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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6장 강해: 기름 부음을 받는 다윗

chukang 2018. 2. 1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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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6장 강해: 기름 부음을 받는 다윗

 

사울이 왕으로 재임 중에 당시 베들레헴의 어린 목동에 불과하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며,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중에 사울 왕의 근위 부관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왕실의 법도에 적응하면서 새 왕으로 훈련을 받게 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3-15장에 걸쳐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할 신정적 왕으로서는 여러모로 부 적격한 자라는 판단이 되어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왕권 폐지 예언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새 왕이나 새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생각조차도 필요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언하신 대로 새 왕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 당시 베들레헴 어린 목동 다윗에게 기름부음을 행하신 것입니다. 당시 다윗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전혀 왕이 될 수 있는 면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는 눈은 인간과는 다르셨습니다. 다윗은 순수하고도 절대적인 여호와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윗은 왕으로 택정하시고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사울의 왕권 그리고 다윗의 기름부음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무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듯이 또한 다윗에게까지 기름부음을 붓게 하신 것은 곧 신정통치의 계속성을 나타냅니다. 만일 사울의 실정으로 인하여 다윗을 중심으로 사울의 정권을 무너지게 만들었다면 이스라엘의 선민 역사의 연속성 및 신정적 일관성은 단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왕이 된 다윗과 그의 가문에게 소위 다윗 언약(7:4-17)을 주셨습니다. 이는 다윗 가문의 택한 백성에 대한 영원한 왕권을 보장하는 것이며, 1차적으로는 유다 지파 출신인 그의 후손들이 육적 이스라엘 대한 왕권을 보유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영적 이스라엘인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왕이 되실 것을 가리긴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 사후 그의 자손 왕들 중에서 악한 왕들이 태어나기도 했지만, 이 다윗 언약으로 인해 한 번 주신 언약은 결코 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서 그 전날 폐지된 사울 왕조와는 달리 다윗 왕조는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선민 역사는 하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내적 분열과 타락을 하며 바벨론 포로시대와 암흑기를 지나면서도 다윗 언약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탄생하심으로 다윗 이후 시대에도 내내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스라엘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 신약 시대까지 이어져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신약 교회 성도들 모두에게까지 단절이 없이 이어져 온 것이 바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1-13: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대신할 새로운 왕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신정적 왕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바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무려 10여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고, 그것도 죽음 일보 직전에 까지 이르기도 한 사건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훈련시킨 기간이자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하는 의의를 지닙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내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울이 사무엘의 명을 어기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위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삼상 13:8-14). 그런데도 사울은 경성하지 않고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자 하나님께서는 이미 경고하셨던 바를 확정하셨습니다(삼상 15:1-29).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대신할 새로운 인물에게 기름 부어 세우고자 하시는데 곧 사무엘을 통해서입니다. 비록 사무엘이 사울에 대한 특별한 정을 지니고 있었긴 하나 그가 사울로 인하여 슬퍼하는 것은 단지 사적인 감정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사울의 폐위 이후 닥칠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환란을 더 걱정한 데서 비롯된 슬픔이었습니다. 이렇게 슬픔에 잠긴 사무엘에게 새로운 소망을 심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기름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을 세울 때 머리에 붓던 관유를 가리킵니다(30:30;삼상 10:1;왕상 19:16). 이러한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별하셨다는 의미와 신적 권한을 위임하며, 권능을 덧입혀 주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은 기름을 담을 수 있도록 동물의 뿔로 만든 그릇입니다(왕상 1:39). 때때로 뿔은 힘과 능력, 권세 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삼상 2:10). 관유를 뿔에 담아 붓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내리니(솰라흐: שׁלח)’는 는 본래 임명하다는 말로 여기에서는 사명을 주어 보내는 것입니다(9:12;6:140. 하나님께서는 슬픔에 싸여 있는 사무엘에게 장차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될 자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도록 사명을 주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유다의 작은 성읍입니다. 또 다른 곳이 있는데, 나사렛 북서쪽 11km 지점에 있는 스불론 지파의 성읍 베들레헴(19:15)입니다. 다윗의 아비인 이새는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난 오벳의 아들입니다. 룻이 본래 이방 여인으로서 선민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습니다(4:9-17). 그러므로 이방 여인이 포함된 가계로부터 신정 왕국 건립자인 다윗이 배출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오묘한 구속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이 다윗의 혈통을 좇아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예선하였다(라이티: ראיתי)”는 본래 기쁨으로 보았다란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때때로 특별한 선택을 할 때에 사용되고 있습니다(41:33). 본 절에서도 하나님께서 한 왕을 당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택정하셨다.’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울을 대신할 인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 ‘사울보다 나은 자’(삼상 15:28)란 말로써 시사되어졌습니다. 사울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정주의적 통치를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 뒤를 이어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이어갈 자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준비된 것을 볼 때에 이는 참으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통하여 주권적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권을 자신의 뜻에 부합하는 인물에게로 옮기겠다고 선포하셨지만,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아직 사울이 왕적 역할을 마저 감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엘은 새 왕을 세우기 위해 자신이 이새의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여전히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때에 새 왕을 기름 부어 세운다는 것은 반역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무엘은 그 일이 발각되었을 경우에 자신은 물론 이새의 집안까지 화가 미쳐 하나님께서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선한 자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사무엘의 염려를 불식시켜 주시는 지혜로운 조처를 알려 주셨는데 바로 제사를 통하여 이새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청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사(자바흐: זבח)’는 그 바치는 제물이 암송아지인 점(3:1-5)을 보아 화목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문제 제기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해결책입니다. 결코 사울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그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지 제사를 드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욱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중요한 사건을 앞에 두고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거짓이 없는 가운데 자신의 뜻을 이루시며 현실적인 사울의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하게 사무엘과 다윗의 집을 보호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주신 것입니다.

