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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4장 강해: 요나단의 믿음의 승리

chukang 2017. 5. 15.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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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4장 강해: 요나단의 믿음의 승리

 

블레셋과의 대치 상황에서 요나단은 출중한 신앙을 바탕으로 기습 공격을 하여 큰 전과를 올린 반면에 사울은 잘못된 신앙을 바탕으로 잘못된 지시를 하달하여 온 이스라엘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본 장의 주제는 아주 간결 명확합니다. 사울이 선민의 왕으로서 부적격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뜻과 판단을 앞세우는 인본주의적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는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자리에 죄로 오염된 인간을 올려놓는 행위로서 사악한 것이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신의 육신 하나도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매우 어리석은 짓이기도 합니다.

 

1-15: 사울의 아들 요나단으로 인하여 불리한 전세가 역전되어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으로 몇 명 되지 않은 병사를 이끌고 블레셋을 습격하여 큰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승리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믿음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을 타개해 나가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신앙의 용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그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리라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도움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베풀어졌습니다(삼상 17:47;7:4,15). 그러므로 영적 전투를 벌이는 성도들의 취할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밝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대적과 역경을 만난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며 담대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루(하욤: היום)는 블레셋 군대가 믹마스 어귀에 진을 친 바로 그날(삼상 13:23)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을 가리킵니다. 정확한 날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병기든 소년은 상관의 창이나 칼과 방패를 들고 다니면서 호위하는 일종의 부관이라고 하겠습니다. 병사들 중에서도 총명하며 두터운 신임을 받는 자가 선발이 됩니다. 다윗도 한 때는 사울의 병기든 자로 활약하였습니다.(삼상 16:21) 블레셋이 진 친 믹마스 어귀에서 사울과 요나단이 있는 게바까지는 약 1.5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그 사이에는 협곡이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약 1.5km를 걸어서 이 협곡을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자신의 공격 작전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추측한다면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의기소침한 사울의 상태로 보아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요나단은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믿음의 행위가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2: 사울이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 함께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미그론(גרוון)’은 절벽을 뜻입니다. 여기에서 미그론은 믹마스 북쪽에 있는 미그론(10:28)과 다른 곳으로 게바 북쪽, 믹마스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이곳은 이름의 의미대로 전체 지역이 온통 바위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이는 사울이 블레셋 군을 격퇴할 어떠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은 채 주저하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함께 한 백성 즉 군사가 겨우 600명이라고 하는 매우 적고 연약한 상태였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뒤에 있을 이스라엘의 승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의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아히야의 뜻은 여호와의 형제입니다. 학자들은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삼상 22:9). 그러나 아히멜렉의 형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봇을 입고화려한 색실로 만든 에봇은 대제사장의 의식 예복으로(28:4;29:5), 이 옷을 입었다는 말은 곧 대제사장직을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반 제사장들은 대제사장의 에봇과는 구별되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소한 에봇을 입었습니다. 또한 이 에봇은 특별한 행사 때에 입는 예복이었기도 합니다. 다윗이 법궤를 옮길 때 이 에봇을 입었었습니다(삼하 6:14). 추측해 보면 아히야는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서 사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사울과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 있었으니이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첫째 비록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엘리의 후손 아히야가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엘리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 재앙(삼상 2:12-17, 22-36; 4:11-22) 이래 대제사장직은 실질적으로 사무엘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삼상 7:17;9:12,13;10:8;11:15). 둘째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제사장이 전쟁에 출전하는 왕과 군사들을 위하여 승리를 기원해 주는 일은 있었으나 그들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성소에 남아 성직을 수행하는 것이었지 마치 왕의 개인 비서인 양 함께 전쟁터에 따라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이 아히야를 대동한 것은 이방인들의 경우를 본 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방의 경우 그 왕이 자신의 절대적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항상 제사장을 곁에 두어 신의 뜻을 묻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히야는 순수하게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어용(御用) 제사장 노릇을 한 것입니다.

