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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7장 강해: 다윗에게 고꾸라지는 골리앗

chukang 2018. 4. 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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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7장 강해: 다윗에게 고꾸라지는 골리앗

 

당시 무적의 장수인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군대 앞에 겁에 질려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용맹한 장수이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이 흘러나오고, 마침 형들에게 줄 음식을 가지고 온 다윗이 이 말을 듣고 분개하여,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겠다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아직 소년에 불과한 다윗입니다. 전쟁에는 참가조차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이 출전시킬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골리앗이 두려워서 그 아무도 출전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변변한 무기도 없고, 목동의 옷차림 그대로, 단지 물매(sling)만을 가지고 출전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였다는 것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외침과 같이 승리는 인간의 무기나 신체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잘 보여주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요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이기도 하였지만,

골리앗 앞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을 상실한 자의 초라고 무능력한 모습입니다. 거인 골리앗을 영적으로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원수 마귀의 세력을 상징한다고 할 때 평소 인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하던 사울의 이러한 비굴한 모습은 사단이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의 힘만 의지하는 자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소년 다윗은 정말로 무능력 그대로였으며, 어쩌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반드시 적장 골리앗을 이기게 해 주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시켜 단번에 쓰러뜨리고 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낸 것입니다. 승리는 이처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11: 다윗이 구속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바로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블레셋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일차 사무엘에 의해서(삼상 7:7-14),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에 대패하고(삼상 14), 한 동안 강성했던 이스라엘을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이스라엘은 사무엘과 사울이 결별하고 사울이 정신적 질환에 시달림으로써 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은 아마도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들이 당했던 수치를 씻을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골리앗은 정말 어마어마한 장수입니다. 키가 약 3m에 달하고, 머리는 놋 투구를 쓰고 몸에는 57kg에 달하는 놋 갑옷을 입었으며, 그가 가진 창날의 무게만도 약 7kg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영적으로 타락해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골리앗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당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골리앗도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다윗을 당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어떠한 존재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의 물맷돌에 쓰러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는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에 그 어떤 악한 존재와의 영적 싸움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 블레셋 사람들이 그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전에 믹마스 전투(삼상 14:31)에서 패한 블레셋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사울이 악신으로 고통속에서 약해진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왔습니다. 성도의 신앙이 약해지면 주위에서는 대적 마귀의 세력이 더욱 더 강하게 역사하게 됩니다. ‘유다에 속한 소고는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사이에 위치한 시 중의 하나입니다(15:35). 이곳에 블레셋이 진을 친 것은 유다 지역을 블레셋이 선제공격으로 침입했다는 것으로, 그만큼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위세에 억눌려 있는 상황인 것을 보여줍니다. 이 전쟁터는 벧세메스로부터 남쪽으로 약 6.4km 정도 되는 지점 혹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27km 정도되는 지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세가는 과거 여호수아가 아모리인을 축출하여(10:10, 11) 이스라엘에 편입된 영토입니다. 후에 르호보암이 이곳을 요새화하였고(대하 11:6, 9) 베벨론의 느브갓네살에 의해 침공당한 사실에서(34:7) 알 수 있듯이 해발 120m 정도되는 전략상 중요한 곳입니다. ‘에베스담밈피의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은 아마 이곳이 수많은 전투가 일어난 격전지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바스담밈으로 불리기도 합니다(대상 11:13).

 

