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하

사무엘상 제23장 강해: 집요한 추적자 사울

chukang 2018. 12. 30. 10:27


사무엘상 제23장 강해.hwp



사무엘상 제23장 강해: 집요한 추적자 사울

 

계속되는 다윗의 도피 생활과 집요하게 추적하여 죽이려는 사울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본 장이 말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사울이 다윗을 부당하게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 부당하게 주님과 성도들에게 핍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사단의 세력에 대하여 성도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아주 귀중한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울의 온갖 핍박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신앙으로 이겨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는 다윗의 모습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마침내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것을 예표하기도 합니다.

 

1-5: 전 장에서 다윗이 그에게로 몰려 온 추종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추격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부터 십 황무지로 피신하기까지 즉 본 장에서부터 26:25까지 기간을 2차 도피기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지지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동족의 어려움을 돌아볼 수 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그일라가 블레셋의 침입을 받았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되었습니다. 일부 염려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나아가 블레셋을 쳐부수고 그일라는 구원하였습니다. 이런 국지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왕위에 오르게 된 후에는 이스라엘이 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뢰하는 믿음 속에 다윗의 지혜와 용맹함 위에 세워질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그일라는 블레셋과 접경지대에 위치한 유다의 성읍입니다(15:44). 블레셋은 그일라 거민들의 추수를 마치고 탈곡하여 창고에 저장하려고 할 때에 급습하여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아마도 블레셋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국경 방비에 소홀한 틈을 타나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인 그일라를 침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침입은 영적으로 볼 때에 악한 자들은 교회 내에서 개인의 이권이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다툼이 일어날 때에 신앙공동체의 결속이 약해지면 그 틈을 이용해서 교회를 와해시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스스로 경건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자세가 꼭 필요합니다.

 

1.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마당을 탈취하더이다.

그일라는 유다와 블레셋 변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이 침입하여 타작마당을 탈취하였다는 것을 백성들은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이는 사울이 국가의 안전에 소홀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이 머물던 헤렛 수풀에서 북쪽으로 약 9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추수기에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곡식을 바람이 많이 부는 높은 곳에 타작마당을 만들고 그곳에서 곡식을 떠는 것입니다. 바람이 잘 불어야 티가 잘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둔 곡식을 가을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안전하게 곡간에 보관하며, 그때까지 이 곡식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2.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는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주했던 초기 때와는 달리 먼저 여호와께 질문하는 신앙의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하러 가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의 뜻을 물은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6절을 보면 제사장 아비아달이 가져온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27:21을 보면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물을 것이요묻자와와 같은 단어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었던 에봇에는 가슴에 차는 주머니가 있는데, 이 주머니는 호쉔으로 불리는데 우리 성경에는 판결흉패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28:15-30; 39:8-21). 이것은 에봇과 동일한 재료로 짜서 만들고 네모진 주머니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문의하여 판결을 받는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의 명칭은 호쉔 함미쉬파트신탁을 받아 판결을 내리는 가슴의 직무 휘장을 가리킵니다(28:15, 30). 이 우림과 둠밈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거룩한 제비인 것은 분명하나 그 모양과 이 두 단어의 어원과 의미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제비로 신탁을 얻는 방법은 삼상 14:37-46에 나옵니다. 우림과 둠밈 중 어느 것이 긍정적인 제비이고 어느 것이 부정적인 제비인지는 정하기 나름입니다. 신탁의 답변은 이 제비들 중에 하나가 뽑혀서 제시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아니오의 판별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우림과 둠밈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사용한 몇 가지 예는 27:21; 삼상 14:41; 28:6; 2:63; 7:65‘ 등에 나와 있습니다. ’그일라는 구원하라.‘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고 있는 처지라 그일라를 구원할만한 입장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일라를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야 할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다윗이 출전 여부를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간단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블레셋을 쳐라그리고 그일라를 구원하라였습니다. 전쟁의 시작 여부를 결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승패까지도 미리 결정하시고 다윗에게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전을 반대하였습니다.

