해 들어 알고 있는 터였으나 계속되는 사울의 변명을 가증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간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은 사무엘이 사울의 일로 인해 근심하는 가운데 밤새 여호와께 기도하던 도중 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7: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울이 사무엘로부터 왕적 소명을 받았을 때 겸비한 자세를 취했던 것을 가리킵니다(삼상 9:21). 그러한 사울은 모든 지파의 머리가 될 수 있었으나 이제 그 때를 망각하고 교만해진 그는 도리어 낮아질 터였습니다. 이는 실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2)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분명한 실례라고 하겠습니다.


18: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하셨거늘

길로 보내시며는 전쟁 출정을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시키기 위해 출정시키신 것입니다. ‘죄인 아말렉 사람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의 정당성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고 또 하나님을 대적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죄로 인해 결국 진멸당하는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오직 하나님의 진멸 명령에 철저한 순종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 사울 자신의 임의적인 결정은 허용될 수 없었습니다.


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탈취하기에만 급하여여기서 급하다는 것은 열성적이고 열정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 탈취 물에 대한 탐심이 앞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하는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은 범죄 행위였던 것입니다(3:5).

20,21: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죄를 자백하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사무엘은 사울을 질책했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백성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범죄한 아담이 그 책임을 하와에게 , 하와는 뱀에게 전가시킨 사실을(3:11-13)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사망을 선고 받았듯이(3:19) 사울의 결국 역시 이미 예고된 심판(삼상 13:13, 14)을 확정 받았을 뿐입니다(23~29). ‘아각을 끌어 왔고라는 말에서 스스로 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각을 죽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사울은 끌어 온 것이 여호와께 순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왜곡이라고 합니다. 불신자들이나 거짓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말렉을 진명한 증거로 아각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이는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듣는 것’, ‘제사수양의 기름은 각각 같은 의미로 여기서 대구법적으로 사용된 것은 그 의미를 한층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울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짐승을 남겨 두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입니다. 사울이 실제로 제사를 위해 짐승을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사울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는 반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인격적 순종과 사랑이지 단순한 제사 의식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사 의식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사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란 것이지 제사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에 대하여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1, 2)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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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저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술(케셈: קסם)의 죄사술은 제비뽑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로 점술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방신을 숭배하는 자들이 보편적으로 행하던 행위(18:4;13:22)였으므로 이스라엘에서는 행하지 못하도록 율법에 의해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19:26; 18:10). ‘사신 우상에서 사신(아웬: און)헛된’ ‘무가치한’ ‘불의한이란 뜻으로 우상의 헛됨을 가리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성경에서 제일로 치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입니다(20:3, 4).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은 것을 이러한 죄악에 비견하고 있으므로 그 죄악의 성격과 받을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범죄하고도 회개할 줄 몰랐던 사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 내용입니다. 이러한 심판 예언은 후에 그대로 이루어져 사울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삼상 31:6) 그의 왕권은 결국 다윗에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삼하 2:4;5:1-5). 이는 만일 그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말씀에 순복하였을 경우 그의 왕권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삼상 13:13)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24-35: 이제 사울의 왕위가 장차 폐하여지고 말 것이 준엄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선포를 한 사무엘은 그의 고향 라마로 돌아감으로써 사울과 영영 결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왕권이 폐지되고 장차 다윗이 사울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 상징적인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울이 붙잡은 사무엘의 겉옷자락이 찢어진 사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이스라엘을 떼 내어 가실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는 이후 다윗이 사울의 겉옷자락을 베어낸 사건과 연결됩니다.(삼상 24:4) 이 일련의 일로 인해 사울에게서 찢어진 왕위가 다윗에게로 옮겨지게 됨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직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자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사울보다 나은 자에게 주셨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이후 이 사실을 기억하고 다윗에게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삼상 24:20)고 말했습니다. 사울의 폐지 예고는 인본주의적 비신앙과 신본주의적 신앙의 대조입니다. 자신의 불순종의 죄에 대한 사무엘의 책망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던 사울은 또 다시 진정으로 회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사무엘에게 자신과 동행할 것을 요청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신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거듭 인본적 행동을 하자 왕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행하여 신본주의적 통치를 수행할 새로운 왕이 예비 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본주의적 자세로 살아가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교훈 받게 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 항상 순복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무엘의 통렬한 질타와 심판 선고에 사울이 태도를 바꾸어 자신의 죄를 시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코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어떻게 해서든지 심판만은 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전히 그가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책임을 돌리고 있으며, 이후에 그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려고 획책한 점(삼상 18:10-29) 등에 의해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습니다. 만일 사울이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을 것입니다(요일 1:9). 사울이 백성을 두려워하였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지만 일부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그 동기에 있어서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세움을 받은 왕이었으므로, 자연히 저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사회에선 각 지파마다 분파 의식이 강했으며 성읍별로 여전히 상당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백성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왕권을 안정시켜 주셨을 것입니다(삼상 13:13).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울의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의 관심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에 있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위기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이 아닌 사무엘에게 일단 자신의 죄를 사해 줄 것을 요청하며 또한 자기와 함께 가서 제사드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사무엘과 함께 제사드림으로 백성들에게 자신이 여전히 왕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가 없는 죄사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무엘이 아니엇습니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적인 수습책만 강구하는 사울과는 그 어떠한 타협도 할 수 없으며 또한 왕권에 위축당해 그에게 굴복할 수도 없다는 확고한 의사를 사무엘이 표명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을 저버렸음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도 사울을 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그 같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직시하여 사울에게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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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울의 요청에 대한 단호하게 거절하고 돌이켰습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사실을 입으로 진술한 데 이어 행동으로 분명히 보였습니다. 사울은 돌아서는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릴 때 사무엘의 옷 조각이 찢어졌습니다. ‘찢어진지라(카라: קרע)’28절의 떼어서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울의 왕위가 폐하여질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표징(Sign)이었던 것입니다.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웃(레아: רע)’은 비한정적으로 사용이 되어 동족 중 어떤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은(토브: טוב)’왕이 한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이행하는이란 뜻입니다. 이는 바로 다윗을 가리킵니다. 비록 사무엘은 차기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말을 했으나 곧 이어 그가 다윗임을 알게 됩니다(삼상 16:1-13).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지존자(네차흐: נצח)’는 본래 밝은 것’ ‘계속적으로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에 비추어 하나님을 일컫는 신명(神名)으로 영원하신 분’ ‘영화로우신 분또는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외부의 그 어떤 작용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변하지 않으심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과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11, 35)는 말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님은 이미 11절에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곧 본질의 불변성, 작정의 불변성, 구원의 불변성, 신실의 불변성등입니다.

