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상 예배
니케아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예배는 점점 이교(異敎)화하여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화상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화 될 정도였다. 7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회 내에 성상과 그림 사용을 허락한 일이 있지만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붙인 바 있다. 8세기 들어와서는 이 문제가 큰 문제가 되기게 이르렀다. 그것은 무지한 신자들이 성상이나 그림을 향하여 기도를 하는 등 미신적 분위기가 팽배하여 모하메드교도와 유대인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런 비난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동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두 개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첫째는 726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을 두는 것은 허락하나 그것을 만지거나 입맞추는 것을 불허하며 화상을 만질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라'고 한 것이다. 민중들과 수도자들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다메섹의 요한 같은 이도 반대했다. 심지어 그리이스 서부 주민들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왔으나 격파되었다.
둘째 칙령은 그 직후인 730년에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아예 '교회당에서 모든 화상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715-731년)와 3세(731-741년)가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특히 그레고리우스 3세는 화상을 반대하는 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도록 명하였다.(731년)
그러나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년)는 아버지보다도 더 열렬히 화상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회를 소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화상 뿐 아니라 십자가와 모든 휘장도 반대하고, 교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집과 수도원에서도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어려서 동로마 황제의 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섭정을 한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화상예배를 원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와 협의하여 787년에 니케아에서 7차 세계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동서교회가 함께 연 최후의 대회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화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등을 화상 앞에 켜서 밝히며 향을 태우는 것은 가하다고 했다. 다만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들은 화상을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곧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니케아 신조의 문구
이 시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논쟁은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올 뿐 아니라 아들이신 성자(聖子)에게서도 나오신다는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추가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스페인의 신학자들은 아리우스파와 싸울 때 '아들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질로서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에다 아들과의 관련성을 덧붙여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주장하며 그런 내용을 붙인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교황의 승인을 받았으며 범서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 말미암아서도 나오심을 인정하나, 특별한 문구를 덧붙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로마 카톨릭교회와 헬라 정교회가 분리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3.바울파 (Paulicians)
이 시대에 바울파라고 불린 한 무리의 신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나친 제도화 및 의식화, 형식화를 반대하여, 교회는 오직 성령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외치며 교회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움을 받아 이단으로 정죄되고 핍박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실상은 항상 왜곡되게 전해져 왔다. 그 동안 그들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으나 1891년 아르메니아 남방 에드미아찐(Edmiatzin) 도서관에서 그들이 지은 {진리의 열쇠}라는 책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에 관한 실체적 진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파는 로마 교회의 형식화된 제도들 곧 성직 제도와 화상 예배를 비롯한 미신적 신앙의 헛됨과 수도원의 폐해, 왜곡되게 운용되고 있는 카톨릭의 여러 예식들(성례)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그 제도 일체를 거부했다. 그들의 삶은 순결하고 개혁 정신이 강했으며 순회 전도와 성경을 복사하여 보급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1) 바울파의 등장 배경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참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한편 교회가 국가의 힘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교회는 언제든지 그 힘을 자기들 조직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갈 때에는 어떤 어려움과 압력이 있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일어나곤 했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주님의 교훈과 가르침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여러 세기의 역사는 끝없는 폭력과 계략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자 한 동·서방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의 세속적인 욕망의 전개 역사이다. 그 역사는 또한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이교도의 손에 의해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신자 또는 형제라고 불리던 사람들 곧 공권력과 결탁한 세상적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고난을 받은 역사이다.
이 기간 동안 진실은 그것을 왜곡하고 진리를 호도하려는 자들에 의해 비열하고 교묘하게 조작되었다. 박해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의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과 저서들이 말살되었다. 수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터무니없이 이단자 또는 분열자로 낙인찍혔고 전혀 그들이 주장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들이 명백히 반대한 악한 교리들이 그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교활한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조작하고 유포하였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또는 "형제"라고 불리기를 원했지만 카톨릭교회는 그들을 분파 또는 자신들이 원치 않던 이상한 이름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증거하는 많은 기록들이 왜곡되고 거짓으로 조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숨겨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다.
초기 3세기 동안에도, 교회를 약화시키고 타락시키는 여러 요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있었고, 또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현상들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풍조에 저항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그때에도 많이 있었다. 한쪽에서 교회가 타락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개혁의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Armenia) 지방에서도 그러한 갱신의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 지역들은 처음부터 순수한 진리와 경건한 삶을 유지해 오던 교회들의 피난처였다.