 

3.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사울을 피해 모여든 모든 사람들을 다윗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어떻게 블레셋 군대와 싸울 수 있냐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군대에서 군대(마아라카:מערך)’정지하다, 배열하다’(아라크: ערך)에서 나온 말로 훈련되어 잘 정비된 군대를 가리킵니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사울의 추격이나 위협에도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더 강력하고 잘 정비된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너무나도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데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은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라는 여호와의 응답을 백성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의 두려움과 반대 때문에 다시 한 번 더 여호와의 뜻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재차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네 손에 붙이리라.’ 이는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그일라로 내려가라. 왜냐하면 내가 너의 손 안에 블레셋을 주었기 때문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다시 물을 때에 그일라로 내려가서 블레셋을 쳐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다윗의 손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손은 능력과 권세를 의미하며 여기에서는 승리를 가리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그제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승리의 확신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전을 명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싸워 주심을 믿고 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크게 도륙하고이는 큰 타격을 입히고 또는 크게 살육하여라는 뜻으로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은 큰 승리를 얻었고 많은 전리품들을 획득했습니다.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그들의 가축들을 끌어왔다는 것은 다윗의 사람들이 그일라 지역에 침입한 블레셋 군을 그들의 지경 내에까지 쫓았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잃어버렸던 곡식은 당연히 찾아왔을 것입니다. 사울은 왕으로써 책무를 등한시하고 있었지만, 다윗은 쫓기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었습니다. 그일라의 사건은 앞으로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6-14: 다윗은 그 자신이 극심한 곤경에 빠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일라 거민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해내기 위해 그에게 닥칠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그일라 거민이 오히려 다윗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사울에게 체포당할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추종자들과 함께 그일라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행위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행위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아히멜렉 제사장을 비롯하여 놉 사람들이 다윗에게 베푼 호의로 인하여 처참하게 학살당한 사실을 두려워하여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고자 공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 해도 그일라 거민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안위만 도모하기 위해 은혜를 짓밟은 파렴치한 행위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이 당한 배신은 훗날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당한 배신과 매우 흡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 많은 이적과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사울과 그일라 거민들의 공모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을 보호하시는 은혜 속에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영원히 무덤에 가두려 하였다가 부활로 인해 실패한 사실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악한 자의 계교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5:12). 성도들이 이 땅에서는 비록 환난을 당하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10:28).

 

6.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2절의 여호와께 물었다는 구절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가 다윗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있을 때에 그에게로 도망했고, 그때 다윗은 그일라로 행군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온 사실을 기록한 삼상 22:20도 그가 헤렛 수풀로 갔다고 명확히 기록하지는 않지만 다윗이 그일라의 행군에 대해 대제사장의 에봇을 통해 이미 여호와께 물었다는 사실은 아비아달이 다윗이 헤렛 수풀에서 그일라로 떠나기 전에 다윗에게로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7.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한글 번역에서 4, 7절 모두 붙이셨다로 되어 있는 단어는 4절에서는 주셨다: 나탄(נתן)’이며 7절은 모른다:나칼(נכ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나칼낯선 사람으로 취급하다.’ ‘알아보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모르신다.’ ‘그를 나그네 같이 취급하셨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윗이 유다 광야의 국경지대에 체류하고 있을 때는 체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 안에 있다면 잡기가 훨씬 수월한 것입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왕인 사울의 포위와 공격의 위험을 겪기보다는 다윗을 포기할 것이고, 성 주민들이 사울 편에 서게 된다면 더욱 체포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군대를 모아 그일라로 진격하려고 했습니다.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그리 많지 않았던 성벽이 둘러싸인 요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를 다윗 체포의 호기로 생각한 사울은 이를 하나님이 다윗을 갇히게하신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은 진실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이를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8.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행동은 점점 포악해져만 갔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속으로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였고(삼상 18:10, 17, 210 그 다음에는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그의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삼상 19:1, 11, 20-24). 이제는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이 자신의 왕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모든 백성들을 군사로 징집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9.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 오라 하고

