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 21장 강해: 아기스 앞에서 미친척하는 다윗

chukang 2018. 9. 1. 22:03

사무엘상 21장 강해:  아기스 앞에서 미친척하는 다윗

 

다윗의 도피 생활은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기는 19:9-22:23로 기브아 다윗의 본가에서부터 헤렛 수풀까지로서, 비교적 도피에만 급급했던 시기였습니다. 2기는 다윗이 자신의 추적자 사울의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고 나아가서 도피 생활 중에서나마 충직한 추종 세력들의 도움으로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는 23:1-26:25의 시기입니다. 3기는 27:1-삼하 2:1까지로 절대적인 위기에 몰린 다윗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시기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도피 기사는 신정 왕국의 초대 왕으로 선출이 되었으나 신본주의적 자세를 갖지 못하여 왕위 폐지 선고를 받은 사울이 순수한 여호와 신앙으로 신본주의적 자세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준비된 왕 다윗을 부당하게 핍박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함께 다윗의 신앙 및 대처 자세를 상세하게 보도하여 영적으로는 사단과 세상이 그리스도와 성도에 대한 핍박과 이에 대한 성도의 자세라는 전 구속사적 현상을 극명하게 축약하여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온갖 핍박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다윗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9: 다윗이 놉 땅으로 피신한 기사입니다. 이 같은 다윗의 도피 생활은 그를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과거 모세를 출애굽 지도자로 삼으시기 전에 무려 40년간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것처럼(7:29, 30),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기 전에 먼저 연단의 기간을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놉 땅으로 피신하게 이끄신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그곳의 제사장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만 피신자란 자신의 처지를 숨긴 채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구하여 먹은 다음, 칼을 구해 무장을 합니다. 다윗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사울의 목자장이었던 도엑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전에 다윗이 가졌던 담대한 자세와는 대조되기는 합니다(삼상 17:41-54). 사실 다윗은 그 어떤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뜻을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그만 순간적으로 인간적인 실수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게 되는 육체적인 한계와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다윗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25:30;24:8, 9)을 먹었다는 점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그 같은 떡을 주면서 단지 그와 그의 부하들이 부녀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므로 의식상 정결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입니다(3-6). 이는 의문(儀文)의 규정으로 따지면 율법을 여기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훗날 예수님께서는 이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12:3, 4, 7). 이러한 사실은 율법을 주신 근본 취지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있음을 잘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문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에 있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다윗은 요나단과 작별한 후에 놉 땅으로 갔습니다. ‘(נב)’은 예루살렘 북방 4km 지점에 있는 성읍으로 제사장들이 거주하던 소이입니다(삼상 22:19). 과거 블레셋의 공격으로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되자 제사장들은 에봇을 가지고 놉으로 간 것 같습니다(삼상 4:11). 따라서 놉에는 제사장이 여호와께 제사 지내던 성소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와 같이 제사장과 성소를 찾아간 이유는 자신이 어디로 피해야 될지를 여호와께 물으며 피신에 필요한 양식과 무기를 구하기 위함인 듯합니다(삼상 22:10).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제사장을 찾는 것은 사사 시대 이래 사울의 통치기까지는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즉 블레셋과의 전쟁 중 궁지에 몰린 사울이 제사장을 찾아 왔던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삼상 14:36-45). 아히멜렉은 엘리 제사장의 증손 즉 엘리의 아들인 비느하스의 손자로서 사울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히야와 동일 인물로 추정됩니다(삼상 14:3;22:9). 히브리어로 떨며(하라드: חרד)’는 흔들리다, 두려워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한 상황 앞에서 감정적인 동요로 인해 일어나는 심한 떨림입니다. 불안하여 떠는 상태입니다. 통상 수행원을 거느리고 다녀야 할 사울 왕의 사위인 다윗이 시중을 드는 사람도 없이 뜻밖에 혼자 나타나자 아히멜렉은 다윗이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을 왕의 명령을 가지고 왔으리라고 추측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같이 도망하는 사람들은 부근에 숨어있게 했습니다. 