 

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고 저편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어귀 사이는 게바에서 믹마스로 나아가는 협곡의 양편을 가리킵니다. ‘보세스(בוצץ)’빛나는’ ‘미끄러움이라는 뜻이며 세네(סנה)’는 가시덤불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들은 믹마스로 나아가는 협곡 일대가 매우 험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한 바위는 북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믹마스 앞에 일어선 바위는 보세스이고 게바 앞에 일어선 바위는 세네입니다. 보세는 북쪽에서 믹마스를 향해 뻗어 우뚝 서 있었고, 세네는 남쪽에서부터 게바를 향해 뻗어 우뚝 서 있었습니다. 두 바위는 협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 있는 형태를 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할례(circumcision)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징표입니다(17:10). 블레셋 인들도 포경 수술을 시행하였으며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많이 행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같은 의미가 있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선민사상을 근거로 할례 없는 자들이라고 이방인들을 경시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비하여 군사력이 매우 열악한 상태였습니다(삼상 13:2,5).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신하며 블레셋을 향하여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조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역사하실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라는 구절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7:1-23;16:28-30; 삼상 17:41-54;대하 14:9-15).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했던 것이 바로 믿음이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의뢰하는 신앙의 바른 자세입니다.

 

7: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요나단의 병기든 자가 요나단의 신앙적 결단에 동의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군병된 성도들이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께 마땅히 고백해야 할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6:120

 

8: 요나단이 가로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본 절을 통하여 보면 요나단의 작전이 블레셋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병기 든 자와 함께 적의 진지로 나아가 정면 대결로 적을 쳐부수겠다는 상상을 초월한 작전입니다. 여기서 요나단의 작전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온전한 신앙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비록 단 둘이서라도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큰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9,10: 그들이 만일 이같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그들이 만일 이같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요나단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이 요나단의 작전과는 다른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첫째, 블레셋 인들이 내려오겠다고 하는 경우와, 둘째 자신들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는 두 가지 중 후자의 경우를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증표로 삼았습니다. 블레셋 병사가 후자로 대답을 하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표징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아마도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자는 세네 바위를 넘고 믹마스로 향하는 협곡을 건너 보세스 바위 아래에 당도하여 은신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획한 대로 자신들을 블레셋 인들에게 보이기 위해 숨어있던 곳에서 나온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경멸조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 숨었던 구멍에서구멍(호르: חור)은 비단 구멍뿐만 아니라 동굴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는 바위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 병기든 자를 대하여 가로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한 일을 보이리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고

우리에게로 올라오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요나단에게 승리의 확답을 주는 소리였습니다. 비록 블레셋 병사가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를 얕잡아 보고 이같이 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통해 요나단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요나단은 이 소리를 듣고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음을 화신하였습니다. ‘한 일을 보이리라.’ 이는 곧 블레렛 사람들이 자신들의 막강한 전력을 과시해 보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요나단의 손에 붙이셨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어리석음과 자만이 가득한 말이었습니다.

 

13: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그 병기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병기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현재에도 보세스 바위일대의 지형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요나단 일행이 그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마치 암벽 등반을 하듯 그렇게 기어 올라가야 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마치 요나단이 지나가면 저절로 푹푹 쓰러지는 듯한 상상을 자극하는 문구이지만,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요나단은 신속하고 정확하고 힘 있는 동작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넘어뜨렸고, 병기든 자는 그들을 확인 사살하듯 무찔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 요나단과 그 병기 든 자가 반일 경 지단 안에서 처음으로 도륙한 자가 이십 인 가량이라.

