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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1편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chukang 2009. 7. 1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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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1편 의인과 악인의 두 길

 

시편 1편은 시편 전체를 여는 장으로 시편 전체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시편 전체의 서시라고도 합니다. 이 짧은 시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인간의 존재 전체를 결정한다는 언약 사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은 여호와의 존재와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 순종하는 의인의 자세와 그 복된 결과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4-6절은 악인의 자세와 그 불행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행복과 불행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구체적인 사물을 예로 들어 그리고 철저한 대조를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의인이란 악인의 길에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분의 말씀에 즐거이 순종하는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의인과 그렇지 못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실로 공의롭게 엄정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복 있는 사람

이 말은 ‘복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복들에 해당하는 말은 그 기본 의미가 ‘똑바른 길로 나아가다’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인생이면 누구나 원하는 길 곧 복을 얻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복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죄라는 말은 ‘삐뚤게 나가다’는 뜻입니다. 즉 죄는 화살이 과녁을 향해 정확하게 날아가지 못하고 삐뚤게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과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향하여 똑바로 나아갈 때에는 복을 받게 되지만 삐뚤게 틀어지면 죄인이 되어 지옥의 멸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똑바로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며 또 그 길로 행하는 자에게 인생에 필요한 모든 복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고 하였습니다(출 20:6).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의 결실이자 선물이며, 이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는 인생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며 그분에게서만 참 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행복을 찾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악인들의 삶의 모습을 가리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악인은 어떤 큰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자를 가리킵니다. 사실 세상의 그 어떤 죄인보다 큰 죄인입니다. 살인자라도 말씀으로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가장 큰 죄인은 말씀에 어긋나는 죄를 짓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생각이나 의지, 욕심 등에 따라 살 때 오히려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악인입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방법으로 복을 추구하는 악인의 삶의 태도를 시인은 ‘악인의 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복 있는 사람은 이 같은 인본주의적 방법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등불로 삼아 사는 신본주의적 삶의 살아가는 자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빛을 따라가지 못하고 곁길로 빠진 자는 죄인입니다. 죄인은 삶의 목표나 방법이 그릇된 사람입니다.

오만한 자는 본래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는 신본주의적 방법으로 사는 삶을 비웃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오만한 자의 자리는 ‘죄의 가장 높은 꼭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자는 창조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된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알고 그 분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사는 줄로 믿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좇고, 서고, 앉고는 그 삶의 태도와 방법과 목표가 그릇되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죄에 미혹 당해서 죄와 벗하다가 그만 죄악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마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죄악을 경계하고 미혹당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죄악의 확산 성질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의인의 적극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위에서는 의인이 소극적으로 하지 않아야 될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좁게 보면 모세오경이나 구약 율법을 뜻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 전체를 뜻합니다. 이 성경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마음이 온통 성경에 쏠려있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좇아 살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에 온 마음이 집중되어 말씀이 지시하는 바는 무엇이든 기쁨으로 받는 자입니다. 시편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9:16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35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말씀을 이렇게 즐거워하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묵상은 단순히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거나 고찰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여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측면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는 그 말씀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주야로 묵상하는 데로 나아가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3. 시냇가에 심은 나무