당시 사울이 머물렀던 이스라엘의 수도 기브아로부터 블레셋 땅에 가까운 그일라까지의 거리는 약 35km입니다. 사울이 도성에서 군사를 모으며 출발하여 이곳까지 도달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시간에 자신을 죽이려고 사울이 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울에 비해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0.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이는 다윗의 믿음이며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에봇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직접 기도하는 자세를 보이는 다윗에게서 참신앙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택하여서 보호하시며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11-12.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다윗은 두 가지를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첫째는 11절의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사울에게 넘겨 주겠는가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12절의 사울이 내려오겠습니까?’하는 것입니다.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답변은 제비들 중에 하나나 뽑혀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질문 중에 하나인 사울이 내려 올 것이다.’라는 답변이 먼저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재차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그일라 사람들이 배신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헌신적으로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출해 주었는데도 배반을 당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항상 신뢰만 할 존재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유익을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에서 사람들바알(בעל)’지도자’ ‘주인이란 뜻입니다. 즉 다윗은 그일라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그일라의 지도자들의 배신 여부를 하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13.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초기에는 4백명(삼상 22:2)에서 2백명이 증가한 것은 사울의 혹정이 더욱 심해진다는 것과 다윗의 명망이 더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효로 사울의 정규군과 싸우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다윗과 그의 군사들과 함께 그일라를 떠났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은 방황하는 대로 방황하였다.’ 위험을 피하여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는 뜻입니다. 쉽게 해석하면 필사적으로 사울을 피하여 도망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용사라도 때에 따라서는 피할 때는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4.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다윗은 그일라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헤브론 밑에 있는 지대와 마온지대에 거하였습니다. ‘은 헤브론에서 남동쪽으로 5.6km 지점이며 그일라에서 남동쪽으로 약 22km 정도 됩니다. ‘마온은 십에서 남쪽으로 8km 가량 됩니다. ‘사울이 매일 찾되본 절 전체를 문자적으로 번역을 해 보면 사울이 그를 모든 날에 찾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의 손 안에 주지 않으셨다.’가 됩니다. ‘매일모든 날입니다. 즉 사울이 살아 있는 한 매일 같이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런 노력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수포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은 그러나(: ו)’라는 동위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나와 있어서 다윗을 지키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울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임을 명백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실제로 황무지 요새에도 피했고 산골에도 피했으나 시편에서 자신은 여호와께 피했다.’라고 간증하므로써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의 깊은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5:11;11:1;16:1;17:1;18:2;31:1;59:16;62:8;64:10).

 

15-18: 앞에서는 다윗이 그일라 거민들의 배신으로 인한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추종자들과 십 황무지로 피신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을 찾아가 위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본문은 요나단이 다윗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결코 다윗을 해치지 못할 것이므로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사울도 안다고 하려주며 환난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을 갖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요나단의 방문과 말은 오랜 도피생활로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에게는 새로운 힘과 소망이었습니다. 사울마저도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며, 또한 이 말은 이제 곧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다윗이 왕 위에 오를 것을 시사합니다. 요나단은 장차 왕위가 자신에게 계승되지 않고 다윗에게 갈 것이라는 사실에도 심정으로 동요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모든 사실을 다윗에게 말하고 인정하는 것은,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여호와께 대한 신앙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우정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지극히 낮아짐으로 죄인 된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2:6-8).