 

30: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과 그가 사무엘에게 동행을 부탁하며 함께 제사드리기를 요구한 것은 백성 앞에서 여전히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는 엄청난 비극적 선고에도 충격을 받기는커녕 사람들의 눈을 의시하여 체면을 유지하려는 데 급급해 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신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는 부적격한 인물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삼상 13:14)에게로 옮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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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27절에서와 달리 사무엘이 돌이켰다고 해서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돌이켜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차기 이스라엘의 왕이 등극하기까지는 여전히 사울이 백성을 다스리고 사회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울의 왕 됨을 인정해 주는 차원에서 요청을 들어 준 것입니다. 또한 사울이 살려둔 아각을 죽여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 이를 처리하기 위해서도 사무엘은 사울과 동행한 것입니다.

32: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즐거이(마아단: מעדן)’좋아서’ ‘기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각의 행동은 자신이 이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시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아각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 사울의 존에서 종교 지도자 사무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지 사무엘이 사울보다 더 자비로울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적어도 죽음만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33: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여인들로 무자케 하였다는 말은 아각이 여인의 자식들을 죽여 더 이상 살아있는 자식이 없게 했다는 뜻입니다. 아각이 전쟁에서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것 같이 자신도 피를 흘려야 할 것이라는 뜻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본 절은 자식을 잃은 여인의 슬픔이 매우 극심한 것(31:15)임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더욱 그 의미가 살아납니다. 전쟁에서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극대화시켜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아각의 죽음도 그처럼 처참한 것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찍어 쪼개다(솨사프: שׁסף)’갈기갈기찢다’ ‘조각조각 나누다는 뜻입니다. 이는 아각이 얼마나 비참한 죽음을 당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이처럼 철저하고 엄중한 것임을 증거합니다.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본집으로 올라가니라.

사울과 사무엘이 그냥 단순히 헤어진 것이 아니라 절교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라마라마다임소빔으로 불린 사무엘의 고향입니다(삼상 1:1).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자 통치 중심지입니다.(삼상 10:26).


35: 사무엘이 죽는 날가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은 사울과 헤어져 라마로 돌아간 뒤에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삼상 19:24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후에도 사울은 사무엘과 상면한 일이 있습니다. 다만 이는 사무엘과 사울이 선지자와 왕일한 공식적인 관계에서만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신정 사회인 이스라엘에서 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백성들을 다스려야 했습니다(삼상 12:14,15). 그런데 사무엘이 더 이상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울이 이스라엘 왕에서 이미 쫓겨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외형적으로는 왕위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사울은 사무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었으므로(삼상 10:1) 개인적으로 사무엘은 사울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울이 이제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범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니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으므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무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사울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무엘상 제15장 강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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