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을 대하여 항오를 벌였으니

엘라상수리나무입니다. 이곳에 상수리나무가 무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골짜기(에메크: עמק)’로 일반적으로는 완만한 경사지를 뜻합니다. 이 경사지 바닥으로는 건기인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항상 물이 흘렀습니다. 따라서 당시 전투는 여름철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개울이 있었던 이곳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데 사용했던 돌멩이를 구하는 것도 용이했을 것입니다. ‘항오를 벌였으니(아라크 밀하마: ערכ מלחמה)’전투를 위하여 한 줄로 서다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대개 방어적 개념을 지니므로 당시 이스라엘이 소극적 태도로 전쟁에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연약한 신앙으로 인하여 블레셋을 두려워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3: 블레셋 사람은 이편 산에 섰고 이스라엘은 저편 산에 섰고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이스라엘이 전투에 소극적임에 반해 블레셋은 원래 진 쳤던 에베스담밈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시 이스라엘의 방어선이었던 엘라 골자기까지 진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골짜기’ 2절의 골짜기(에메크)와는 달리 가이(גיא)’입니다. 이는 높다는 뜻의 게와(גוה)’에서 유래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진영과 블레셋 진영 사이에 계곡이 있었으므로 전면적인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4: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싸움을 돋우는 자(이쉬 하베나임: אישׁ־הבנים)’사람(이쉬)’이중의 간격(베나임)’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이는 두 진 사이의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양 진영 가운데 서서 상대방에 대하여 싸움을 요청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군대를 대표해서 싸우는 관습은 유대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으나 헬라 문화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B. C. 18C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집트의 전설인 시누히트의 이야기에서도 이런 전쟁 관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B. C. 12C경 지중해상의 섬 갑돌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온 해양 민족이므로 이러한 전쟁 관습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골리앗유랑자, 방랑자라는 뜻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 전쟁에서만 언급되고 있으므로 정확한 인적 상황은 파악되지 않으나 랍비의 전승에 따르면 오르바(1:14)의 사생아이며, 엘리의 아들이며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법궤를 강탈한 자라고 하지만 그 근거는 희박하다고 합니다(삼상 4:11). 그러나 자신의 힘만 믿고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어리석은 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가드 사람이라’ ‘가드포도 짜는 틀이란 이름의 뜻이 가리키는 것처럼 풍요로운 곳입니다. 가나안 초기 원주민이었던 거인족 아낙 족속이 살았으며 후대까지 그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11:22). 골리앗이 대단한 거인이었던 것도 이런 아낙자손의 피를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5대 성읍 가운데 하나인 이곳의 유적은 아스돗 동남쪽 19km 지점에 있습니다.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한 규빗은 약 45cm, 한 뼘을 약 23cm로 보면 골리앗은 2m90cm가 넘는 엄청난 거인이었습니다. 이런 거인은 사실 손을 살짝 휘젖기만 해도 보통 사람은 넘어지고 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갑옷에 창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그 어떤 사람이라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주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임을 우리 성도들은 꼭 명심해야만 하는 신앙의 원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골리앗의 중무장한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투구(קובע)’코바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투구입니다. 골리앗이 쓴 투구는 우리말로는 같은 코바이지만 히브리어로는 כובע로 첫 자가 다릅니다. 이는 같은 투구라도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표기를 달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갑(카스케세트: קשׁקשׁת)’는 나무껍질 같은 것들이 벗겨지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성경에서는 주로 물고기의 비늘(11:9)로 번역이 됩니다. 전투 시에 몸을 보호하기 위해 헝겊으로 만든 옷 위에 작은 철판을 물고기의 비늘처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런 종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이나 장수만이 입을 수 있는 귀한 것입니다. 어린갑의 무개가 놋 오천 세겔이라고 했습니다. 1세겔이 11.5g이므로 전체 무게는 약 57kg에 달합니다. 이렇게 정확한 무게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확실하게 전쟁이 있었고,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후에 갑옷을 전리품으로 챙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6: 그 다리에는 놋 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경갑(미츠하: מצחה)’은 주로 이마(매차흐: מצח)’와 동일한 어근을 갖는 것으로 사람에게 있어 이마처럼 두드러지는 장식인 다리 부분을 감싸는 장비입니다. 이는 갑옷의 보조 장비로서 무릎 이하의 하반신을 보호하는 구실을 합니다. ‘단창치다’ ‘박살내다란 뜻의 키드( כיד)’에서 유래한 키돈( כידון)’입니다. 이는 들고 다니는 일반적인 창(하니트: חנית)와는 달리 주로 어깨 사이에 메고 다니다가 비상시에 던지는 보다 작고 가벼운 창이라고 합니다. 골리앗의 단창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7: 그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베틀채같다는 것은 창자루에 가죽으로 만든 긴 끈을 감아 놓은 것입니다. 이는 창을 던질 때 명중시킬 확률을 높이는 기능을 합니다. 나무로 만든 자루를 제외한 놋으로 만든 창날 부분만 무려 7kg이나 되었다는 것은 골리앗의 힘이 얼마나 센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방패 든 자견고한 투구와 갑옷, 그리고 경갑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패 든 자를 앞세움으로써 골리앗은 철저히 자신의 몸을 보호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위용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골리앗의 완전 무장한 위용은 현대적인 해석으로는 돈, 권력 등 각종의 세력으로 무장하여 다가오는 사단의 세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같은 외형적으로 그럴듯한 위압적 세력에 굴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신앙에 입각하여 다윗처럼 승리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8: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서 항오를 벌였느냐 나는 블레셋 사람이 아니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 아니냐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보내라.

