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제13장 강해: 사울의 망령된 제사
사울이 왕위에 등극한 뒤에 그의 통치에 대한 내용이 없고, 본 장에서는 그의 불순종이 시작이 되면서 왕에서 폐위 될 것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절박한 상황이라도 직접 제사를 드리는 망령된 행위는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써 폐위의 통보를 받게 됩니다. 사울의 단순히 제사를 드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그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나타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뜻을 스스로 정한 뒤에 그 뜻을 이루려는 요식 행위로서 제사가 드려진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적인 사울의 신앙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사울이 왕이 된 2년에 군사력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은 자신의 임무가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내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조직한 상비군으로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하고, 이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전쟁을 위해 군사를 소집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소집 명령에 응하여 길갈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 비해 수와 장비에 있어서 월등한 블레셋 군대를 마주하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불과 육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숨기에 바빴고 그 남은 자들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상 중대한 국면을 이룬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때 사울은 처음 왕 되었을 때와는 달리 인본주의적이며 불순종적인 자세를 띠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 모험적 군사 행위를 실행하는 데 있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채 자기 중심적인 판단에 의해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선민 이스라엘의 신본적 왕의 자세를 잃고 만 것입니다. 이는 사울의 중대한 실정입니다. 이렇게 되어 불순종의 죄를 낳아 그의 왕권이 폐지되고 신본적 왕인 새 왕 다윗이 예비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보다 큰 시련과 대적을 만나면 두려움과 공포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뢰하는 자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시 3:6;23:4;27:3).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이 말은 히브리 원문을 지역하게 되면 ‘사울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한 살이었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울이 준수한 소년으로서(삼상 9:2)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된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삼상 10:1, 17-24). 따라서 ‘사울이 왕이 된지 일년이었다.’는 견해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 되는 때에’라고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 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왕들의 쟁위 기간을 계산하는 독특한 계산 방식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종교력 제1월(니산월 혹은 아빕월)을 기산으로 할 경우 다음해 니산월까지가 1년이 됩니다. 그래서 재위 기간이 만 1년이 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중간에 니산월을 당하면 그때는 재위 제2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2: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벤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박으로 보내니라.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문자적으로는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사람 3천을 택하여’라는 뜻입니다. 이는 민족적 위기 상화에 사울이 이스라엘 온 백성을 소집한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삼상 11:6-8). 사울이 점차 행정 체제와 군사 조직을 갖추어 나가기 위하여 이번에는 자신의 근위병을 선발한 것입니다(삼상 8:11). 이들은 정예화 된 병사들로서 사울 왕조를 뒷받침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활약하였습니다(삼상 14:52). ‘막마스’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동쪽 약 12km 지점에 위치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와디 수웨이닛’이라는 계곡과 험준한 고개들로 연결되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벧엘’은 믹마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사무엘 순회 통치하던 성읍입니다(삼상 7:16). 여기서 특별히 ‘벧엘 산’으로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곳이 해발 약 950m의 고지대였기 때문입니다.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였습니다(삼상 14:1-140. 그가 다윗과 더불어 진실한 우정을 나눈 것은 본서 기자가 강조하고 있습니다(삼하 1:26).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으로 사울 통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사울은 이방 침략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며, 블레셋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군사 행동의 일환으로 이와 같은 군사를 주요 요충지에 배치시켰을 것입니다.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게바는 예루살렘 북쪽 10km 그리고 기브아 북동쪽 5km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원래 베냐민 지파의 기업이나 레위인의 성읍으로 구별된 곳입니다(수 18:24;21:17). ‘수비대’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통치를 위해 주둔시킨 군사 기지이거나 초소일 것입니다(삼상 10:5).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는 곧 급박한 위기 상황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즉 요나단의 블레셋 수비대 공격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것에 대비하여 사울은 온 백성들에게 전쟁 준비의 소식을 전하고 군사를 소집하려 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 ‘히브리(이브리: עברי)’란 말은 ‘이스라엘인’, ‘유대인’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는 대개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멸시하여 부를 때 주로 쓰였고 스스로는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삼상 4:6;14:11).
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함을 듣고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으니라.
‘사울의 ~ 친 것과’ 이는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쳤다는 말과 상충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요나단이 정면에서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칠 때에 사울은 요나단을 도와 후면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이는 극도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미움을 산 이유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상비군을 두는 등의 행동으로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 이유는 블레셋의 수비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모여~ 좇으니라’ 이는 소리치다, 함성을 지르다는 말입니다. 군사적 행동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울의 전쟁 준비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길갈로 속속 모여든 것입니다.
