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옷만 만져도 마태복음 9:20-22
풍파 많은 이 땅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자주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 때마다 주님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또 주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큰 믿음이라고 생각하여 주님께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이 여인은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라는 작은 바람을 가지고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고칠 수 있었습니다. 또 여인은 주님께 칭찬까지 들었습니다. 대체 ‘겉옷만 마저도’라는 이 여인의 말 한 마디는 어떤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을까요? 거기에 대체 어떤 의미가 들어 있기에 주님께서는 이처럼 즉시 여인의 병을 고쳐 주셨을까요?
1.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잠시 여인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그 때까지 무려 12 년간을 혈루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고칠 수 있는 병이라지만 당시로서는 절대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병이 가져다주는 통증과 병이 나을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이 여인은 얼마나 저주스런 삶을 살아왔겠습니까? 주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은 바로 이러한 인생의 최악의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혈루병은 문둥병과 함께 취급하기 때문에 ‘죄’로 인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간주했으며, 특히 혈루증과 같이 불결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종교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와 만나는 것도 회피합니다. 부정한 것을 보거나 만지거나 닿게 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녀를 사람 취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누구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행여나 만나거나 보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피해 다닙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왕따로 인하여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자살하는 경우까지 더러 있습니다. 그만큼 사회 속에서 외톨이로 지낸다는 것을 무서운 것입니다. 따라서 12년 동안을 앓고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뿐입니까? 그녀는 이 기간 동안 많은 의원에서 속아 가산을 탕진하였습니다(막 5:26, 27; 눅 8:43), 재산적으로 인력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완전한 절망 가운데 빠져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희망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신적 권능을 소유한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인가? 믿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예수님 곁으로 갈 수나 있을까?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절박한 심정이 되면 생각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됩니다. 그녀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꼭 예수님을 만나야지! 내가 꼭 예수님으로부터 해결을 받아야지! 그리고는 예수님이 지금 계신 곳은 어디고, 언제 이곳을 지나가실까? 모든 것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지나시는 그 날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나는 길에 있다가 수많은 군중들을 결사적으로 헤치고 들어 왔습니다. 제자들도 헤치고 들어와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와서 살짝 손을 내밀어 그 옷자락을 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여인에게는 욕심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절박한 바람이었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이런 절박한 심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안일했다는 증거가 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이렇게 세월만 가게 된 것입니다. 일촌광음불가경, 세월부대인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세월은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은 바로 그 때 뿐이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예수님을 또 따라가면 되지 할 수도 있을 수 있으나, 사람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로 지금이 은혜 받을 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 대한 구원의 확신
이 여인은 확신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또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는 딸 아이가 죽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습니까? 딸 아이가 죽었으나 주님이 오셔서 손만 얹으면 되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리고 혈루병 여인도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이에게 주님의 손만 얹어도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야이로처럼 주님의 신적 권능을 확신 있게 믿은 태도였습니다.
마가복음 5:30-33에도 혈루병 여인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두려워하여 떨면서 자신이 만졌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옷을 의도적으로 만진 사람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능력이 나간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인 또한 옷을 만진 순간 자신이 나앗음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는 것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공개하시려고 하심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건의 전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에워싸니 당연히 밀려서 사람들의 손이 옷에 닿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옷에 손을 대었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니 빨리 회당장의 딸에게로 가자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위를 둘러보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나가기를 상당히 주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이 예수님 옷깃만 만져도 나을 것을 확실하게 믿었지만, 막상 주님의 능력이 자신에게로 들어와 단번에 고쳐주시는 것을 느끼고는 주님의 신적 능력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월적 능력에 대한 두려움이요, 예수님의 전지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어쩌면 이 여인은 윤리적 가책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몰래 만졌다고 하는 양심 때문에 책망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루병 나음을 입은 여인이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를 해소시키시고, 또한 병이 나았음을 공표하시고 평안을 주시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여인이 숨어서 부정한 몸으로 행한 행동에 대하여 무례하다고 하거나 불쾌감을 느끼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 여인의 입을 통해 사실에 대한 고백을 들으시고 축복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 앞에 나와 ‘제가 만졌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때에 이 여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병을 고친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녀의 내면에 감추어진 믿음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는 확실하고도 완전한 회복의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의 회복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인격적인 구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병으로부터의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원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육체의 건강과 영혼의 안식을 향해 가라는 축복입니다.
오늘날은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주님께서 과연 내 기도를 들으셨을까?’ 과연 내 기도를 들어 주실까?라고 의심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절대로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약 1:6-8)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무한한 능력의 주님이시오, 못하실 것이 없고, 못 고칠 질병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먼저 확고하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골방에서 기도하는 심정
혈루병에 걸린 이 여인은 성경에 나타난 여느 사람 못지않게 확고한 믿음을 소유했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주위 사람을 번잡스럽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여인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서서 주님의 발걸음을 가로막지도 않았고 자신의 고통을 길게 하소연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 사람 가운데 섞여 예수님도 모르게 슬쩍 옷깃을 만졌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골방에서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기도란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사람들에게 떠벌이지 않습니다. 또 기도를 남보란 듯이 하지도 않습니다.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오직 고요하고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시편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내가 힘들다고 사람들이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한다고 말한다고 그들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다고 병을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도와줍니다. 진정한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을 통해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통로인 동시에, 도우심의 통로요, 복이 오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것을 횡설수설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아무 의미없이 형식적으로 말만 많이 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열심과 반복되는 장시간의 기도가 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기도는 많이 해야 합니다.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다 아뢰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능력이시오, 우리의 도우심이요, 피할 바위시며, 방패시며, 산성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세상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요, 실패와 좌절과 절망만이 남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진실 된 기도를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직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기도입니다. 은밀한 중에 행하는 구제와 마찬가지로 사심 없이 은밀히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다 들으시고 갚으십니다. 은밀하게 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몰래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외식함이 없이 순수한 동기와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이방인들은 중언부언할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성도의 모든 신앙생활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고, 그 외에 불순한 동기와 목적 즉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든지,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구하는 것 등과 같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 헛되고 무가치한 것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허식 없이 한 마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간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은 다른 사람들의 옷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만진 순간 열 두 해 계속되던 여인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 옷에 신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옷만 만져도 낫겠다는 여인의 믿음에, 그 간절한 소원에, 순수함에 신비함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 이런 순수함, 이런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혈루병에 걸린 부정한 사람은 구약 정결법에 따라 다른 사람을 접촉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이 접촉해서도 안 됩니다(레 15:1-12). 그러나 이 혈루증 여인은 이런 율법을 깨고 은혜의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에 치유 받았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에, 보통 사람은 죄와 접촉하면 그 죄에 의해 더러워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죄를 이기시고 죄인을 깨끗케 해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움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능력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은 제약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나갈 수 있고, 아무 때나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을 만날 때에 주님의 능력을 받고, 치유 받고, 은혜 받고, 도우심을 받고, 정결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 (0) | 2009.07.17 |
---|---|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0) | 2009.07.17 |
우상숭배(화상숭배)가 잘못된 것임을 천주교의 역사가 말하고 있다. (0) | 2009.07.17 |
오직 주님 만이 (0) | 2009.07.15 |
횃불 언약 (0) | 2009.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