반일 경 지단 안에서히브리식 표현으로 한 마리의 소간 한 나절에 갈아 놓을 수 있는 땅으로 대략 황소 두 마리가 한나절 갈 수 있는 밭의 면적은 1에이커로 4,047정도 됩니다. 반일 경 지단은 1/2에이커에 해당하는 면적이 됩니다. 이렇게 면적 단위로 기록한 것은 요나단의 공격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으로~ 이십인 가량이라.’ 처음으로라는 말은 이번에 거둔 요나단의 승리가 곧 이어 있을 이스라엘의 대승을 예고해 주는 전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죽은 20여 명의 블레셋 군은 이스라엘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경계하기 위한 전초병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 단 둘이서만 자신들에게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자만하여 방심하다가(11, 12) 도리어 의외의 죽임을 상한 것입니다.

 

15: 들에 있는 진과 모든 백성 중에 떨림이 일어났고 부대와 노략군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본 절은 요나단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가운데 최고의 전과를 거둔 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듯이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셔서 블레셋인 가운데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며 또한 지진을 일으키신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들에 있는 진사령부가 있는 진영 즉 블레셋 본대가 진치고 있던 믹마스 어귀 일대(삼상 13:23)는 험악한 산악 지대로 넓은 평원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인들의 성읍이 있던 지역은 해안 평야를 끼고 있는 저지대였으므로, ‘로 불릴 수 있는 곳입니다. ‘떨림이 일어났고떨림(하라드:הרד)의 기본 의미는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심리적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가리킵니다. ‘부대와 노략군부대는 믹마스 어귀에 진친 블레셋 군의 본대입니다.(삼상 13:23) ‘노략군은 삼대로 나뉘어 수알, 벧호론, 스보임 골짜기로 향햏던 선발대를 가리킵니다(삼상 13:17,18). ‘땅도 진동하였으니진동하다(라가즈:רגז)는 때로 감정이 격해 분을 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37:28;16:43). 그러나 대개는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지진 현상을 가리킵니다(삼하 22:8;77:18;5:25;2:10).

 

16-23: 사울은 요나단의 활약으로 블레셋 진영이 혼란케 된 것을 보고 백성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갔습니다. 블레셋 군대에는 자중지란이 일어나고, 블레셋 군대에 편성되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진영을 이탈했던 백성들이 다시 사울과 합하므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저자는 그 모든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하심의 결과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승리는 인간적인 요소에 있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지혜나 능력을 자랑하며 세상 것을 의지하는 모습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베냐민 기브아사울의 고향인 베냐민 지파의 성읍 기브아를 가리킵니다(삼상 13:2). ‘무녀져 이리저리 흩어지더라.’에서 무너지다(무그: מוב)’는 문자적으로 녹아내리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블레셋의 군대가 요나단의 공격에 의한 수비대의 패퇴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공포로 인해 마음이 녹아내려 당황하며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17: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고하여 보라하고 점고한즉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가 없어졌더라.

점고하다(파카드: פקד)’헤아리다’, ‘계수하다는 뜻입니다(1:20, 22;대상 23:24). 이로 보아 사울은 블레셋 진영의 혼란이 이스라엘 병사에 일어난 것으로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이스라엘 병사들 중에서 누가 블레셋 진영으로 갔는지 파악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 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궤70인역에서는 에봇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70인역이 정통성을 결여한 번역이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볼 때에 일부 타당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에는 법궤를 사용하지 않고 에봇의 우림과 둠밈을 사용했다는 점(삼상 23:9-12) 성경 용례상 가져오다(나가쉬: נגשׁ)’는 말이 에봇을 착용하거나 가져오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경우가 없다는 것 그 당시 법궤가 기럇여어림에 있었다는 점(삼상 7:1)을 들고 있습니다.

 

19: 사울의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의 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사울의 기회주의적 신앙 자세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 지영에 소동이 더하여 이스라엘의 승리의 가능성이 보이자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했던 조금 전의 자세에서 돌이킨 것입니다. 이는 정녕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려움이 사라지면 이내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사울의 교만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20: 사울과 그와 함께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이 각각 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블레셋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나탄 것에 대하여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나단의 공격과 여호와의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은 떨림으로 인해 당황한 블레셋 군대가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 자기들끼리 싸웠다는 견해, 둘째 21절의 결과로 당시 블레셋 군대 내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요나단의 공격에 힘을 얻어 블레셋 군을 대적하여 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는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으로 보였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21절은 20절의 결과이지 20절이 21절의 결과는 아니므로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의하여 일어난 기이한 현상이 맞다 하겠습니다.