복음은 그 초기에 안디옥으로부터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바나바와 바울을 비롯한 많은 전도자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워나갔다. 이 무렵 이미 성직자가 다스리는 소위 [카톨릭 교회](보편교회 ; 스스로를 유일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가 급속히 그들의 제도와 조직을 강화해 나갔으나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았다. 4세기에 이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했고 이에 아르메니아에서도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원리를 지키려는 교회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니교가 유행하게 된 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오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진실한 많은 신자들에 대해 종종 마니교도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였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전혀 마니교도가 아님을 밝혔고 또한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지만 카톨릭교회는 무조건 그런 누명을 씌웠다. 종교 사회에서는 이단이라는 이름이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대적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형제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그들을 송사할 만한 근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로마 카톨릭의 제도적이고 세상적인 교회 체제 안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또한 터무니없이 붙여진 '분파'라는 이름이나 기타의 이름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인' 또는 '형제'라고 불렀고 대외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들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온 세상의 모든 신자들과 자신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음을 천명했다.
그리이스와 라틴, 아르메니아의 교회들이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거의 완전히 세상에 속하게 되자 형제들은 "저들이 국가와 연합함으로써 유아 세례 제도와 기타의 방법으로 불신자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주의 만찬을 베풀며 구원을 선포하고 기타 세상의 여러 악행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카톨릭 교회와 형제들 사이에는 큰 갈등이 생겼으며 카톨릭은 형제들을 종종 바울파(Paulician) 또는 형제들이 많이 살던 지역 이름을 따서 톤락(Thonraks)이라고 불렀다.
(2) 콘스탄틴 실루아노
바울파라고 불린 형제들의 무리를 처음으로 이끈 지도자는 [콘스탄틴 실바누스](Constantine Silvanus, 650-660)이다. 그는 사도적인 정신과 능력, 겸손과 인내, 그리고 불굴의 용기와 믿음을 가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653년 경에 사라센인들(이슬람)의 포로가 되었던 한 아르메니아 사람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콘스탄틴의 집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 아르메니아 사람은 콘스탄틴이 비범한 사람임을 깨닫고 그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성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들어 있는 성경을 선물하고 떠났다. 콘스탄틴은 이 책을 깊이 연구하였고 곧 삶이 변화되었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바울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울의 동역자인 실라의 이름을 따라 실라(Siluano, Silvanus)라고 바꾸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비잔틴(동로마) 교회들 가운데서 널리 행해지고 있던 화상(畵像) 숭배와 각종 미신적 행위를 거부하는 신자들과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카톨릭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아르메니아의 키보사(Kibossa)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약 30년 동안 여러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유프라데스강 유역을 따라서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소아시아의 서쪽까지 여행을 했으며 거기서 거둔 성공적인 활동으로 인해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포고나투스(Constantine Pogonatus)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684년에 콘스탄틴과 함께 하는 신자들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콘스탄틴을 완전히 매장시키고자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의 시행을 위해 그는 시므온(Simeon) 이라는 관리를 채용하였다. 시므온은 콘스탄틴을 박해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돌로 그를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이 죽음을 감수하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콘스탄틴에 의해 양자로 키워지고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유스투스(Justus)라는 한 청년이 자신의 은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유스투스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으로 칭송되면서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키보사에서 보고 들은 일들로 인해 깊은 감동을 받았고 거기 속한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과 그들이 진실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및 그들이 하는 일에 어떤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궁전에 머물면서도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3년 동안 갈등을 겪은 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키보사로 도망가서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디도(Titus)라는 이름을 얻고 전에 자신이 핍박하여 죽게 한 콘스탄틴이 하던 일을 맡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도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년 후 배반자 유스투스가 형제들의 생활 양식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대한 정보를 감독에게 고했고 감독은 그것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2세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잡혀서 순교하게 되었다. 황제는 나머지 '이단자들'을 공포로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시므온을 포함한 많은 형제들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였다. 그러나 고통 중에서도 담대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던 형제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신앙과 용기를 자극하여 헌신과 증거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그 무리에 참여하였고 많은 교사와 전도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카톨릭이 박해를 그치기까지 무저항으로 고통을 이겨 나갔다.