 

15-16.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은 위급 상황에 있는 다윗을 찾아서 위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주셨다고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자신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유효성을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가 그의 손을 하나님 안에서 강하게 만들었다.’입니다. ‘힘 있게(하자크: חזק)’강하게 만들다강화시키다.’입니다. 이 동사의 목적어로 한 개인의 손이 올 때는 손을 강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야드: יד)’능력’ ‘권세란 뜻이 있으므로 힘을 주다’ ‘돕다가 될 수 있으며, ‘격려하다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באלהים베엘로힘)인데 전치사 ‘~로 말미암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encouraged him through God)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본 절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 본다면 그리고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했다. 너는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너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두 번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나의 아버지 사울도 이것을 알고 있다.’가 됩니다. 이처럼 요나단을 자신을 비하시키면서 까지 신앙 안에서 다윗을 격려하고, 다윗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이 요나단은 계속되는 사울의 추격으로 인하여 긴장과 위기감으로 휩싸여 있는 다윗에게 두려워 말라고 위로합니다. ‘두려워 말라의 핵심은 사울이 매일 다윗을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치지 못할 것이요(로 티메차아카: לא תמצאך)’입니다. KJV에서는 “Will not lay a hand on you." '손을 너 위에 올려놓지 못할 것이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절대로 위해를 가하지 못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차기 왕은 요나단이 될 것이지만, 자신은 다윗에 이어 두 번째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왕 바로 아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표현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음을 한 것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삼상 16:1, 13). 여호와 신앙이 없는 사울은 그래서 더욱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어진 언약(삼상 20:12-17)을 재확인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참된 사랑은 굳은 우정의 확신을 신실하게 주고 2kerl 위하여 거듭 언약을 갱신하기를 즐겨한다고 주석가 메튜 헨리는 주석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요나단의 후손들과 다윗에 의해 실현이 되었습니다(삼하 9:11). 그것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전사했기 때문입니다(삼상 31:2).

19-29: 십 거민들은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밀고 했습니다. 다윗은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블레셋의 침공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전장으로 나갔고, 다윗은 엔게디 요새로 피신하였습니다. 다윗의 도피 생활 가운데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잘 타나내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다윗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간에 이스라엘을 침범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침공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불어 넣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과 환경을 주관하셔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을 보호해 주시기 위하여 블레셋을 들어 사울의 악한 계획을 파하신 것입니다.

 

19.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은 헤브론 남동쪽 6km 지점에 위치한 지금의 텔 지프로 기브아에서 상당히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사울에게까지 가서 다윗을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과거 의 제사장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삼상 22:11-19)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자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밀고 행위는 인간적인 배신행위입니다. 다윗은 십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라(삼상 17:120 그들의 보호를 기대했으나 배신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으로부터 수차례 구해 내었음에도 불구하고(삼상 17:40;18:30;19:8) 십 사람들이 다윗을 밀고한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당하고(1:1) 가룟 유다에 의해 비신당할 것을 예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27:3,4).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당시 십 사람들이 자세히 다윗의 위치를 보고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이 사해 서편에 있는 험준한 유다 광야에 있는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길라건조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사해 근방의 석회암 동굴 지역으로 추정합니다.

 