 

21: 전에 블레셋 사람과 함께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과 함께 진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이스라엘 사람과 합하였고

블레셋 사람과 함께하던 히브리 사람이이들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통치하에 예속되어 있던 탓에(삼상 13:19-21) 강제로 징용되어 블레셋 군대에 편입된 자들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동족과 싸우도록 강제로 동원되었던 히브리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탈주하거나 아니면 블레셋 군을 대적하려고 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블레셋 진영에 큰 소동이 벌어지고 그 와중에 이스라엘 군사들까지 진격해 오자 얼른 이스라엘 군에 합류한 것입니다.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의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이들은 블레셋의 엄청난 군사력을 보고 겁에 질려 이스라엘 진영을 이탈하여 도창한 자들입니다(삼상 13:6). 이들 중 일부는 요단 동편으로도 도망했는데(삼상 13:7) 본 절은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에브라임 지경의 산악 지대로 도망했을 보여줍니다.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본 절은 이 전쟁에 대한 저자의 결론입니다. 저자는 여호와께서 요나단과 그의 병기든 자, 블레셋 군대 내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 그리고 지진과 큰 공포 등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게 역사하셨음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성경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모든 승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도 역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은 베냐민 지파의 산지에 위치한 곳으로 믹마스 서쪽 약 1km지점으로 벧엘 동편에 있던 성읍입니다. 즉 벧아웬 동편의 믹마스에 주둔했던 블레셋 군이 서쪽으로 패주하여 아얄론까지 도망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지나다(아바르: עבר)’란 말은 계속되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벧아웬을 지나면서까지 전쟁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4-46: 이스라엘이 승리를 마무리는 시점에 사울은 망령된 맹세를 하였습니다. 승리에만 급급하여 경솔하게도 블레셋과 전투하는 동안 금식령을 내렸고 만약 음식을 먹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맹세하였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속히 종결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 드높이고자 하는 이기적 욕심에 그렇게 한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의 맹세는 큰 부작용을 가져왔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한 백성들이 지쳐 보다 좋은 전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사울의 맹세를 듣지 못하여 꿀을 먹은 요나단은 죽임을 당할 뻔했으며 금식 시한을 넘긴 백성들이 허기를 참지 못하고 짐승을 잡아 피 잇는 채 먹는 사태까지 유발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사울의 맹세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는 자였음을 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24: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아무 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피곤하다’(나가스: נגשׂ)는 본래 괴롭히다’, ‘폭정을 가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는 수동태로 쓰여 괴로움을 당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시간 동안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음식까지 먹지 못하여 허기가 져서 괴로움이 극심하였음을 가리킵니다. 사울의 명령은 해지기까지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자신의 명예와 공명심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 병사들이 승리를 기원하면서 부부관계를 금한다거나(삼하 11:11)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가운데 서원한다거나 하는 경우는 있습니다(11:30, 31). 그러나 여기에서 사울의 맹세는 하나님 중심적이 아닌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전쟁 중에 지친 이스라엘 군사들의 원기를 북돋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전쟁 수행에 악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런 사울의 오판에 대하여 요나단의 진술을 통해 저자는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29, 30)

 

25: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야생벌들이 바위틈이나 나무 밑둥 등에 집을 지어 놓고 그곳에 꿀을 모아두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벌집에 꿀이 가득 차 넘치면 꿀이 땅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복을 베푸시는 땅을 의미하지만 바로 이 같은 사실적 측면에서 유래한 말이기도 합니다(3:8;20:24;11:9).