(3) 성상 파괴 운동
바울파 등장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는 성상 숭배였다. 성상 숭배는 교회 역사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용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나무와 못을 가져온 후 성화와 성상, 성물들이 가치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성물을 유치하거나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소박한 집에서 가졌던 주님과 제자들의 모임은 이제 숭배의 대상으로 받들어지는 형상과 그림들과 성물로 가득찬 전시장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교회 모임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형제들의 찬양과 교제의 장소가 아니라 마리아나 성자들에게 봉헌된 종교 신전 분위기의 건물 안에서 참석하고 싶은 사람이나 참석하기 싫은 사람이나 다 참석해야만 하는 의무적 의례(儀禮)와 같은 것이 되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동정녀나 성자들에게 드려졌고, 이방 종교에서 차용한 우상 숭배가 갖가지 성물들과 사제들, 그리고 온갖 조잡한 미신과 함께 나타났다.
한편 이교도적 우상 숭배나 미신이 카톨릭교회를 점령했던 시기에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오직 그리스도께 두고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은 계시된 말씀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표였다. 그들은 죄와 무지가 만들어낸 우상 숭배의 조직으로 빠져 들어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까스로 제외된, 남은 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저항은 소용이 없었다.
바울파나 그밖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무리들은 널리 번지고 있는 우상 숭배를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큰 핍박을 받았다. 이들이 많이 살았던 지방은 타우르스 산맥 근방인데 거기서 후에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되어 화상 예배를 반대한 인물로 유명한 레오 3세가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사라센제국으로부터 지켰고 제국의 영적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그는 동방과 서방 모두가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우상 숭배와 미신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러한 악을 뽑는데 앞장섰다. 그는 726년에 성상 숭배 금지령을 처음으로 내리고 그 뒤 화상(畵像)들을 강제로 파괴하는 운동을 벌였고 우상숭배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한 세기나 지속된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가장 강력한 반대를 편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이었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구세주와 동정녀, 그리고 성자들과 그리스도의 종들의 모습을 본떠 만든 형상들을 숭배하고 기념한다고 비난하는데 그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약 성경에서는 형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 세상에서 사셨으며 기적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살아나셔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후에,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당시에 살고 있지 않던 우리들로 하여금 믿고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지식이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교부들께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간단하게 기억시키기 위해 이것을 형상으로 나타내는 일을 승인했다. 때로 우리가 마음 속으로 주님을 향한 열정이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면 구원의 기쁨이 되살아나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경배하는 것은 형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형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이다..... 동쪽을 향해 예배드리는 것, 십자가나 그와 유사한 많은 상징물을 경배하는 성사 숭배는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하나의 중요한 전통인 것이다."
다메섹의 요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레오의 조치에 반대하였는데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성상을 파괴한 이유로 '성상 파괴자'(Iconoclast)란 별명이 붙었던 레오 3세의 뒤를 그의 정책을 아들 콘스탄틴 5세와 손자 레오 4세가 이어 받았다. 레오 4세가 죽자 그의 미망인 이레네가 정책을 바꾸었으므로 그의 아들 콘스탄틴 6세 때에는 다시 성상 숭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그 후 성상 숭배를 반대한 데오필루스(Theophilus) 황제 때를 거쳐 그의 미망인 데오도라(Theodra)가 어린 아들 미카엘(Michael) 3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하던 때인 842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밀리에 성상 숭배를 지원하고 있던 사제들의 영향으로 데오도라는 즉시 성상을 재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교회에서는 이 일이 큰 행사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숨겨져 왔던 성상들과 그림들이 나타나고 교회와 국가의 고위성직자 고관들이 이것들에 경배하였다.
성상문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고 관장되었던 한 회의에서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그때 성상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반대자들을 성상 파괴자 또는 모하메드교도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교황은 자신의 대표자들을 참석시켜서 787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세계교회대회에서 성상에 대한 예배가 합법화된 사실을 주지시켰지만,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이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결국 성상에 대한 예배, 참배,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 및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는 행위와 동정녀 및 아기 예수를 조각한 것들에 입맞추는 행위 등 성상에 대한 일체의 경배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교회 안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의 행동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허락할 수도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할 때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3가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종래의 의결 내용이 거부되고 '어떤 언어로도 기도 드릴 수 있다는 새 규례가 확정되었다.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이며 당시 아퀴타인(Acuitaine)의 왕이었던 루이(Louis, 814-84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롤링거(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후에 성경 주석으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학자 클라우디우스(Claudius)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황제가 되자 클라우디우스를 튜린(Turin)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덕스러운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이 새 감독은 프랑크푸르트회의에서 결정된 성상 반대의 원칙을 철저히 집행해 나갔다. 그는 튜린의 여러 교회에서 자신이 우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성상과 십자가 등을 예외없이 제거함으로 인해 그 회의의 결정 사항을 넘어서서까지 철저히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튜린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조치에 찬성했으므로 별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는 공공연하게 베드로의 지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으며 베드로로부터 로마 감독(교황)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소위 '열쇠의 능력'이라는 것도 교황 한 사람이 아니라 감독 제도 자체에 넘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로마 감독은 오직 사도적 생활을 할 때만이 사도적 능력과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슬람교도들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칼의 위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많은 신자들과 교회가 이때 희생되었고, 이방 로마 제국이 박해를 가하는 동안 고난을 견디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북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상당수가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죽어갔다. 참으로 이슬람교는 이방인이든 그리스도교인들이든 우상 숭배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4) 바울파의 행적과 가르침 및 평가
성상 파괴 운동 덕분에 박해받던 소아시아 지역의 형제들이 다소간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왕후 데오도라의 치하에서 다시금 성상 옹호자들이 승리하자(842년) 그들은 '성상을 끈질기게 반대하며 우상적이고 미신적인 모든 종류의 예배를 반대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자기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며 심지어 자신들 모두를 스스로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단들' 곧 바울파로 불리는 형제들을 근절시키기로 결정했다.