방어 태세만 갖추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골리앗이 전쟁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나는 블레셋 사람이라는 말은 나는 블레셋 군대의 대표자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며,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울에 종으로 예속돼 있다고 조롱하는 말입니다. ‘신복(아바딤: אבדים)’노예’‘의 복수형입니다. 이는 블레셋이 도시국가 형태라고 하면 이스라엘은 사울에게 예속된 전제 국가임을 빗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입니다. 골리앗은 양쪽 군대가 다 볼 수 있는 골짜기에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면서, 한 사람이 나와서 자기와 결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양쪽 군대의 대표자끼리 결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 결과를 결정짓자는 것입니다. 이는 블레셋의 대표 전사 골리앗이 자신의 신체조건으로 볼 때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허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9: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골리앗의 자신만만한 말은 거침이 없으며,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면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종이 되겠다고 했으나, 이런 호언장담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이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삼상 17:52)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모욕(하라프: חרף)’ 이 말의 뜻은 발가벗기다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 포로의 옷을 벗김으로써 수치를 드러내게 하는 관습이 있었으므로 모욕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처럼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전쟁 포로를 대하는 것 같은 심한 말로 조롱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 단어는 꾸짖다’ ‘욕하다’ ‘불경스러운 말을 하다는 뜻으로도 사용이 됩니다.

 

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 말은 그들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들이 크게 두려워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군대와 지휘자들이 골리앗의 위용에 사기가 저하되어 겁에 질려 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이전에 암몬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지휘하여 크게 승리했던 용사였습니다. 또한 요나단도 블레셋 군인 2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용사였습니다(삼상 14:14). 그러나 지금은 골리앗의 도전 앞에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신장과 외모에 겁을 먹고 사기가 꺾여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이렇게 겁쟁이가 된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사울에게서 이미 하나님의 신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잠언 28:1에서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떠나게 되면 세상의 권력에 떨게 되고 하나님의 법보다도 세상의 법을 추종하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증거하는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12-21: 골리앗 앞에 모든 이스라엘이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골리앗을 물리칠 다윗을 전장으로 인도하시고 계셨습니다. 먼저 이새의 가문 및 다윗의 신분과 또한 그의 형제 세 명이 군대에 징집되어 전장에 가 있는 것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형제들을 위한 아비의 심부름으로 전쟁터까지 가게 된 사실 과 전장의 상황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섭리의 오묘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정적 왕정 체제를 새롭게 계승할 차기 왕으로 예정하신 다윗을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이렇게 인간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다윗을 전쟁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전쟁터에 이른 시기도 막 전면전이 개시될 시점에 맞추심으로써 다윗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고자 하시는 자신의 계획에 한 치의 오차도 없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우연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섭리에 의해 주권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사 어느 것 하나 우연이란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운행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또한 그분께 모든 것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대상 29:11-13;37:5;139:10).

