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오직 주님 만이

chukang 2009. 7. 1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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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님만이 사도행전 4:1-12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행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무려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2:37-41). 그러나 앉은뱅이를 치유하고 행한 솔로몬 행각 설교에서는 유대교의 핍박이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복음 전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튿날 유대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베드로와 요한을 세우고 그들의 말한 것에 대한 심문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것을 조금도 기탄없이 다 말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를 비롯한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그의 말에 그리고 베드로로 인해 병 나은 사람이 증인으로 함께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고 결국 석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가 있고, 그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박해하는 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세상 적으로도 이런 현상을 어느 집단, 어느 지역에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계의 정치를 볼 때에 여당과 야당이 반드시 나누어져 있습니다. 기득권자인 여당은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전하는 야당지도자들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과 이해관계가 밀접한 자들이 박해를 합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신념은 달랐지만,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어야만 유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했고, 그들을 핍박하여 전도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2. 박해의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박해의 원인은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싫어하여 막기 위함입니다. 또한 교권주의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정죄하여 죽인 예수를 구주로 전파하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자기들이 메시아를 살해한 주모자요, 불의한 교권주의자로 몰릴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것으로써 박해를 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치유 이적과 같은 능력을 사도들이 행하였으므로 종교 지도자들의 긴장과 불안은 핍박을 더욱 가할 수밖에 없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박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언하셨었습니다(요 16:1-4). 이러한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언제나 핍박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정치적인 것도 있지만, 그 뒤에는 사탄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세상에 속한 자들의 핍박은 필연적입니다. 그 옛날 사단은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첫 사람 아담까지 유혹하여 범죄에 동참시킨 이래 현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엡 2:2).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서, 오고 오는 세대 중에서 택한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repentance)하여 구원을 얻기에 충분한 기회를 얻게 하시고자 사단과 세상에 대한 심판도 함께 유보하고 장구한 세월을 통하여 진행되게 하셨으므로, 세상이 선과 악,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로 구분되는 것은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salvation)을 얻어 하나님이 마침내 사단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종말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ale는 성도들을 향한 사탄이 주는 환난과 핍박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런 구속사의 전개에 담긴 하나님의 듯을 깨닫고 순간적 핍박이 올 때 영원한 약속을 기억하여 두려워하거나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 승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환난은 매 시대의 환경에 따라 성도들 각자에게 매우 다양하게 닥치므로, 자신의 삶 속의 모든 상황의 겉모습이 아니라 근본을 통찰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아무리 박해해도 복음은 전파가 됩니다.

아무리 박해를 한다고 해도 복음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더욱 확장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매임이 없이 그 능력을 더해 가다는 사실(딤후 2:9)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사단으로 인한 핍박이 닥치더라도 사단을 능히 이기시고 훗날 영원히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능히 이를 물리쳐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요 16:33; 빌 4:13). 나아가 사단의 시련을 이겨내는 귀한 체험을 경험한 사람은 단순히 그 시련을 순간적으로 이긴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큰 믿음의 분량과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수록 더욱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쳤습니다. 교회공동체를 이루기까지 하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모이면 기도하고, 말씀 듣고, 흩어지면 전도’를 하였습니다. 본문에는 핍박 속에서도 성장해 가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본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교회에 대한 핍박은 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내외적 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기독교 핍박은 스데반의 순교 사건으로 첨예화되는데, 이러한 핍박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스데반의 죽음을 통하여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으로는 도저히 복음의 확산을 막을 수가 없다는 판단을 하였고, 더욱 핍박은 심해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핍박은 12 사도나 일곱 집사 등 지도자에게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더욱 심해졌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성도들은 하나 둘 씩 예루살렘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변 국가로 흩어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곳에 정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흩어진 유대인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유대인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이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회당’이라는 곳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서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었습니다. 후일 신약 시대에 바울 사도는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개 중에는 회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성도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성도들이 이집트, 아프리카 등으로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아프리가 북단 지중에 변에 세워진 유명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복음이 가장 활발하게 전파되고 큰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가까이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멀리는 유럽과 로마까지 진출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시작했을 때, 이미 그 지역에는 예수님을 아는 무리들이 있었고, 이들을 통하여 효율적인 전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무고히 처형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를 오히려 자신의 택한 성도들을 구속하시는 기회로 삼으셨으며,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또한 이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극히 미천하고 유약한 식민지의 일개 무리에 불과했으나 그 엄청난 로마 제국의 대박해를 이겨내고 오히려 로마 제국을 영적으로 점령하고 복음화 시켰던 것입니다.

그 후 이천년을 두고 계속 세계 도처에서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앙은 불타올랐습니다. 이것은 2000년 신약 교회사의 피 묻은 증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역사 이면에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도도히 흐르는 구속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산 증거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되기까지는 단 한 가지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 믿음이 자라고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둔하고 미련한 사람일지라도 성령께서 그 입술을 주장하시므로 주님의 복음을 조리 있게 체계적으로 잘 증거할 수가 있게 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산헤드린’이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실제적으로 유대 사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구성원은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의 70인으로 유대인들의 최고재판 기관으로, 유대인들 자체의 종교적 문제는 물론 민사 문제도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통치 아래서는 사형권만은 행사할 수 없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는 유대 총독의 판결에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도, 당시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처결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산헤드린 공의회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반원형으로 탁자를 놓고 둘러앉아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우고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피고인을 심문할 때의 모습입니다. 인위적인 좌석 배치로 사도들의 기세를 꺾으려고 했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자신들의 빈약한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 번째 물음입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전 미문의 얁은뱅이를 치유한(행 3:1-10) 근거와 방법에 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이는 사도들의 치유 능력을 이방 신이나 사단에 의한 것으로 몰아붙이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즉 그들도 익히 아는 대로 앉은뱅이의 치유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처지에서 사도들을 기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도들의 치유 능력이 여호와의 권세와 이름에 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 뿐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산헤드린의 질문에서 우리는 저들이 인정하는 권위 이외의 모든 권위는 사단 적으로 판단하려는 독선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특별한 권능이 입하였습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즉 성령으로부터 산헤드린의 질문에 능히 대항하고 변증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받고 담대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을 가리켜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본격적인 대답을 하기에 앞서 자신이 행한 일을 ‘착한 일’이라고 전제함으로써 이 일을 두고서 산헤드린이 트집을 잡는 것은 부당함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태도는 이전에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모습과는 뚜렷이 대조되지 않습니까?(마 26:69-75)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을 누구에게 했나요? 10을 보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고 말합니다.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어 바로 여기에 서 있다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권세로 행한 것이냐는 질문에 사단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앉은뱅이를 가리켜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단지 병이 고쳐진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 즉 산헤드린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근거한, 즉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음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할렐루야!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의 핍박을 받을 때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함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굳건히 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도우심을 베푸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들과 병 나은 자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증인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사도들을 더 이상 심문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사도들을 공회에서 내 보내고, 그들은 다시 회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을 억압하거나 다른 징계를 내리고 싶었으나, 명백한 증거 불충분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고 방면하자니 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사상이 백성들에게 유포될 것 같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위협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못하게 하고 내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끝까지 자기 할 말은 다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아멘. 바로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신앙이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고침 받은 앉은뱅이와 같이 산헤드린이라는 큰 권세 앞에서도 당당하게 사도들과 서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우리에게 오는 핍박은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커질수록 사탄은 위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핍박은 산헤드린과 같이 협박일 뿐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그런 협박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 충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믿음을 키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올해는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적 믿음을 키우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이 올지라도 여러분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