형제들은 셈바트(Sembat)와 같은 유능한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다가오는 시련의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셈바트는 8세기 말경 아르메니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카톨릭은 그를 바울파의 창시자라고 지목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이었다.
또 다른 지도자로 세르기우스(Sergius)가 있었다. 그는 34년(800-834)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발이 닳도록 동서남북을 뛰어다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도들을 돌아보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고 강력한 영향력으로 분열을 치유하며 성도들을 연합시키며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였으며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그릇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했다. 그는 믿음을 가진 한 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본래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이 읽으며 평신도는 읽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그 여인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제들과 마귀의 속임수'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그는 직접 성경을 읽고 믿었으며, 오랫동안 매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의 편지들은 널리 읽혀졌고 그의 활동은 그를 쫓던 자들에 의하여 도끼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탁월한 영적 능력과 헌신적인 봉사로 인하여 여러 믿음의 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콘스탄틴, 시므온, 게네시오스, 요셉, 사가랴 , 바네스, 셈바트, 세르기우스, 이들은 연이은 박해로 인한 파멸을 죽음으로 극복하고 그 이름을 보존한 사람들이다. 이런 형제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고,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꾸지 않고 지속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종종 성경으로부터 사람과 교회 이름을 취하여 사용했다. 즉 콘스탄틴은 실라로, 시므온은 디도로, 게네시오스는 디모데로, 요셉은 에바브로디도로 불리웠다. 이와 달리 대적자들이 붙인 이름도 있다. 예를 들어 사가랴는 돈만 아는 목자, 바네스는 더러운 사람이라고 불렸다.
이 사람들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그들의 신앙과 삶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비잔틴제국은 대체로 바울파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내에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상 숭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은 그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때로 형제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심지어 강력한 성상 숭배 반대자요 아르메니아 출신이여 형제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레오 3세와 같은 왕조차도 희랍 교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울파에 대한 공격을 허락함으로써 형제들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데오도라 왕후의 박해 때 형제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시기에는 왕후의 명령에 의해 교수형과 화형, 수장형 같은 조직적인 살육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842-867년 사이에 데오도라와 재판관들의 열렬한 박해로 인해 형제들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박해도 형제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형제들은 데오도라 치하의 박해와 그 뒤에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0세기 경에는 바울파에 대한 태도가 조금 관대해졌다. 그 동안 형제들은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지역으로 주로 옮겨갔으며 유럽에서도 상당히 번성하였다.
이 시대에는 주요한 교리 논쟁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화상(畵像) 예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니케아 신조의 문구에 관한 것이다.
1.화상 예배
니케아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 예배는 점점 이교(異敎)화하여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화상을 사용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일상화 될 정도였다. 7세기 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회 내에 성상과 그림 사용을 허락한 일이 있지만 그것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단서를 붙인 바 있다. 8세기 들어와서는 이 문제가 큰 문제가 되기게 이르렀다. 그것은 무지한 신자들이 성상이나 그림을 향하여 기도를 하는 등 미신적 분위기가 팽배하여 모하메드교도와 유대인들로부터 우상숭배자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런 비난의 근거를 제거하기 위해 동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두 개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첫째는 726년에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은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을 두는 것은 허락하나 그것을 만지거나 입맞추는 것을 불허하며 화상을 만질 수 없는 높은 곳에 걸라'고 한 것이다. 민중들과 수도자들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다메섹의 요한 같은 이도 반대했다. 심지어 그리이스 서부 주민들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왔으나 격파되었다.