아마도 제사장과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다윗의 다급한 심정에서 나온 변병입니다. 왕의 은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지만 소년들을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실 때에 그와 함께 한 자들’(12:3, 4;2:25, 26; 6:3, 4)이 진설병을 먹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히멜렉은 사울과 다윗 사이에 있었던 최근의 사건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그에게 사울을 피하여 도망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사실을 알게 되면 사울 왕의 보복이 두려워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거짓말은 나중에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들에게 큰 재앙을 가져왔고(삼상 22:9-19), 다윗은 후에 그가 이 모든 일을 일으켰노라고 침통하게 고백하였습니다(삼상 22:22).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지금 당신의 손아래 무엇이 있습니까? 나의 손 안에 떡 다섯 개를 주십시오. 또는 발견되는 것을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 요청은 피난길에 있는 다윗과 일행들의 절박한 상황을 말해줍니다. ‘수중에손 아래로 번역되며 당신의 권한으로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떡 다섯 개는 다윗의 일행이 당분한 먹을 수 있는 식량이며, ‘무엇이든지당신이 발견할 수 있는 것들로 번역되며, 떡과 함께 먹을 수 있는 포도주와 같은 음료수를 말합니다.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恒用)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항용의 떡은 평상시에 먹는 일반 떡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보통 떡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거룩한 떡 즉 여호와 앞에서 물려낸 진설병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만이 신성한 장소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었으나 그는 다윗에게 몇 덩어리를 건네주는 융통성을 보였습니다. 다윗이 왕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여행을 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즉 소년들이 성행위로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조건하에서 거룩한 떡을 먹도록 저들에게 건네 준 것입니다.(15:18) 이는 긴급 상황에서 아히멜렉이 율법의 근본정신인 이웃 사랑(22:39)을 실천하기 위하여 진설병에 대한 문자적 규례에 얽매이지 않은 매우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 규례의 근본 목적은 진설병 곧 거룩한 떡이 부정하게 소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19:18;12:5,6; 2:25, 26).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삼 일은 다윗이 도피했던 기간입니다.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에서 가까이(아차르: עצר)’보류하다’ ‘억제하다’ ‘삼가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4절의 가까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4절에서는 보호하다라는 뜻으로 솨마르(שׁמר)가 사용되어 단순히 그 소년들이 여자로부터만 그들을 지켰다면이란 뜻인 반면에 다윗은 자신들이 능동적으로 성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소년들의 그릇그릇(켈리: כלי)인데 이 단어는 다양한 뜻으로 번역됩니다. ’갑주‘ ’가방‘ ’가구‘ ’악기‘ ’사물‘ ’연장‘ ’용기‘ ’무기등입니다. 이 명사는 주어진 봉사나 직업에 적합한 장치, 용기, 도구 등을 가리키는데 각 상황에 따라 적젌한 단어들로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이 그릇을 해석하는데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소녀들의 떡 그릇, 혹은 무기나 옷, 혹은 소년들의 몸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이라는 해석등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해석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문맥에 다라서 제일 마지막의 견해를 따른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성결(카다쉬: קדשׁ)‘는 일차적으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거룩, 또는 거룩한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들을 지칭하며, 이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성결 됨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성결이란 용어를 거듭 사용한 것은 자신과 부하들이 의식적으로 부정을 범한 일이 없기에 그 떡을 먹을 수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진설병(레헴 하파님: לחם הפנים)면전의 떡이라는 뜻입니다. KJV에서는 진열된 빵(Showbread)', NIV에서는 면전의 빵(the bread of the Presences)'로 번역했습니다. 이 떡은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여호와의 목전에 즉 성소의 떡 상에 진열해 놓는 것입니다. 이 떡은 일주일에 한 번씩 교체했으며 율법의 규례에 따라 성소에서 사는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24:9).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7일 동안 성소의 제단 위에 놓였다가 더운 떡을 드리는 날, 즉 안식일에 물려 낸 떡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온 후 일부러 물려 낸 것이 아니라 이미 교체하여 물려 낸 것입니다.