 

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를 드리는 자 간의 치교를 나타내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사와 달리 일단 하나님께 드린 제물 중 제사장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제사 드린 자가 가족 및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입니다.(7:15-18) 따라서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내려가 화목 제사를 드리는 중 그 성읍 사람인 이새와 그 아들들을 청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장차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정 왕국을 구현할 것임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삼하 7:17) 이것은 사울이 끝까지 하나님께 대하여 신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사무엘이 비록 자신의 통치권을 사울에게 이양하였다고 해도(삼상 12:1-25) 그가 여전히 이스라엘의 선지자요 사사임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은 사무엘의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해하며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혹시라도 사무엘이 자신들의 잘못을 책망하며 징계하러 온 것이 아닌가 하여 불안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라고 질문한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5: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로 몸과 의복을 깨끗케 하고 또한 무엇보다도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19:10). 이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4)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자세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부정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6:5). 그러므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과 의로움을 덧입어야 할 것입니다.(3:27).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사무엘은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그가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자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앞서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그의 외모가 중시된 점(삼상 10:23, 24)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압은 이새의 장자입니다. 그에 대해선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할 때 다윗을 비난하며 꾸짖은 일(삼상 17:28, 29) 외에 달리 알려진 행적은 없습니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외모와 같은 인간적 조건이 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울은 외모가 뛰어난 자였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장중에 온전히 사로잡히기만 하면 그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주의 일꾼이 될 수 있음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4:10-17;6:15,16).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실 때에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 받는 것, 없는 것들을 택하십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고전 1:29)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외모(아인: עין)’(eye)’, ‘중심(레브: לב)’마음(heart)’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외모가 육신의 눈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중심은 마음의 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의 판단 기준과 하나님의 판단 기준 간의 차이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하는 것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영적 눈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16:2;8:27; 살전 2:4).

 

8-10: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 하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비록 사사로서 그 어떤 사사들보다 신실한 자였으나 그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친히 알려주시기 전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새의 아들들을 차례로 보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아비나답은 둘째 아들로 그 이름이 사울의 아들 아비나답과 동일하였습니다. ‘삼마는 대상 2:13에서 시므아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새는 한 명씩 모두 일곱 명의 아들을 다 보이고 막내 다윗만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새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명의 아들들은 모두 외모로 볼 때에 다윗보다는 출중한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아비의 눈에 다윗은 여전히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다윗은 형들이 아비와 함께 사무엘의 초대 자리에 나아간 것과는 달리 제외되어 가축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직 어린 관계로 어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삼상 17:42). 이새도 역시 왕을 택하는 자리에 다윗이 참석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가축을 지키도록 했을 것입니다. 형제들 7명은 모두 하나님께서 택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막내아들을 데려오기 전에는 식사 자리에 앉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앉다(사바브: סבב)’둘러싸다’ ‘둥글게 원을 짓다라는 뜻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둘러앉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의 식사는 화목 제사를 드린 후 참석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동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을 만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마치기 전에는 결코 식사를 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그의 투철한 사명 의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뜻이면 언제나 그 일부터 반드시 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2: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그의 빛이 붉고이 말은 다윗의 볼이 붉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머리털이 붉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다윗이 대장부처럼 늠름하게 생겼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외양을 지녔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빼어나고눈에 총기가 있어서 초롱초롱 반짝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굴이 아름답더라.’ 비단 다윗의 외양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내면적 인품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내정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는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30세가 되어서입니다. 그가 어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당시는 20세 미만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3:8). 따라서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0여년 이상을 연단 받고 훈련되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지도자로 세움을 받기 전에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 받은 것(7:30)에 비견이 됩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 동안 세 번이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본 절에서와 유다 족속의 왕으로 세움을 받을 때와(삼하 2:3,4), 그리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입니다(삼하 5: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택하신 자 다윗을 사무엘에게 알려주셨고,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울의 경우와 대조적입니다. 다윗에게 임재한 성령께서는 이후 계속하여 다윗을 권념하고 인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임하였던 성령은(삼상 10:6-10)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은 이후 그에게서 떠났습니다(14). ‘성령의 감동은 영적으로는 물론 정치, 군사 기타 제반 분야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역량을 덧입힘 받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일꾼에게 허락하시는 특별한 은사입니다(고전 12:4-11).