둘째 칙령은 그 직후인 730년에 내려졌는데 그 내용은 아예 '교회당에서 모든 화상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715-731년)와 3세(731-741년)가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특히 그레고리우스 3세는 화상을 반대하는 자를 교회에서 추방하도록 명하였다.(731년)
그러나 레오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년)는 아버지보다도 더 열렬히 화상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754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회를 소집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화상 뿐 아니라 십자가와 모든 휘장도 반대하고, 교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집과 수도원에서도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어려서 동로마 황제의 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섭정을 한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화상예배를 원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 교황 하드리아누스와 협의하여 787년에 니케아에서 7차 세계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동서교회가 함께 연 최후의 대회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화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등을 화상 앞에 켜서 밝히며 향을 태우는 것은 가하다고 했다. 다만 예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들은 화상을 예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곧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2.니케아 신조의 문구
이 시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논쟁은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올 뿐 아니라 아들이신 성자(聖子)에게서도 나오신다는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추가하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스페인의 신학자들은 아리우스파와 싸울 때 '아들이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질로서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령님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는 니케아 신조의 내용에다 아들과의 관련성을 덧붙여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주장하며 그런 내용을 붙인 니케아 신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교황의 승인을 받았으며 범서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아들로 말미암아서도 나오심을 인정하나, 특별한 문구를 덧붙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일 로마 카톨릭교회와 헬라 정교회가 분리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3.바울파 (Paulicians)
이 시대에 바울파라고 불린 한 무리의 신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나친 제도화 및 의식화, 형식화를 반대하여, 교회는 오직 성령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외치며 교회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움을 받아 이단으로 정죄되고 핍박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그들의 실상은 항상 왜곡되게 전해져 왔다. 그 동안 그들에 대한 자료들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실상을 정확히 알기 어려웠으나 1891년 아르메니아 남방 에드미아찐(Edmiatzin) 도서관에서 그들이 지은 {진리의 열쇠}라는 책이 발견됨으로써 그들에 관한 실체적 진실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파는 로마 교회의 형식화된 제도들 곧 성직 제도와 화상 예배를 비롯한 미신적 신앙의 헛됨과 수도원의 폐해, 왜곡되게 운용되고 있는 카톨릭의 여러 예식들(성례)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그 제도 일체를 거부했다. 그들의 삶은 순결하고 개혁 정신이 강했으며 순회 전도와 성경을 복사하여 보급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다.
(1) 바울파의 등장 배경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참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였다. 한편 교회가 국가의 힘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교회는 언제든지 그 힘을 자기들 조직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갈 때에는 어떤 어려움과 압력이 있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반드시 일어나곤 했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주님의 교훈과 가르침을 끝까지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여러 세기의 역사는 끝없는 폭력과 계략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자 한 동·서방의 여러 교회 지도자들의 세속적인 욕망의 전개 역사이다. 그 역사는 또한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이교도의 손에 의해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신자 또는 형제라고 불리던 사람들 곧 공권력과 결탁한 세상적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고난을 받은 역사이다.
이 기간 동안 진실은 그것을 왜곡하고 진리를 호도하려는 자들에 의해 비열하고 교묘하게 조작되었다. 박해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의해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과 저서들이 말살되었다. 수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터무니없이 이단자 또는 분열자로 낙인찍혔고 전혀 그들이 주장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들이 명백히 반대한 악한 교리들이 그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교활한 로마 카톨릭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조작하고 유포하였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또는 "형제"라고 불리기를 원했지만 카톨릭교회는 그들을 분파 또는 자신들이 원치 않던 이상한 이름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가르침을 증거하는 많은 기록들이 왜곡되고 거짓으로 조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숨겨지지 않았으며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다.
초기 3세기 동안에도, 교회를 약화시키고 타락시키는 여러 요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있었고, 또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현상들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풍조에 저항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그때에도 많이 있었다. 한쪽에서 교회가 타락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개혁의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처음 몇 세기 동안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Armenia) 지방에서도 그러한 갱신의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 지역들은 처음부터 순수한 진리와 경건한 삶을 유지해 오던 교회들의 피난처였다.