 

7: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본절에서 에돔 사람 도엑이 소개된 것은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한 행동을 도엑이 보았고 후일 이 일을 사울에게 알리게 된 경위를 설명(삼상 22:9, 10)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도엑이 성막에 일정 기간 머문 것이 종교적 이유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성소앞에 머물렀다고 표현하지 않고 굳이 여호와앞에 머물렀다고 표현하였고, 머물다는 말이 원어상 수동형으로서 의무에 따른 행위임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어떤 학자는 도엑이 개종자이기 때문에 어떤 서원을 행하거나 정결 의식(13:4)을 행하기 위해 성막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아무튼 다윗은 도엑이 있다는 사실에 불길한 예감을 갖게 되었고(삼상 22:22)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서둘러서 가드로 도피하여 피난처를 찾게끔 만든 것 같습니다. ’도엑이란 이름은 불안이며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히멜렉과 다윗 사이에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후에 이 사건을 사울에게 고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이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제사장 85명을 죽인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편 52:1-9에서 도엑의 간악함과 잔임함을 악한 계획으로 행하는 자, 그 혀가 삭도와 같고,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재물을 의지하는 자, 악으로써 자기 자신을 방위하는 자, 그리고 멸망을 당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목자장도엑은 이스라엘이 에돔을 원정한 후(삼상 14:47) 사울을 섬기기 시작하여 사울의 목자장이라는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당시 목자장이란 한 가정의 중요한 재산이었던 가축을 지키는 우두머리인데, 재산과 관련되어 있기에 주인의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상 22:17, 18에 보면 도엑이 시위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그에게 상당한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보면 단순한 목자장이 아닌 시위대의 우두머리였다고 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8: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은 음식 외에 아히멜렉에게 무기를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도엑과 같은 사울의 심복을 보고서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할 만한 무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기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왕의 일이 급했기때문이라고 둘러 대었습니다. 다윗은 앞서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하는 자기의 처지를 숨기고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신분으로 자기를 위장했기에, 연거푸 거짓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9: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10-15: 다윗이 놉 제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도엑을 보고 그가 사울에게 밀고를 할까 두려워하여 블레셋의 한 성읍인 가드로 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다윗은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어 미친 자 행세를 한 후에야 겨우 위기를 넘기고 아둘람 굴로 도망하게 됩니다. 왜 다윗이 블레셋 지역으로 피신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을 죽인 지가 상당히 오래 되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 또 적국의 장수가 귀순해서 환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다윗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죽을 뻔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위기를 간신히 극복한 후 사람에게 피하려 했던 자신의 생각이 실로 어리석었다는 사실과 오직 하나님만이 환난 날의 진정한 피난처 되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34). 이는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고난의 도피 생활을 통하여 참된 의지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으며 하나님 안에서만 비로소 참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 사울이 왕으로 군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왕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의 뛰어난 활약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보다 이방인들에 의하여 먼저 왕으로 불렸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의 입을 빌어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할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불신자의 입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대신 그 모든 일이 택한 백성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성도들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다윗은 아히멜렉과 이별한 후에 사울을 매우 두려워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했습니다. 원문에는 두려워하여라는 단어가 없지만 사울 앞에서(미페네 솨울: מפני שׁאול)’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다윗은 놉에서 사울의 목자장 도엑을 보자 극히 당황했으며 마치 사울이 추격해 오는 것과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로 그 날사울의 얼굴을 피하는 심정으로 급박한 피신을 한 것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드는 가사 북쪽 약 32km 지점에 있던 블레셋의 5대 성읍 가운데 하나이며(13:3) 다윗이 죽였던 골리앗의 고향이고(삼상 17:4), 과거 다윗이 공격했던 곳입니다(삼상 17:52). 이처럼 가드는 다윗과는 원수 관계에 있었으나 당시 다윗은 매우 급박했고 사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블레셋 도시 가운데는 비교적 가까웠던 가드로 도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런 결정은 결국 자신을 또 다른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시편 34편은 본 장의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는데, 그 제목에는 가드 왕 아기스아히멜렉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전자는 가드 왕의 고유 명사이고 후자는 애굽의 통치자를 바로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블레셋 왕에 대한 일반 명칭이라고 볼 때에 양자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다만 놉의 제사장 이름도 아히멜렉이라 서로 겹치고 있습니다.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의 바람과는 달리 왕궁의 신하들은 다윗을 보고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이처럼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 후에 많은 시간이 경과했지만 다윗을 알아 본 것은 그 싸움이 블레셋 사람들의 뇌리에 깊히 박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당시 여인들이 불렀던 노래까지도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궁지에 물리면 지혜와 지식과 용기와 더 나아가 믿음까지도 흔들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울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왕으로 부르는 것은 사울보다 다윗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2: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을 금방 알아보자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학자들은 다윗이 시편 118편의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다(9)’는 회개를 하였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의지하지 못하고 블레셋 방백에게 찾아갔던 자신의 나약함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두려움만을 낳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행동(타암: טעם)’은 그 뜻은 ’ ‘식별’ ‘판단’ ‘분별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는 어떤 것이 어떤 것이게 하는 본질, 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하여 사용되기는 하지만(16:31; 11:8) 그 중요한 성경적 용법은 식별분별입니다. 여기서도 예전의 다윗과 달리 당시의 다윗은 대상을 식별할 능력이 없는 것 같이 미친척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KJV에서는 그는 그들 앞에서 행동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 안에서 그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가장했다.’고 했지만, NIV에서는 그는 그들 앞에서 미친체했다. 그리고 그가 그들의 손 안에 있는 동안에 그는 미친 사람같이 행동했다.’고 번역했습니다. 이처럼 KJV에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직역을 한 반면에 NIV에서는 문맥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을 했습니다. ‘손 안에서란 표현은 권세 아래서로도 이해할 수 있으나 당시 블레셋 인들이 다윗의 행동을 제재하기 위한 것을 나타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대문짝에 그적거리며(타와: תוה)’ 그적거리는 것은 휘갈겨 쓰다는 뜻으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낙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78:41;9:4). 그러나 벌게이트(Vulgate)역과 70인역(LXX)에서는 이를 대문짝을 쿵쿵 때리며로 번역했습니다. 이로보아 다윗은 자신을 미친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손가락으로 대문에 낙서하거나, 대문을 때리는 등의 행동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이 같은 행동의 발상이 아마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사울의 악신 들렸을 때의 모습을 흉내 낸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침을 수염에 흘리며히브리인에게 수염은 명예와 존경의 상징입니다. 존경의 대상이었던 잘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자켄(זקן)’도 수염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불결한 분비물인 침을 흘려 수염을 더럽히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미친 자나 하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로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자 갑자기 미친 짓을 했습니다. 이 행동은 가드 왕으로 하여금 미친 자로 판단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미쳤기 때문에 더 이상 그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멸시적인 선언을 하고 불결하고 더러운 것을 보기 싫으니 쫓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이 말은 다윗을 당장 아기스 앞에서 내쫓으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스스로를 비하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아기스의 궁에서 나와 아둘람 굴로 피신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거짓 미친 행세임을 알고 있었으나 다윗을 지켜 주기 위해 그가 미친 것으로 만들고 쫓아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는 후에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비워할 때도 그는 여전히 다윗을 사랑한 것으로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할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