5: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베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치매
‘병거(레케브: רכב)’는 대개 두 필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를 가리킵니다. ‘마병(파라쉼: פרשׁים)’은 말을 타고 적군을 향해 돌진하여 적의 대오를 흩트리는 임무를 띤 병사들을 가리킵니다. 전쟁 수행 시 동원되는 병거는 마병보다 수가 적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본 절에서는 마병에 비해 병거의 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필사의 오기로 보고, 그 수를 1,000 또는 3,000으로 봅니다. ‘백성은~ 모래 같이 많더라.’ 여기서 백성은 마병과 병거군을 제외한 나머지 블레셋 군을 가리킵니다. ‘모래같이’ 또는 ‘하늘의 별같이’라는 말은 숫자의 셀 수 없이 많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창 13:16; 15:5; 출 32:13; 신 28:62). 블레셋의 증오심과 이스라엘의 왕정 체제를 처음부터 궤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시사해 줍니다. ‘벧아웬’은 ‘우상의 집’ 또는 ‘악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위급함(차르: צר)’과 ‘절박함(나가스: נגשׁ)’은 동의적 의미로 물리적 또는 심리적 압박감을 못 이겨 고통스러워하거나 당황스러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블레셋의 많은 군사 앞에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심정 상태를 잘 나타내 줍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위기 소식을 접하고 구국 충정으로 전쟁터에 나왔으나 블레셋의 엄청난 전력에 그만 기가 질린 것입니다. 그들은 ‘굴과 ’은밀한 곳‘ 즉 석회질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연 동굴이나 그에 상응하는 지형물에 숨은 것입니다. 숨을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가서 숨은 것입니다.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
‘갓과 길르앗 땅’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차지한 땅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곧 남으로 아르논 강에서, 북으로 갈릴리 바다와 길르앗 길목을 잇는 지경까지입니다.(민 32:33-41).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8절로 보아 사울은 이곳에서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과거 사무엘이 블레셋을 이긴 미스바 전투(삼상 7:7-14)를 기억한 사울은 사무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사무엘은 이레 안에 사울에게 나아가겠다고 응답하였을 것입니다.
8-14절: 사울은 블레셋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국지전을 벌였으나 오히려 블레셋의 총공세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정해진 약속 기한이 다하도록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를 집전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성급한 행동의 표면적 이유는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망에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본주의적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적인 근본 자세를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그에 대한 책망과 함께 그의 왕위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야 말았습니다. 사울이 제사를 직접 드린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사울의 근본 믿음이나 사고 방식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행동은 결국 신앙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통하여 신정통치를 이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 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로부터 도움 요청은 받은 사무엘은 정한 기간 내에 도착할 테니 기다리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이레가 되어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사울과 백성들이 동요하여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웠지만 그 왕이 자신들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음을 보고 절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실제로 정한 기간 내에 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는 끝까지 참지 못한 사울의 경거망동이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 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은 백성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 져서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사무엘에게 도움을 청한 만큼,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제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사무엘이 친히 집전해야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다리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말은 곧 사울의 순종 여부를 시험한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순종하여 통과하였다면 왕위가 견고히 서고 불순종하여 실패하면 왕위가 폐하여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했듯이 불행히 사울도 역시 시험에서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과 충성을 상징하는 제사며, 화목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교제를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10: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울의 행위가 너무나 조금한 행위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약정한 엿새 동안 잘 참았으면서도 마지막 하루를 온전히 참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실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확신하고 겸손히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한 인간적 방도를 강구하려한 데 더 마음이 쏠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11: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사무엘의 말은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질책입니다. 이에 대한 사울의 변명은 ⓵ 백성의 흩어짐 ⓶ 사무엘이 약속 시간 내에 오지 않음 ⓷ 블레셋 군사들이 믹마스에 모여든 급박한 상황입니다. 이는 실상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오히려 사무엘과 백성과 위급한 상황 등에 돌리려고 하는 책임회피성 발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범죄를 타인에게 전가시키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지적에 겸허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죄를 낳고 결국에는 멸망을 가져오듯이 그러지 아니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 한 탓에 사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선고되고 만 것입니다.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이 말은 ‘여호와의 얼굴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께 출전 여부를 묻고 또한 승리를 기원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삼상 7:9) 이는 물론 성전(聖戰: Holy War)의 기본 개념입니다. 