 

14-23: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의 부름을 받아 자유롭게 왕궁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점차 다윗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사울이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신으로 인하여 번뇌하자, 사울의 신하들이 그의 정신적 고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금 잘 타는 다윗을 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이 다윗을 크게 신임하여 그의 병기든 자로 삼았고, 다윗이 사울을 위해 궁중에서 수금 타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울과 다윗이라는 두 인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자와 함께 하지 않는 자의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울이 한 나라의 왕이 되어 여러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이 그와 함께 하며 그를 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삼상 10:9, 10;11:6). 그러나 이제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자 그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영이 그 마음에 없는 자의 심리적 상태를 너무나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강성한 듯 할지라도 그 마음은 세상 염려와 불안 등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에게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자로 소개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활동이 외적인 형태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내주하시는 자의 심령을 변화시키시며 그로 인하여 그에게서 은근한 광채가 발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까지 맺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5:22,23).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닌 외양을 가졌던 다윗이 새 왕으로 선택된 것은 다윗의 순수한 여호와 신앙이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들어 당신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어 나가십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구속사는 하나님의 철저한 예정과 섭리 하에서 끊임없이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여호와의 신은 구약 시대에도 활동했던 성령입니다(3:10). 사울이 하나님을 저버리자, 그 동안 사울을 사로잡아 권능으로 역사하셨던 성령(삼상 11:6)께서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고 떠나신 것입니다. ‘악신(루아흐 라아: רוח־רעה)’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역사할 수 있는 사단의 영을 가리킵니다(1:12). ‘번뇌케 한지라(바아트: בעת)’압박하다’, ‘놀라게 하다란 뜻으로 사울이 육체적 심한 고통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역사를 허락하신 것은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일종의 징벌로 보는 것과 여호와의 신에 사로잡힌 차기 왕 다윗과 대조적으로 사울이 완전히 버림을 받았으며 그에게 선고된 심판이 결국 다 이루어지고 말 것(삼상 15:22-29)임을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15,16: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을 번뇌케 하온즉,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사울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제 그의 신하들까지도 알게 되었음을 증명하는 구절입니다. ‘수금은 지금의 기타와 유사한 현악기라고 합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서 음악도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은 현대 의학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이 근본적인 치료법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증상은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죄 사유함을 받지 않고서는 결단코 치유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사는 성도들도 이러한 점을 잘 구별해야만 합니다. 내가 만일 어떤 질병을 얻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부터 해야 빠르고 정확한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가 육적인가, 정신적인가, 부주의함 때문인가 하는 등을 잘 살펴야 하고, 어떠한 병이든지 치료 후에도 또 동일한 질병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7, 18: 사울이 신하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잘 타는 사람을 구하여 내게로 데려오라.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호기, 무용,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는 말을 통하여 다윗 얼마나 재능이 많고 인격적으로도 출중한 자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사자와 곰과 싸워서 쳐 죽일 수 있는(삼상 17:34-36) 담대함과 용기와 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들을 지을 수 있는 풍부한 감수성과 재능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더욱 충만해졌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하는 신하의 말을 보면 입증이 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은 장차 왕으로서 갖춰야 할 신체적, 감성적, 영적 성숙을 이루어 나갔던 것입니다.

 

19, 20: 사울이 이에 사자를 이새에게 보내어 이르되 양 치는 네 아들 다윗을 내게로 보내라 하매, 이새가 떡과 한 가죽 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그 아들 다윗의 손으로 사울에게 보내니

이새가 다윗을 통해 사울에게 보낸 충성과 경의를 표하는 예물입니다. 사울이 신하의 말을 듣고 다윗을 불러들이자 이새는 이에 다윗 편에 예물을 보내면서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새 왕이 다윗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우연한 일로 인해 본격적으로 성경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21: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병기 든 자는 주인의 무기를 들고 다니면서 주인의 뒤를 따르는 자입니다. 이런 복직은 주인의 특별한 신임을 받는 자가 아니고서는 맡을 수 없었으므로, 다윗이 사울에게 크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는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수행하는 중에 왕실 법도며 궁중 일을 익히면서 새 왕으로서의 자질을 다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22: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청컨대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하니라.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는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중드는 것을 허락하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다윗의 아비인 이새에게 정중한 태도를 구한 것은 그가 다윗을 얼마나 신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질투를 느끼기 전까지는(삼상 18:7) 이처럼 진정으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운 존재로 비춰졌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2:52).

 

23: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하나님의 신, 성령께서 함께 하는 다윗이기 때문에, 그가 수금을 연주하자 사단의 영은 그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다윗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것이므로 더욱 사단의 영은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수금 연주 역시 일시적인 효과만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에도 여전히 사울이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에게 고통을 당한 점(삼상 18:10)에 의해 분명해 집니다.

사무엘상 제16장 강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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