복음은 그 초기에 안디옥으로부터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바나바와 바울을 비롯한 많은 전도자들이 소아시아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워나갔다. 이 무렵 이미 성직자가 다스리는 소위 [카톨릭 교회](보편교회 ; 스스로를 유일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가 급속히 그들의 제도와 조직을 강화해 나갔으나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았다. 4세기에 이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화했고 이에 아르메니아에서도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약 성경의 원리를 지키려는 교회들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니교가 유행하게 된 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오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진실한 많은 신자들에 대해 종종 마니교도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였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전혀 마니교도가 아님을 밝혔고 또한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지만 카톨릭교회는 무조건 그런 누명을 씌웠다. 종교 사회에서는 이단이라는 이름이 사람을 억압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대적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형제들을 압박했다. 그러나 거짓 증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그들을 송사할 만한 근거는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로마 카톨릭의 제도적이고 세상적인 교회 체제 안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또한 터무니없이 붙여진 '분파'라는 이름이나 기타의 이름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들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인' 또는 '형제'라고 불렀고 대외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그들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온 세상의 모든 신자들과 자신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음을 천명했다.
그리이스와 라틴, 아르메니아의 교회들이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거의 완전히 세상에 속하게 되자 형제들은 "저들이 국가와 연합함으로써 유아 세례 제도와 기타의 방법으로 불신자들을 교회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주의 만찬을 베풀며 구원을 선포하고 기타 세상의 여러 악행을 교회 안으로 가져왔다"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카톨릭 교회와 형제들 사이에는 큰 갈등이 생겼으며 카톨릭은 형제들을 종종 바울파(Paulician) 또는 형제들이 많이 살던 지역 이름을 따서 톤락(Thonraks)이라고 불렀다.
(2) 콘스탄틴 실루아노
바울파라고 불린 형제들의 무리를 처음으로 이끈 지도자는 [콘스탄틴 실바누스](Constantine Silvanus, 650-660)이다. 그는 사도적인 정신과 능력, 겸손과 인내, 그리고 불굴의 용기와 믿음을 가진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다. 653년 경에 사라센인들(이슬람)의 포로가 되었던 한 아르메니아 사람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콘스탄틴의 집에서 영접을 받았다. 그 아르메니아 사람은 콘스탄틴이 비범한 사람임을 깨닫고 그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경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가 성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들어 있는 성경을 선물하고 떠났다. 콘스탄틴은 이 책을 깊이 연구하였고 곧 삶이 변화되었다. 그는 자기가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으며 바울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울의 동역자인 실라의 이름을 따라 실라(Siluano, Silvanus)라고 바꾸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비잔틴(동로마) 교회들 가운데서 널리 행해지고 있던 화상(畵像) 숭배와 각종 미신적 행위를 거부하는 신자들과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카톨릭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아르메니아의 키보사(Kibossa)로 정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약 30년 동안 여러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유프라데스강 유역을 따라서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소아시아의 서쪽까지 여행을 했으며 거기서 거둔 성공적인 활동으로 인해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포고나투스(Constantine Pogonatus)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684년에 콘스탄틴과 함께 하는 신자들의 집회를 금지시키고 콘스탄틴을 완전히 매장시키고자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의 시행을 위해 그는 시므온(Simeon) 이라는 관리를 채용하였다. 시므온은 콘스탄틴을 박해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돌로 그를 치라고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이 죽음을 감수하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콘스탄틴에 의해 양자로 키워지고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유스투스(Justus)라는 한 청년이 자신의 은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유스투스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으로 칭송되면서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시므온은 키보사에서 보고 들은 일들로 인해 깊은 감동을 받았고 거기 속한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의 교리가 진리라는 사실과 그들이 진실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및 그들이 하는 일에 어떤 잘못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궁전에 머물면서도 영혼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3년 동안 갈등을 겪은 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키보사로 도망가서 형제들과 하나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디도(Titus)라는 이름을 얻고 전에 자신이 핍박하여 죽게 한 콘스탄틴이 하던 일을 맡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도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년 후 배반자 유스투스가 형제들의 생활 양식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대한 정보를 감독에게 고했고 감독은 그것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2세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잡혀서 순교하게 되었다. 황제는 나머지 '이단자들'을 공포로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시므온을 포함한 많은 형제들을 한꺼번에 불태워 죽였다. 그러나 고통 중에서도 담대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던 형제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신앙과 용기를 자극하여 헌신과 증거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그 무리에 참여하였고 많은 교사와 전도자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카톨릭이 박해를 그치기까지 무저항으로 고통을 이겨 나갔다.