 

26: 백성이 수풀로 들어갈 때에 꿀이 흐르는 것을 보고도 그들이 맹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그 잎에 대는 자가 없었으나

맹세를 두려워하여만약 꿀을 먹음으로 사울과의 맹세를 어길 경우 사울로부터 받게 될 징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27: 요나단은 그 아비가 맹세로 백성에게 명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손에 가진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그 손을 돌이켜 입에 대매 눈이 밝아졌더라.

눈이 밝아졌더라.’ 시력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눈이 번쩍 뜨였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허기가 심하여 눈이 침침할 정도로 지쳤던 요나단은 꿀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기력을 회복한 것입니다.

 

28: 때에 백성 중 하나가 고하여 가로되 당신의 부친이 맹세로 백성에게 엄히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사울이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백성들에게 강제적으로 금식을 명하였음을 다시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조처를 취한 사울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비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피곤하다에 해당하는 우프(עוף)’는 단순히 피곤한 상태를 넘어서 녹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의 명령으로 인해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정도로 탈진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분명 병사들이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지휘관이었던 사울의 크나큰 실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29: 요나단이 가로되 내 부친이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았거든

이 땅이 땅의 백성으로 곧 이스라엘 백성을 뜻합니다. ‘곤란케 하다(아카르: עכר)’괴롭히다’, ‘휘젓다란 뜻입니다. 본 절 전체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먹지 못하게 하여 그들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며, 둘째 그 결과 백성들이 허기지고 지쳐서 좀 더 효과적이고 완전하게 블레셋 군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면 블레셋 사람을 살육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백성들이 허기져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요나단의 지적은 사울의 명령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아얄론은 예루살렘에서 23km정도, 믹마스에서 약 25-30km 정도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먼 거리를 먹지도 못하고 적과 싸우며 추격한 이스라엘 병사들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취하고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 있는 채 먹었더니

사울의 어리석은 명령이 야기한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기사입니다. 사울이 명한 시한인 저녁이 지나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너무 허기가 진 나머지 하나님의 율법을 망각한 채 두 가지 율법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첫째 동물을 피 채 먹지 말라는 법(9:9; 17:10-14), 둘째 소와 송아지를 같은 날에 잡아 먹지 말라는 법(22:28)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자기중심적이고도 경망스런 금식 명령은 백성들을 괴롭게 만들었음은 물론 급기야 저들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울은 이제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온 백성을 위로하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이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하여 회개해야만 했지만, 사울은 도리어 백성들을 책망하였으니 우둔하기 짝이 없는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33: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고서 백성이 고기를 피 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하고

무신하게 행하였도다(바가드: בגד)’불신실하게 대하다’, ‘속이다’, ‘거짓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돌을 내게로 굴려오라이는 돌 위에서 짐승을 잡아 그 피는 땅에 쏟아 버리고 고기만을 먹게 하기 위한 초저로 보입니다. 율법에서도 피는 무릇 생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12:23-25).

 

34: 또 가로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각기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잡아먹되 피 있는 채 먹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모든 백성들이 피 채 먹어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도록 엄중히 단속하며 듣지 못한 백성에게도 모두 알리게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속죄의 방편으로 사용되던 피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하였던 것입니다(9:15-28).

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사울이 단을 쌓은 것에 대하여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백성들을 책망한 것을 볼 때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개의 학자들은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단을 쌓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처음이란 말은 사울이 율법의 규례를 좇아 제대로 제단을 쌓은 것이 이번이 최초의 경우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사울이 여호와의 율법을 완전히 떠나지 않고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섬겼다는 사실이 그의 이후 행실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러한 사울의 형식적 신앙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삼상 13:23-29).