나무가 존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필수 요소는 곧 물입니다. 그러므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생명의 근원과 연속되어 있는 안정과 번성 및 그러한 상태에서 무한히 뻗어나갈 가능성을 소유한 자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물가에 있는 나무는 사시사철 늘 푸르듯이 인생의 참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 늘 동행하는 복 있는 자는 그의 인생이 늘 푸르고 싱그러울 것이며 항상 안락과 풍성함이 넘쳐흐를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지 말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접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대부분이 메마른 광야와 험한 산지로 이루어져서 척박하기 그지없음을 생각할 때에,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실로 애타게 사모하는 간절한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토양은 비가와도 고이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연평균 강우량도 고작 600mm에 불과해서 물이 고인 샘이나 물이 흐르는 시내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그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무슨 일에든 실패를 겪지 아니하며 반드시 부귀영화만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성도 역시 근본적으로는 죄인이니 이 땅에서 죄와 그 질고에 얽매어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의 신앙을 연단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용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벧전 5:12)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은 안정적이고 그 궁극적인 형통을 뜻합니다. 즉 뿌리가 물의 근원에 닿아 있는 나무는 바깥 가뭄에도 불구하고 항상 푸르름을 잃지 아니하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게 되듯,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비록 세상적으로는 질고의 삶을 살지라도 넘어지지 아니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주시는 영생과 풍성한 하늘 상급을 받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견고하게 서듯, 곤고한 중에도 낙심치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그 삶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성도가 반드시 형통하리라는 것이 시편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요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의인의 형통한 삶과 대조되는 악인의 불안정성과 그 궁극적 멸망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겨는 소중한 알곡과 달리 전혀 쓸데없는 것을 상징합니다.(사 5:24;렘 23:28; 습 2:2; 눅 3:17) 그리고 겨가 바름에 날리운다는 것은 그 불안정성과 허망함을 상징합니다. 즉 악인은 그 뿌리를 물가에 둔 나무와는 달리 어디에서든지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허망한 신세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심판입니다. 겨를 바람에 날리는 일은 농부들이 추수 후 곡식을 타작할 때에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혹시 타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시골에서는 어느 한 집에서 벼를 베게 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함께 일을 합니다. 그리고 탈곡기를 논 가운데 가져다 놓고, 자른 벼에서 이삭을 털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벼의 줄기 부분은 다른 쪽으로 던져 버립니다. 또 털어낸 벼 이삭을 다 모아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돌멩이도 가려냅니다. 이러한 작업은 다른 곡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콩도 그렇고 팥도 그렇습니다. 키에 올려놓고 키질을 하면 잘 익고 충실한 알맹이는 안쪽으로 모이지만, 쭉정이는 바깥쪽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알곡들만 따로 통에 담는 것입니다.

요즘은 콩을 상품부터 하품까지 무려 5단계로 나누는데, 풍력기가 있어서 바람을 일으키고, 한 곳으로 수확한 콩을 넣으면, 그 콩이 무게에 따라서 각기 떨어지는 곳이 다릅니다. 충실하고 좋은 콩은 무겁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통으로 떨어지고, 그 다음 좋은 콩은 조금 더 멀리 날아가서 다른 통에 떨어지고, 가장 가볍고 나쁜 콩일수록 제일 먼 통에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일도 기계를 이용해서 나눕니다. 여러분들도 tv에서 보았을 것입니다. 사과나 배를 얹어 놓으면 그 무게를 감지해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어지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렇듯 자랄 때에는 동일한 땅에서 농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라지만 그 결국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악인이 비록 이 땅에서 형통하게 살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며 결국은 인생의 추수기에,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 날에 멸망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그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형벌을 받게 됨을 가리킵니다. 악인의 징벌을 통한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에 대한 소망은 시편 전체의 핵심 사상 중에 하나입니다. 시인은 단지 공의의 실현에 대한 단순한 소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인생에 있어서 그것은 분명한 진리임을 확신 있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최후 심판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러한 확신 속에서 죄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의인의 회중은 전혀 죄가 없는 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구별된 성도들의 모임 이나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전 5:13)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모임에 들지 못하는 것은 곧 저주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도 못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그것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것입니다(마 25:30).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길은 사람이 지향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길을 인정하신다는 말은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보살피며 인도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모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힘쓰는 자들은 지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니 저들은 안전하게 영생에 이르게 되지만, 이와 달리 악인에 대하여서는 그냥 내버려 두실 뿐이니 저들은 계속해서 사망의 길로 나아가 마침내 영원한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4) 이처럼 인생에 대한 절대 주권은 오로지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 분을 향한 삶의 태도와 방향에 따라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