(3) 성상 파괴 운동
바울파 등장의 직접적 원인 중 하나는 성상 숭배였다. 성상 숭배는 교회 역사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용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나무와 못을 가져온 후 성화와 성상, 성물들이 가치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성물을 유치하거나 순교자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소박한 집에서 가졌던 주님과 제자들의 모임은 이제 숭배의 대상으로 받들어지는 형상과 그림들과 성물로 가득찬 전시장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교회 모임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형제들의 찬양과 교제의 장소가 아니라 마리아나 성자들에게 봉헌된 종교 신전 분위기의 건물 안에서 참석하고 싶은 사람이나 참석하기 싫은 사람이나 다 참석해야만 하는 의무적 의례(儀禮)와 같은 것이 되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동정녀나 성자들에게 드려졌고, 이방 종교에서 차용한 우상 숭배가 갖가지 성물들과 사제들, 그리고 온갖 조잡한 미신과 함께 나타났다.
한편 이교도적 우상 숭배나 미신이 카톨릭교회를 점령했던 시기에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오직 그리스도께 두고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은 계시된 말씀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표였다. 그들은 죄와 무지가 만들어낸 우상 숭배의 조직으로 빠져 들어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까스로 제외된, 남은 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저항은 소용이 없었다.
바울파나 그밖의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무리들은 널리 번지고 있는 우상 숭배를 비난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큰 핍박을 받았다. 이들이 많이 살았던 지방은 타우르스 산맥 근방인데 거기서 후에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되어 화상 예배를 반대한 인물로 유명한 레오 3세가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사라센제국으로부터 지켰고 제국의 영적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그는 동방과 서방 모두가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우상 숭배와 미신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러한 악을 뽑는데 앞장섰다. 그는 726년에 성상 숭배 금지령을 처음으로 내리고 그 뒤 화상(畵像)들을 강제로 파괴하는 운동을 벌였고 우상숭배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한 세기나 지속된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가장 강력한 반대를 편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이었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구세주와 동정녀, 그리고 성자들과 그리스도의 종들의 모습을 본떠 만든 형상들을 숭배하고 기념한다고 비난하는데 그들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구약 성경에서는 형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고 ..... 세상에서 사셨으며 기적을 행하고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살아나셔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후에,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당시에 살고 있지 않던 우리들로 하여금 믿고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지식이나 시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교부들께서는 이러한 사건들을 간단하게 기억시키기 위해 이것을 형상으로 나타내는 일을 승인했다. 때로 우리가 마음 속으로 주님을 향한 열정이 없을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면 구원의 기쁨이 되살아나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경배하는 것은 형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형상이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이다..... 동쪽을 향해 예배드리는 것, 십자가나 그와 유사한 많은 상징물을 경배하는 성사 숭배는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으나 하나의 중요한 전통인 것이다."
다메섹의 요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제들과 수도사들이 레오의 조치에 반대하였는데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 성상을 파괴한 이유로 '성상 파괴자'(Iconoclast)란 별명이 붙었던 레오 3세의 뒤를 그의 정책을 아들 콘스탄틴 5세와 손자 레오 4세가 이어 받았다. 레오 4세가 죽자 그의 미망인 이레네가 정책을 바꾸었으므로 그의 아들 콘스탄틴 6세 때에는 다시 성상 숭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싸움은 그 후 성상 숭배를 반대한 데오필루스(Theophilus) 황제 때를 거쳐 그의 미망인 데오도라(Theodra)가 어린 아들 미카엘(Michael) 3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하던 때인 842년까지 계속되었다. 비밀리에 성상 숭배를 지원하고 있던 사제들의 영향으로 데오도라는 즉시 성상을 재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소피아교회에서는 이 일이 큰 행사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숨겨져 왔던 성상들과 그림들이 나타나고 교회와 국가의 고위성직자 고관들이 이것들에 경배하였다.
성상문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고 관장되었던 한 회의에서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그때 성상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반대자들을 성상 파괴자 또는 모하메드교도들이라고 비난하였다. 교황은 자신의 대표자들을 참석시켜서 787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세계교회대회에서 성상에 대한 예배가 합법화된 사실을 주지시켰지만,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이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결국 성상에 대한 예배, 참배,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행위, 및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는 행위와 동정녀 및 아기 예수를 조각한 것들에 입맞추는 행위 등 성상에 대한 일체의 경배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다만 교회 안에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있을 때 그들의 행동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허락할 수도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할 때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3가지만 사용할 수 있다는 종래의 의결 내용이 거부되고 '어떤 언어로도 기도 드릴 수 있다는 새 규례가 확정되었다.