 

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 많아 늙은 자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다윗에 관한 설명하게 앞서 제일 먼저 출신 지역을 밝히는 것은 이 지역이 갖는 구속사적 특수성 때문입니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이라는 말을 중복시켜 스블론 지파의 땅에 있는 또 다른 베들레헴과 구별하고 있습니다(19:15). 이곳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구해 내어 안정된 나라를 세운 다윗의 출생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후에 선지자 미가의 예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었습니다(5:2). ‘나이 많아 늙은 자이새에 관한 내용으로 이같이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새가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새의 8명 자녀 중 막내인 다윗이 성장한 것으로 보아 이새의 나이가 60세가 넘었을 것입니다. 본절과 16:10, 11에 이새의 아들이 여덟 명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대상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역대상의 조자가 원래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이 일찍 죽은 것을 고려해서 기록했거나 다윗을 제외한 택함을 받지 못한 아들의 수효만 일곱이었던 것을 밝히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제 삼은 삼마며

장성한 세 아들이라는 것은 징집 연령이 항상 일정했던 것이 아니지만 민 1:3의 규정에서는 20세 이상의 남자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즉 이새의 아들 중 3명이 20세가 넘어 징집을 당하여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압과 아비나답과 삼마입니다.

14: 다윗은 말째라 장성한 삼 인은 사울을 좇았고

아버지 이새는 나이가 많아 징집이 면제된 반면 다윗은 어렸기 때문에 소집되지 않았습니다. 13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새의 아들 3명만이 성년이 되어 사울이 전쟁을 위하여 소집한 대상자에 포함이 되었던 것입니다.

15: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베들레헴에서 그 아비의 양을 칠 때에

다윗은 그의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는 것이 주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터에 나간 군사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가족들이 공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 형들이 필요한 것들을 집에서 마련해 주면 전쟁터로 가서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16: 그 블레셋 사람이 사십 일을 조석으로 나와서 몸을 나타내었더라.

그 블레셋 사람은 골리앗으로 전쟁은 시작이 되지 않았고, 서로 대치한 상태에서 골리앗만이 이스라엘에게 겁을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블레셋으로서도 전에 이스라엘에게 패한 기억으로 인하여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블레셋으로 주저하게 만드신 이는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계셨으며, 다윗을 준비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하신 것입니다.

 

17: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볶은 곡식구운 완두콩을 뜻합니다. 이것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비상식량으로 적절한 음식이라고 합니다. 즉 추수한 곡식을 냄비에 볶아 다시 가공하지 않고도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심상 25:18;삼하 17:28;2:14) ‘한 에바는 약 23리터입니다. 이새가 볶은 곡식 23리터와 더불어 떡 열 덩이, 치즈 열 덩이를 보낸 것은 이새가 가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국심이 투철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18: 이 치스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치스(할라브: חלב)’는 문자적으로는 우유를 가리킵니다. 실제로는 우유를 응고시켜 운반하고 먹기 좋게 만든 치즈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안부를 살피고안부는 솰롬(שׁלום)으로 평화, 안전 등 복합적 의미를 지닙니다. ‘증표를 가져오라이새는 아들 다윗을 전쟁터에 보내면서 그 아들들의 안부와 음식 전달 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증표를 가져오도록 요구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윗의 형들이 글을 몰랐기 때문에 편지 형식이 아닌 증표를 요구했다는 것과(smith) 그것은 증표가 아닌 서신의 형태였을 것이다(Fay)는 두 견해가 있습니다.

 

19: 때에 사울과 그들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는 중이더라.

이는 실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계속해서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큰소리로 모욕을 하면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 상태이며, 양 군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포괄적으로 볼 때에 전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20: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의 명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 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하며

다윗이 전쟁터로 떠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양 지키는 자에게 양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윗이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고 성실하며 순종을 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격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영(아갈: עגל)’둥글게 하다란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진의 형태는 짐마차들과 병거를 빙 둘러 세워 방어벽으로 삼은 일종의 야전 요새라고 보입니다.

 

21: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람이 항오를 벌이고 양군이 서로 대하였더라.

아직까지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실제적인 전투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서로 대치 상황에서 상대방의 약점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2-40: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광경을 본 다윗은 크게 분개하게 됩니다. 형들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사울에게 골리앗과 싸울 수 있도록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오직 물매와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가지고 골리앗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전쟁터에도 나갈 수 없는 이 어린 다윗이 어떻게 하여 이런 용기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다우시은 이방 민족인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것을 듣고는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그 치욕을 제거하고자 하는 의분(義憤)을 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불신자들에 의하여 침해당하고 모욕을 받는 것을 묵과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불신자에 의해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 받는 것을 보고도 의분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악에 동조하고 방조한 책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열정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음을 볼 때에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형까지 비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성도들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과 조롱 속에서도 결코 자신의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2: 다윗이 그 짐을 짐 지키는 자의 손에 맡기고 군대로 달려가서 형들에게 문안하고