 

36: 사울이 가로되 우리가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동틀 때까지 그들 중에서 탈취하고 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무리가 가로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가로되 이리로 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블레셋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에 사울은 다시 블레셋 군대를 섬멸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소와 양을 잡아먹고 기력을 회복하자, 그들을 독려하고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밤에 블레셋을 추격하러 가자는 사울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 아히야가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본 후에 행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아히야는 사울이 하나님께 뜻을 묻지 않고 전쟁을 하는 바람에 백성들을 곤겨에 빠뜨렸던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처럼 권면하였을 것입니다.

37: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하되 그 날에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이처럼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울은 즉각적으로 그 원인을 규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38: 사울이 가로되 너희 백성의 어른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

백성의 어른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대표하는 장로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로들이 차지하던 지위나 역할은 행정과 군대지휘관과 재판관까지도 겸하고 있습니다. ‘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사울은 여호와의 무응답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범죄한 자가 있는 연고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 백성을 대표하는 장로들을 소집한 것입니다.

 

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이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한다혹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삼상 20:42;26:63).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호와께 대한 거짓 맹세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두고서 한 맹세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보증과 서 약이 되었습니다(22:11 참고). 사울이 자신의 아들이라도 죽이겠다는 말은 죄인을 분명히 죽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자신의 무리한 명령을 간과한 사울의 또한 한 번의 경솔한 짓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은 이런 맹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열심인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살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만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백성 대답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이 꿀을 먹었기 때문에 난처해서 대답하지 못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27-30). 오히려 그보다는 사울의 맹세가 경솔하고 잘못된 것이기에 무언의 항변을 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요나단을 감싸 그의 생명을 보존한 점에 의해서도 충분히 뒷받침 되고 있습니다.

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편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편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하나님께 맹세하는 가운데 죄를 범한 자가 누구인지 물어도 백성들이 아무런 대답을 아니 하는지라, 사울은 제비뽑기 방식을 통하여 죄인을 색출하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죄인을 색출할 때에 외에 특정 인물을 선출할 때에도 제비뽑기를 시행하였습니다(삼상 10:20, 21;1:26).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16:33)는 신앙에 입각한 것으로, 곧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컨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실상을 보여 달라는 것은 확실한 답을 주소서’(NIV) 또는 완전한 제비를 보여 주소서라는 뜻입니다.(KJV) ‘뽑다(라카드: לכד)’는 제비뽑기와 관련되어 사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42: 사울이 가로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뽑으라(나팔: נפל)41절의 뽑다와 다른 것으로 던지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개 제비를 바닥에 던져 패를 보던 방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가로되 너희 행한 것을 내게 고하라. 요나단이 고하여 가로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요나단은 자신이 사울의 맹세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꿀을 먹었다는 것을 말함으로 자신의 행위에 잘못이 없었음을 주장하면서도 사울의 맹세대로 죽음을 달게 받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사울의 왕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복종하는 태도입니다.

44: 사울이 가로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요나단이 고의로 죄를 점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신의 맹세대로 요나단을 죽이려 합니다. 이는 부지중에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율법의 규정(4:3, 13, 14, 22-24)를 무시한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아직까지 자신의 실수를 생각지 아니하고 요나단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하여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이제가지 사울의 의견에 마지못해 동의했던 백성들이 요나단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단호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요나단이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내세운 백성들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백성들은 이번 블레셋과의 전투에서의 승리가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통하여 이루신 것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요나단을 정죄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도전적 행위로 간주하였습니다. 결국 백성들의 이러한 증언으로 인해 요나단은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이를 통해 사울의 명령과 맹세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된 것이었음이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블레셋군 추격 재개 여부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원인이 이제 해소되었기 때문에 사울은 다시 블레셋 군을 추격하여 섬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추격을 단념한 채 돌아선 것은 자신의 명령이 무모하였음과 맹세가 경솔한 것이었음이 드러나자 심리적 타격을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사울의 이러한 소극적 행동은 훗날 큰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번 기회에 완전히 섬멸될 뻔했던 그들은 본토로 돌아가 다시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재차 침공하여(삼상 28:4, 5) 그 전투에서 그만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고 만 것입니다(삼상 31:1-13). ‘올라가매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던 기브아(삼상 10:26; 15:34)로 되돌아간 것을 가리킵니다.