샤를마뉴의 셋째 아들이며 당시 아퀴타인(Acuitaine)의 왕이었던 루이(Louis, 814-840)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롤링거(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후에 성경 주석으로 유명해진 스페인의 학자 클라우디우스(Claudius)를 존경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황제가 되자 클라우디우스를 튜린(Turin)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덕스러운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이 새 감독은 프랑크푸르트회의에서 결정된 성상 반대의 원칙을 철저히 집행해 나갔다. 그는 튜린의 여러 교회에서 자신이 우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성상과 십자가 등을 예외없이 제거함으로 인해 그 회의의 결정 사항을 넘어서서까지 철저히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튜린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조치에 찬성했으므로 별 저항을 받지 않았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는 공공연하게 베드로의 지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으며 베드로로부터 로마 감독(교황)에게 넘겨졌다고 하는 소위 '열쇠의 능력'이라는 것도 교황 한 사람이 아니라 감독 제도 자체에 넘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로마 감독은 오직 사도적 생활을 할 때만이 사도적 능력과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슬람교도들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칼의 위력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많은 신자들과 교회가 이때 희생되었고, 이방 로마 제국이 박해를 가하는 동안 고난을 견디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북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상당수가 이슬람교도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죽어갔다. 참으로 이슬람교는 이방인이든 그리스도교인들이든 우상 숭배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4) 바울파의 행적과 가르침 및 평가
성상 파괴 운동 덕분에 박해받던 소아시아 지역의 형제들이 다소간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왕후 데오도라의 치하에서 다시금 성상 옹호자들이 승리하자(842년) 그들은 '성상을 끈질기게 반대하며 우상적이고 미신적인 모든 종류의 예배를 반대하고 자신들이 스스로 자기를 제물로 바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며 심지어 자신들 모두를 스스로 제사장이라고 하는 이단들' 곧 바울파로 불리는 형제들을 근절시키기로 결정했다.
형제들은 셈바트(Sembat)와 같은 유능한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을 통해 다가오는 시련의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셈바트는 8세기 말경 아르메니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카톨릭은 그를 바울파의 창시자라고 지목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이었다.
또 다른 지도자로 세르기우스(Sergius)가 있었다. 그는 34년(800-834)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발이 닳도록 동서남북을 뛰어다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성도들을 돌아보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졌고 강력한 영향력으로 분열을 치유하며 성도들을 연합시키며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였으며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 그릇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했다. 그는 믿음을 가진 한 여인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참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본래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이 읽으며 평신도는 읽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그 여인으로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는 것을 막는 것은 사제들과 마귀의 속임수'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그는 직접 성경을 읽고 믿었으며, 오랫동안 매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의 편지들은 널리 읽혀졌고 그의 활동은 그를 쫓던 자들에 의하여 도끼로 죽음을 당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탁월한 영적 능력과 헌신적인 봉사로 인하여 여러 믿음의 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콘스탄틴, 시므온, 게네시오스, 요셉, 사가랴 , 바네스, 셈바트, 세르기우스, 이들은 연이은 박해로 인한 파멸을 죽음으로 극복하고 그 이름을 보존한 사람들이다. 이런 형제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고, 신약 성경의 전통을 바꾸지 않고 지속시키고자 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종종 성경으로부터 사람과 교회 이름을 취하여 사용했다. 즉 콘스탄틴은 실라로, 시므온은 디도로, 게네시오스는 디모데로, 요셉은 에바브로디도로 불리웠다. 이와 달리 대적자들이 붙인 이름도 있다. 예를 들어 사가랴는 돈만 아는 목자, 바네스는 더러운 사람이라고 불렸다.
이 사람들은 7세기 중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그들의 신앙과 삶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성상 숭배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비잔틴제국은 대체로 바울파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 내에 강경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상 숭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왕은 그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때로 형제들을 탄압하기도 했다. 심지어 강력한 성상 숭배 반대자요 아르메니아 출신이여 형제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레오 3세와 같은 왕조차도 희랍 교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울파에 대한 공격을 허락함으로써 형제들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 일어난 데오도라 왕후의 박해 때 형제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시기에는 왕후의 명령에 의해 교수형과 화형, 수장형 같은 조직적인 살육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842-867년 사이에 데오도라와 재판관들의 열렬한 박해로 인해 형제들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박해도 형제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형제들은 데오도라 치하의 박해와 그 뒤에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8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0세기 경에는 바울파에 대한 태도가 조금 관대해졌다. 그 동안 형제들은 발칸 반도의 트라키아 지역으로 주로 옮겨갔으며 유럽에서도 상당히 번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