짐 지키는 자다윗은 아버지의 관심사인 형들의 안부를 신속히 확인하기 위하여 짐을 맡기고 바로 형들에게로 갔습니다. 여기에서 짐 지키는 자는 보다 후방에서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직책을 맡은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직접 형들에게 음식을 준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지휘 계통을 통하여 형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형들을 만나 문안 인사를 할 때에 마침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말을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항오양쪽 군대가 전투를 위해 정렬해 있는 것입니다. 양쪽 군대가 포진을 한 후 40일이 지나도록 대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서 심히 두려워하면서 골리앗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하려고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도망하게 된 이유는 물론 골리앗의 위세가 너무 무섭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스라엘 지도자 사울로부터 하나님의 신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이 떠나 있다면 어쩔 수 없이 악의 세력에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는 길은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을 따라 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5: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사울은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 있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큰 상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많은 재물을 주며 둘째 왕의 사위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아비의 집 즉 가문 전체를 자유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는 세금이나 혹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부역과 같은 의무를 면제시켜 준다는 뜻입니다.

 

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치욕은 문자적으로 욕하다’ ‘꾸짖다’ ‘나무라다는 뜻으로 10절의 모욕과 같은 의미입니다. ‘제하는(수르: סור)’이라는 말은 떠나다’ ‘길을 잘못 들다는 뜻이나 여기에서는 없애버리다라는 뜻으로 NIV에서는 옮기다’(remove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골리앗이 이스라엘군대를 하나님의 군대가 아닌 일개 사울의 신복으로 격하시키고 업신여겼던 모욕 행위(8)를 제거한다는 것으로써,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없이하여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할례 없는할레는 남성의 성기 끝의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은 당시 히브리인들만이 행하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앗시리아 등 몇 이방 종족을 제외하고는 많은 근동의 종족들도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서의 할례는 깊은 종교적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할례를 받은 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할례 제도는 창 17장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의식은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시였으며,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그 공동체세서 추방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 할례 받지 못한 자라는 말을 한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욕했다는 것이며, 동시에 골리앗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이 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사시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살아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방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과 전혀 다른 차원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한 것에는 할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골리앗의 거대한 외모와 큰 병기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신앙을 지닌 것입니다.

 

27: 백성이 전과 같이 말하여 가로되 그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여차 여차히 하시리라 하니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약속된 상급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더 많은 상급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26절과 관련해서 왕이 많은 상급을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징계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장형 즉 맏형 엘리압은 다윗이 하는 소리를 듣고 화를 내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에게 맡겨진 양치는 일을 하지 않고 전쟁을 구경하러 나왔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내는 세속적인 분노였습니다. 엘리압은 다윗의 행동이 양치는 목동으로서 신분을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라고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큰 형으로서 어린 다윗의 말을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며, 미처 다윗의 신앙에 대하여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어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29: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다윗은 자신의 한 말에 대하여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는 동시에, 그 기름부음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골리앗을 죽여 반드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야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었습니다.

 

30: 돌이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전과 같이 말하매 백성이 전과 같이 대답하니라.

돌이켜형의 책망에 구애치 않고 곧 바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굽힐 줄 모르는 다윗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하나님께 대한 책임감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내지는 성실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은 골리앗의 말에 겁에 질려 있는데, 다윗은 오히려 골리앗을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라고 깔보면서 그를 죽이는 자에게 주어질 상금에 대하여 묻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말을 들은 한 병사가 사울에게 보고하였고, 그 말을 들은 사울은 급히 다윗을 불렀던 것입니다.