47-52: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사울이 재위 기간 동안 쌓은 업적 및 그의 가계를 부언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사울 왕에 대한 역사는 다른 왕에 대한 역사 서울 방식과는 상반되게 나타납니다. 즉 성경은 일반적으로 다른 왕에 대해서는 가계를 먼저 언급하고 업적이나 기타 다른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울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업적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스라엘 왕정 건설에 기초를 놓은 사울의 업적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고 이후 사울이 독자들에게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치는 것을 줄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단 한 번 곧 그의 마지막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과를 세움으로써 이스라엘의 국력을 보다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이처럼 많은 전쟁에서 매번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비록 초기의 겸손했던 자세를 잃어버리고 이후 인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하며 불순종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당신의 원하는 신정 국가로 확고히 설 수 있는 토대를 세우시기 위해 사울을 도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지나치게 의존하고 자신의 명예와 권좌를 위해 살았던 까닭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즉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증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끝까지 부합된 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끝까지 신앙의 경제를 마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이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 9:24, 25;3:14;딤후 2:5)

 

47,48: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나아가다’(라카드: לכד)‘라는 말은 잡다‘ ’포획하다‘ ’굳히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확고하게 굳힌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실제로 사사 시대 이래 혼란했던 이스라엘 사회에 정치적, 국사적 안녕을 구축하므로 이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번영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사울은 군사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주변 국가들을 꺾고 이스라엘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울의 왕권을 강화시켜 주었는데 그의 크나큰 업적이기도 합니다.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문자 그대로 당시 사방에서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대적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동편에, 블레셋은 서편에 위치하였습니다. ’소바는 다메섹 북쪽의 동부 수리아를 지배하던 아람의 한 도시 국가입니다(삼하 8:3-12). ’아말렉 사람을 치고아말렉 족은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후예들로(36:12)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는 유목민입니다(17:8).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요 그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리스위는 사울의 둘째 또는 셋째 아들인 아비나답의 다른 이름입니다(삼상 31:2; 대상 8:33; 9:39). ‘말기수아왕이 구원하신다.’는 뜻으로 형제들과 더불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의 아들입니다(삼상 31:2). 이밖에도 사울에게는 에스바알’(대상 8:33;9:39)이라는 넷째 아들이 있었는데 일명 이스보셋으로도 불리었습니다(삼하 2:8). ‘메랍다윗의 아내가 될 뻔 하였으나 므훌랏 사람 아드리엘의 아내가 된 사울의 장녀입니다.(삼상 18:17-19). ‘미갈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뜻으로 훗날 다윗의 아내가 된 사울의 차녀입니다(삼상 18:20-29). 그녀는 훗날 다윗을 비웃다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삼하 6:16-23).

50-51: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하마아스의 딸이요 그 군장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사울의 아비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비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아브넬나의 아버지는 넬이다라는 뜻입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그는 사울이 죽은 이후에도 사울 가문을 지지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삼하 2:8). 그러다가 나중에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 귀순했으나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하 3:6-30). ‘사울의 숙부 넬일찍이 사무엘의 만나고 온 사울에게 궁금증을 갖고 관심을 표명했던 자입니다(삼상 10:14-16).

 

52: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블레셋 군이 감히 이스라엘 경내를 침범하지 못했던 것(삼상 7:12-14)과 대조적 현상입니다. 이는 사울이 사무엘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삼상 12:13-15). 사울 왕의 통치의 한 특징은, 사사 시대의 지도자들과 달리 열방의 왕들과 같이 군대를 조직하여 상비군을 두었던 것입니다(삼상 13:2). 비록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는 못했지만(삼상 13:8-14;15:10-29) 백성들이 요구한 군사적인 면에서는 직임을 충실하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제14장 강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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