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붙이다(사가르: סגר)’11절의 붙이다와 동일한 뜻으로 강제로 감금함을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여 다윗 체포에 앞장서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21.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사울은 이스라엘 왕위가 하나님에 의해 자신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졌음을 알면서도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함으로써 하나님께 정면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와서는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순전히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행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에게서 떠나셨기에(삼상 16:14) 그의 바램이 이루어질 리 만무합니다. 성경은 이 같은 자들에 대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29:13; 15: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마음과 행위로는 다윗을 죽이려는데 열중하면서도 입술로는 여호와의 복을 구하는 가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2.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본 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너희들은 지금 가라. 더 준비하라. 그리고 알아내라. 그리고 보아라 그의 발로 가는 장소를,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왜냐하면 나에게 그가 매우 교활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숨은 곳을 고발하자, 사울이 좀 더 신중히 관찰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는 이제까지 다윗을 잡으려는 계획이 번번히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심히 공교히이는 매우 교활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다윗이 매우 교활하기 때문에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더 신중히 살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우리 성경의 하나니는 원어 상 이유를 말하는 왜냐하면 ~ 때문에’(: כי)라는 접속사입니다. KJV에서는 이를 ‘fo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은적하였으며이 말은 그의 발로 가는 장소를 말합니다.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본 절은 그리고 너희는 보라라, 알아내라, 그 자신을 숨긴 곳인 모든 숨는 장소를,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확실한 것과 함께 돌아오라. 그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 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그 땅 안에 있으면 내가 그를 모든 유다 족속 가운데서 찾을 것이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22절과 같이 보아라(라아: ראה)’ ‘알아내라(야다: ידע)’는 두 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다윗을 반드시 발견하라고 거듭 강조하여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탐지하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숨어 있는 모든 곳을다윗 자신을 숨긴 곳인 모든 숨는 장소를 말합니다. ‘실상을(: כון)’ 이 단어는 확립된또는 올바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정보를 가져올 때 자신이 다윗을 잡으러 가겠다는 것입니다. ‘찾아내리라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한 후에 샅샅이 수색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정보에 근거해서 다윗을 잡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겠다는 사울의 결심입니다. 이렇게 한 번 타락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욱 더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힘쓰며, 은혜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사울은 확실한 정보를 통해서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곳은 광야 남쪽의 아라바 근처에 있는 마온 황무지입니다. 광야는 사해 서편에 있는 유대 광야이며 거친 들이란 뜻이 있는 아라바는 넓은 의미로 쓰일 때에는 갈릴리 호수 남편에서 요단 계곡을 지나 아카바만에 이르는 저지대를 가리키나 여기에서는 좁은 의미로 사해 남서쪽에 있는 황무지를 포함하여 에시온 게벨에 이르는 사막지대를 말합니다.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은 정확한 정보로 다윗의 위치를 발견하였고 그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정보원들도 잽싸게 사울의 추격을 알아채고 다윗에게 보고하여 도망갈 시간을 확보하였습니다. ‘바위(세라: סלע)’ 절벽이나 낭떠러지를 의미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해 바위 협곡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윗이 낮은 지대로 내려온 것은 그 곳에 있는 동굴이나 숲에 은혜하기 위함이거나 그와 그를 추적하는 사울 사이에 있는 난공불락의 절벽 뒤로 숨어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26.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험준한 산악 지역이었으므로 추격하는 자와 도망하는 자가 모두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다윗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추격했으나 다윗은 곧 다른 지역으로 피하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양편은 서로를 보면서도 근접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사울은 추격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고 포위 작전으로 바꾸었습니다. 피할 곳이 없게 된 다윗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협곡을 타고 도피함으로써 포위하는 자들보다 더 빨리 도망하려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7-28.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로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사울이 포위망을 좁혀 와서 다윗을 잡으려고 했을 때 갑자기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블레셋이 침공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확실한 정보에 의하여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다윗을 거의 다 잡을 뻔했는데,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그 시간에 블레셋이 침범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울에게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입니다. 14절의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붙이지 아니하시니라.’고 한 구절이 너무 생동감 있게 다가옵니다. 셀라하마느곳 다윗이 경계의 절벽’ ‘분리의 절벽으로 부른 곳입니다. 사울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음을 기념하여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엔게디염소의 샘이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연안 중간쯤에 위치합니다. 이 지역은 일정 지점이 아닌 상당히 넓은 지역 전체를 가리켜며, 다윗이 이 지역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은신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지금도 그 이름처럼 들염소들이 살고 있으며 30도까지 온도가 올라가는 샘이 있습니다. 이곳은 십에서 동쪽으로 25.6km지점입니다. 큰 바위들이 있는 산악 지대이며, 사해로 이어지는 동편에는 벼랑과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많은 동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동굴들은 은신처로 안성맞춤인지라 오늘날도 도망자들의 은신처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제23장 강해.hwp
0.0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