 

32: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 앞에 간 다윗은 낙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위세에 눌리고 위축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왕인 사울과 다윗이 하는 말이 거꾸로 된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람(아담: אדם)’ 앞에 정관사 : ה가 붙지 않은 것은 한 사람을 뜻합니다. 즉 다윗의 말은 그 누구도 골리앗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낙담은 마음이 쓰러지는 것, 즉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리앗의 말 때문에 놀라서 크게 두려워했다고(11)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하게 사울에게 두려워 말라고 마치 어른이 아이게 말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다윗의 믿음이 얼마나 크고 담대한지를 알게 합니다. ‘주의 종이 가서즉 다윗은 자신을 사울의 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과 신하의 신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군사들이 낙심하고 있는데 다윗은 어린 소년으로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합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울이 다윗을 불러 온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가 궁금했을 뿐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인 것을 보고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골리앗의 적수가 될 수는 없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즉 다윗은 소년이고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비교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34,35: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난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다윗은 목동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친히 체험하였습니다. 자신이 양을 칠 때에 곰이나 사자가 와서 양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자신이 쫓아가서 사자와 곰을 쳐 죽이고 양을 구해 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자나 곰도 쳐 죽였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 이방 블레셋 사람을 못 죽이겠습니까? 반드시 죽이고 말겠습니다.’ 라고 다윗은 단호하게 자신의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함께 하시기 때문에 능히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오늘날 우리 성도가 믿음만 있다고 하면 이단사설과 악한 세상풍조로부터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자보다 외형상 험상궂은 곰을 더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곰과 싸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곰을 공격할 때에 두 발로 일어서서 자세를 췬다고 합니다. 당시 목동들은 물맷돌이나 지팡이로 맹수의 급소를 공격해서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 수염(자켄: זקן)을 잡고일반적으로 사람의 수염, 그리고 수염을 가진 노인 장로를 뜻하는데, 사자나 곰에게는 이러한 수염이 없으므로 턱이나 목구멍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갈대아 역에서는 턱으로, 70인 역에서는 목구멍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대조 되는 블레셋에 대한 다윗의 대답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이 없는 블레셋임을 말하며,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과거에 자신이 잡아 죽인 짐승에 비유하여 비하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이 여호와의 힘을 덧입어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장담하고 있습니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사자와 곰을 물리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블레셋의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데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하실 것이라는 용기와 확신에 가득 찬 다윗의 신앙고백과 같은 대답입니다. (야드: יד)’ ‘능력으로 번역이 되는데, 여기에서는 블레셋의 장수인 골리앗의 막강한 힘을 뜻합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가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것은 첫째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다윗의 확신이 사울로 하여금 허락할 용기를 주었고, 둘째 다윗의 침착함과 담대함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이 간 것입니다.

 

38,39: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사울은 골리앗의 무장한 모습을 보고 다윗에게도 군복을 입혔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옷을 입혔다는 것은 대단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떤 외적인 격식이 없어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익숙할 리가 없고 다시 군복을 벗었습니다.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다윗은 평소 목동 복장으로 골리앗과 대적할 준비를 합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물매와 알맞은 크기의 돌멩이를 취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의 준비된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무턱대고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준비할 것은 준비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막대는 양칠 때에 사용하는 것이고, 물매(켈라: קלע)는 주로 양가죽을 엮어서 만드는 것으로, 양떼의 통제, 맹수 방지, 전쟁 장비 등으로도 이용이 되었습니다.

 

