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제물: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가인의 제물: 땅의 소산
답은 히브리서 11:4에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에 대하여 단호하게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속사적인 계시에 비춰볼 때 아벨의 제물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는 첫 새끼 중 가장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만물의 소유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출 13:2). 둘째는 화목 제사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에서-장차 하나님과 죄인의 화목을 위해 십자가 상에서 희생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의미를 지닌다(골 1:20-22).
가인의 제물은 농사를 지어 얻은 농산물이나 포도원의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으로 본다. 결국 가인의 제사는 피흘림이 없는 제사, 곧 기름, 고운 가루, 유향 등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같이 피흘림이 없는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후일 제사법에는 가루 제사도 있다.
그렇다면 가인의 직업이나 제물의 종류 때문에 열납하지 않으신 것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아벨과 그 제물” 또는 “가인과 그 제물”이라고 표현되었다. 즉 사람과 제물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제물만이 아닌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는 사람이고, ‘종’은 제물이다. 즉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 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뜻하는 것이다.
아벨은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을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정성껏 제물을 골라 ‘믿음’으로 바쳤기 때문에 열납된 반면, 가인에게는 그러한 겸손과 정성 및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열납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물 이전에 먼저 제물 드리는 자의 마음 자세 및 정성, 그리고 믿음을 보신 것이다.
가인의 마음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5절의 “안색이 변하니” 당황 또는 불만과 분노의 마음 상태를 표시하고 있다. 가인은 제물을 열납치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불만과 제물이 열납된 아벨에 대한 질투심으로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의 기색은 없었다. 마음의 자세가 바로 되어 있었다면, “왜 내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까?”라고 하는 의문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6절을 보면 확실히 나타난다. “어찜이며... 어찜이뇨” 두 번 거듭 반복된 하나님의 이 질문은 가인의 분노에 대한 질책이자, 동시에 가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다. 죄인이 망하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없거나 하나님의 긍휼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다. 단지 그 자신의 교만과 강퍅한 고집 때문에 스스로 멸망과 저주를 자초한다.
일부 교회에서는 헌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다. 몇 %를 바치는 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이들은 한 과부가 두렙돈을 바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주님께서 그 과부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으로 보아서 헌금은 몇 %를 바치느냐에 따라 응답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아벨은 가인보다 % 면에서 더 많은 것을 바쳤을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을까? 절대로 아니다. 모든 헌금은 바치는 사람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를 제일 중시하는 것이다.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그 제물도 역시 정성이 담기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답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가인은 자신을 만나는 자가 죽일까 두려워 하였다. 그 자는 누구인가?
이 일로 인하여 결국 가인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죄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과연 가인이 만나는 자는 어떤 자인가?
4장 3절을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월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뜻은 “날들의 끝”이라는 뜻이므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뜻한다. 이 기간 동안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새로운 자식들이 많이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오직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 이렇게 4명만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기록의 특성상 구속사의 흐름을 중심으로 필요한 인물만을 발췌하여 기록하는 ‘선택 기록설’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5장 4, 5절에 근거할 때 셋 출생 이전 아담 생애의 초기 130년 동안에 후손이 가인과 아벨 밖에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초기에 왕성한 번식력(번성의 명령)으로 볼 때 많은 후손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여기저기에 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후손들은 아벨의 형제들이요, 또한 이들도 결혼을 하여 또 자녀를 출생시켰으므로 친척이 된다. 히브리인들은 형제, 친척의 원수를 갚을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아벨의 무죄한 피에 대하여 보수할 권한과 의무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가인을 살려 두셨을까? 살인죄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교훈하시는 것이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유리’ 두려움에 떨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서 떠도는 벌을 내리신 것이다. 따라서 가인의 죽음은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었고,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가인의 표에도 불구하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살인죄에다 하나님의 명령을 범한 죄가 추가되어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가인은 죄의 고통과 비극을 증거하고 경고하는 본보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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