여기서 사울이 오해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제사의 참된 의미를 간과한 채 제사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망령되다(사칼: סכל)의 기본 뜻은 ‘어리석게 굴다’ ‘교만스럽게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악 된 행동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거두시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의 모습과 달리 순종하는 겸손과 인내도 없었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블레셋을 물리친 것과는(삼상 14:6-15)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가 누렸을 복이 어떠한 것이었을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울의 왕조가 길게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다윗 왕국(창 49:10;삼상 16:1,13)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사울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강조한 결과론적인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경우에는 형통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왕권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죽었을 것은 또한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의 형벌을 가져왔듯이 사울의 범죄는 그에게 왕위의 상실을 가져왔습니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그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남은여생만은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더 강퍅하여 계속 범죄하였으므로 이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였습니다(삼상 15:17-29). ‘그 마음에 맞는 사람’ 끝까지 신본주의적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인본주의적 자세를 보인 사울과는 달리 비록 중간 중간 죄를 짓기는 하지만 끝까지 신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한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5-23절: 블레셋과 전쟁하기 위해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매우 열세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군사는 겨우 육백여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전쟁에 필요한 무기조차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이런 전력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의 강성함(삼상 8:12-17)과는 비교가 될지 않을 정도로 약화가 된 것입니다. 아마 사무엘 통치 기간 중 있었던 신앙개혁에 따른 영적, 물적 풍성함이(삼상 7:1-4)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영적 타락과 더불어 약화되었기 때문이며, 점차 인본주의적 통치를 행하는 사울의 치세 속에서 그 도가 더욱 심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력적 약세가 아니라 모든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과 평화는 요원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5: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 명 가량이라.
백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사울의 인본주의적 발상에 의한 제사가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사울과 함께 한 자들은 이천 명이었는데 그 중 반 이상은 흩어지고 겨우 육백 명만 남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사울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16: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진쳤더니
‘베냐민 게바’ 이곳은 믹마스와는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17: 노략군들이 삼 대로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이르렀고
‘노략군들(마쉐히트: משׁחית)’ 본래는 불법을 자행하며 타인의 물건을 약탈하고 훼손시키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는 적진에 돌격하여 대오를 흐트러놓는 임무를 지닌 선발대를 의미합니다. 블레셋이 많은 수의 병력을 이용하여 협공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적은 수로 함께 모여 대오를 정비하던 이스라엘과 비교되어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각각 북쪽, 서쪽, 동쪽으로 진격하여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초토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오브라는 벧엘 북지파의 기업입니다. 후대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으로 취급이 되었는데 한 때 가나안 족에게 빼앗겼던 것을 에브라임 지파가 되찾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수알’은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브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곳은 많은 군사들이 집결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지대였을 것입니다.
18: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자기가 내려다보이는 지경 길로 향하였더라.
‘벧호론 길’ 벧호론은 예루살렘 북방 18km 지점이며 믹마스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는 2개의 성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각기 ‘위 벧호론’과 ‘아래 벧호론’으로 불렸습니다(수 10:10). ‘스보임 골짜기’ 믹마스 남동쪽의 베냐민 지경 내에 있던 골자기입니다.
19: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침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철기 문명은 B. C. 2000년 경 힛타이트족에게 의해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철을 제련하여 가공하는 기술이 팔레스틴에 전래된 것은 B. C. 1200년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윗 시대 전까지 철을 다루는 기술이 크게 뒤져 있었습니다. 이는 팔레스틴에서 철광석의 산출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블레셋 족이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동안 철기 산업을 철저히 통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고대에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흔히 행하던 정략적 조치였습니다. 그들은 패전국의 반란을 막기 위해 무기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조처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철공들은 블레셋에 포로로 잡혀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20,21: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버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 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당시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블레셋의 대장간을 이용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은 군사적으로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버리려면’ 날이 무디어진 연장을 연마하여 다시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22: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으니라.
이스라엘이 군사력 측면에서는 도저히 블레셋을 상대할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무기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기구로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병거와 마병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이번 전쟁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이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23: 블레셋 사람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
이들은 앞서 파견된 선발대와는 다른 블레셋 군의 본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전진 배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이스라엘은 더욱 두려움에 떨게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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