41-54: 혈혈단신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 채로 겨우 물매와 돌멩이 다섯 개만을 가지고 골리앗과 싸우기 위하여 나가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실제 싸우는 장면보다 다윗과 골리앗의 설전(舌戰)에 더 많은 할애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의 영적 상태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의 승리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육체적 조건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그 승패가 달려 있는 것과 하나님께 온 인류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선과 악의 영적 싸움의 예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감으로써 신앙과 불신앙, 참 신과 우상의 대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하나님을 부인하며 자기 능력과 세상을 의지하는 교만한 자들을 상징합니다. 다윗은 비록 연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불의의 세력과 대항하는 참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결론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의 말로는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을(37:35, 26)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성도들은 악의 세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41,42: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를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장수 앞에서 방패를 든 자가 앞서는 것은 화살이나 돌 등의 기습공격에 방비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골리앗입니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다윗을 발견하고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모가 어린 것을 보고 업신여기니(바자: בזה)’ 경멸’ ‘멸시라는 뜻으로 어떤 것에 가치를 별로 부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다윗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비웃음을 웃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다윗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그것은 곧 이어 패배하여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자신을 대적하기 위해 나온 다윗의 작은 체구와 옷차림과 들고 있는 막대기를 본 골리앗은 조롱하였습니다. ‘는 당시 가장 천하게 여겼던 짐승이며(왕상 21:23), 막대기는 양치는 목동들이 쓰는 한쪽 끝이 구부러진 지팡이입니다. 이것으로 양을 몰기도 하고, 맹수의 침입으로부터 양을 보호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조롱하였지만, 다윗은 그가 한갓 짐승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당시 근동의 이방인들은 시람이 신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함으로써 그 효과가 다윗에게 미치도록 시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발락도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람을 초빙했었습니다(22:6). 그러나 까닭 없는 저주는 아무 효과가 없다고 했습니다(26:2). 오직 하나님의 저주만이 효과가 있습니다(37:22).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그를 저주하겠다.(12:3)’ 따라서 하나님의 종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며 자기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것입니다.(참고: 민수기 22)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으로 인해 혹시 기세가 올라갈까 하여 저주하여, 너를 죽여서 새와 들짐승의 먹이로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싸움에 앞서 적대국을 저주하고 위협하는 식의 말이 오가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온갖 저주의 말을 함으로써 적국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반대로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똑 같은 말로 대응합니다. 시체가 묻히지 못하고 지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패전국의 장수나 큰 죄를 범한 사람에게 시행하던 관습이라고 합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싸우는 하나님의 전사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오는 골리앗의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힘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맛서 승리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골리앗의 무기는 자신의 체구와 용맹성과 칼과 창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말 속에서 골리앗의 무기와 다윗의 신앙이 분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8:31) 다윗은 목숨을 건 싸움에서 어떠한 무기도 의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세상적 힘과 하나님의 영력의 싸움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세력에 대한 진정한 승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에 있습니다.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붙이시리니물리쳐 승리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물리쳐 자기 백성들을 완전한 승리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전쟁에서의 승리의 근원은 세상적인 힘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말하는 다윗의 확고한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다른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백성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모욕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알릴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적들과 싸울 때 도움과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강한 신앙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시어 블레셋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족속에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우주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것처럼 전쟁의 승패도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섭리하심에 의해 좌우가 되는 것입니다(대하 20:15;127:1;144:1). 전쟁을 통한 승리로서 여호와의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입니다.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골리앗은 중무장을 한 거구였기 때문에 행동에 부자연스러웠으나, 다윗은 특별한 어떤 무장도 없었기 때문에 블레셋 진영을 향하여 빨리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은 골리앗의 중무장한 모습을 보고 그의 유일하게 노출된 이마를 향해 물맷돌을 던져 호리도 틀림이 없는 솜씨로 골리앗이 쓰러졌습니다. 이는 물론 다윗의 훌륭한 물매 솜씨도 있었지만 그보다 앞서 하나님의 더우심이 그곳에 명중하게 하였던 것임을 믿습니다.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던진 단 한 번의 물매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혀 뇌손상 등의 효과로 단 번에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직역하면 그는 그의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가 됩니다. 이런 표현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항복이나 상대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모욕하던 골리앗이 결국 하나님께 굴복할 수밖에 없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선택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47절과 같이 전쟁의 승리는 힘이나 군사의 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칼과 창을 사용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순수한 믿음이었으며, 또한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칼이 없었더라.’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크신 능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밟고는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다윗이 완전히 승리하였음을 가리킵니다. 우상의 이름으로 나온 골리앗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 다윗과의 싸움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다윗이 악의 세력을 눌러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악의 세력과 싸우게 되는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만을 순종하며 따르게 될 때 능히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7:15;2:150. ‘그 머리를 베니적장의 머리를 베는 것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 전쟁 관습이었으나 특히 다윗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모욕한 자에 대한 징벌의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승리를 확신하였던 골리앗이 예상 외로 단 번에 패배하자 자중지란이 일어나 블레셋 군사들이 도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악의 세력은 겉으로는 강해 보이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블레셋의 퇴각은 이전에 골리앗이 공언한 전쟁에 진 자가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약속의 위반기도 합니다.

 

52,53: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을 노략하였고

블레셋의 패주와 이스라엘의 추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겁에 질려 잔뜩 움츠리고 있던 이스라엘이 벌써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블레셋을 쫓아가는 대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셨던 것입니다(고전 1:27).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주요 성읍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에그론은 블레셋의 5대 성읍 중의 하나입니다. ‘가이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골짜기혹은 가드즉 골리앗의 고향이었던 블레셋 도시의 잘못된 기록으로 보기도 합니다. 70인역은 후자의 견해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확성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정확합니다. 다만 시간이 많이 흐른 후대에서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을 노략하였고이는 블레셋 진영에 쌓여 있던 물품들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전리품을 취하는 것은 일반 관습이었으나, 이 경우는 잘못된 행위로 보입니다. 당시 블레셋의 물건들은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로 모두 훼멸시키거나(삼상 15:3), 지도자의 지휘에 따라 처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전리품의 관리가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것은 군대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 절에서 나오는 노략(솨사스: שׁסס)‘는 합법적인 전리품 획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탈취한 것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2:14; 30:16).

 

54: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예루살렘은 여부스의 성읍이었고 후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이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습니다(15:8;삼하 5:5-9). 그러므로 블레셋과의 싸움이 끝난 후 바로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에 다윗이 왕이 되고 난 후에 있었던 일로 보기도 합니다. 혹자는 당시에도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살고 있었으므로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고 보기도 하지만, 매우 가능성이 낮은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갑주(켈리: כליׂ)는 단순히 갑옷만이 아니라 장신구까지 포함합니다. 골리앗이 가지고 있던 무기가 모두 포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에 있던 자기 집에 보관했다가 후일 칼은 놉에 있던 여호와의 성막에 기증하였습니다(삼상 21:8, 9).

 

55-58: 전쟁에서 승리한 후 큰 공을 세운 다윗이 사울 왕 앞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의문은 사울이 다윗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미 앞선 내용에서는 사울은 다윗과 그의 가문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삼상 16:18-23). 일부 학자는 이를 빌미로 성경의 편집설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리고 보수적 견해를 가진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부자연스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울이 다윗의 가문에 대해서 재차 자세하게 물어 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하기도 합니다. 사울이 정신 질환으로 다윗의 형편에 대해서 깊이 알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윗의 승리에 대한 상급을 내리기 위하여 다시 물어 본 것이다. 그러나 앞 뒤의 문맥을 볼 때에 위의 견해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유를 저자의 의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저자는 비록 세상에서 지극히 보잘 것 없고 잘 아려지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비록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서 떠났을 때의 비참했던 모습과 잘 대조를 이루어 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저자의 의도는 사울의 쇠퇴와 다윗의 부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하여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자라고 하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한 자는 참패를 당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역사에 그 이름이 길이 남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가 의지할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변함이 없으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55: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감을 사울이 보고 군장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 아브넬이 가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군장(사르 차바: שׁר צבא)’군대(차바)’란 말과 수령’ ‘장관’ ‘지배자(사르)’의 합성어입니다. 이로 보아 당시 아브넬은 이스라엘 군대의 통솔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사촌으로서(삼상 14:50, 51), 사울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56: 왕이 가로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청년(에렘: עלם)’시야를 가리다.’(아람)에서 유래한 말로 지금가지 전혀 부각되지 않았던 어린 사람’ ‘풋나기등의 뜻입니다. 이처럼 이미 사용되었던 소년(나아르: נער)’이란 말보다(35) 더 연소함이 강조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군대 징집도 면제될 정도의 어린 자가 큰 일을 해낸 데 대한 감탄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57: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의 앞으로 인도하니

골리앗의 머리라는 큰 전리품을 획득한 다윗에 대해 대장군 아브넬이 직접 영접하여 사울에게 인도한 것은 그만큼 다윗을 크게 예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골리앗의 머리를 베고 돌아오는 다윗을 영접하였다는 것은 사울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사울은 다윗의 가문에 대하여 더욱 깊이 알고 싶어 했으므로, 다윗의 대답은 이 말 외에도 많았을 것이지만, 성경 기록의 특성상 핵심적인 내용만 추려서 기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상 제17장 강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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