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돔의 범죄 오바댜 1:1-14
오바댜는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총 21절로 되어 있으나 예언 대상국인 에돔에 대한 심판 선언과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서민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약속 등으로 그 내용이 일관되어 있는 예언서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대가로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실제로 에돔은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다가 멸망한 후 5년 뒤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에돔의 수도인 셀라(페트라)가 함락되었고, 그리고 B.C. 321년 알렉산더의 부하 장수 안티고누스에 의해 에돔 전체가 완전히 몰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알렉산더의 부하 안티고누스는 “드로아”라는 도시를 세웠는데, 이 드로아는 신약 시대에 사도 바울이 3회나 방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 기억하고 있는 ‘유두고’라는 청년이 바울의 설교 때에 3층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사도 바울이 기도하여 다시 살려낸 적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바로 드로아입니다.
에돔 사람들이 안티고누스에 의하여 멸망이 되자 현재 요르단 지역으로 와서 ‘이두매’라는 나라를 건설했는데, 이들은 또 ‘나바티안’ 사람들에 의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 나타티안 사람들은 세계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암벽에 궁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곳은 일반 사람들은 잘 몰랐는데,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죠. 바로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성전’이라는 영화가 바로 이 나바티안 사람들이 만든 암벽 궁전에서 촬영이 되었습니다.
이 나바티안 사람들에 의해서 쫓겨난 에돔 사람들이 유대 땅 남쪽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유대 땅에 살다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의 마지막 왕가인 마카비의 하스몬 왕조때에(유대 왕 요한 힐카누스 B.C. 134-106) 에돔 사람들은 모두 할례를 받고 유대인에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에돔 사람 중에 훌륭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헤롯 왕입니다. 그 때가 B.C. 37년입니다. 참고로 B.C. 37년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해입니다. 그리고 헤롯 왕이 에돔 사람들은 유대에 완전히 병합을 시켜 버렸습니다. 결국 에돔 사람 출신 유대 나라의 왕이 에돔 나라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바댜의 예언은 성취가 되었습니다. 에돔은 마치 장자의 명분은 팥 죽 한 그릇에 팔고도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교만하여 마침내 언약의 대를 잇는 복에서 밀려 난 에서와 같이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추호의 어긋남이 없이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약속이나 경고 등은 절대로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창조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이 피조물인 모든 인간의 기본자세입니다(미 6:8; 벧전 5:5,6). 에돔의 멸망은 결국 이같이 피조물 된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를 저버리고 교만한 데 대한 징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잠 8:13) 그 교만이 멸망의 길(잠 6:12-19)임을 잊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된 자리를 버리시고 스스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빌 2:5-8)을 우리의 삶에 있어서 표상으로 삼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바댜는 에돔 족속을 가리켜 ‘높은 곳에 사는 자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돔 좃고의 높아진 마음, 즉 교만함을 그들의 거주지인 세일 산의 드높고 험준한 산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돔 족속의 중심 거주지는 사해 남방에 우뚝 솟아 오른 세일 산(창 36:8)입니다. 이곳은 지세가 워낙 가파르고 험난할 뿐만 아니라 동굴과 같은 피난처가 많은 천연 요새로서 일찍이 어떤 나라도 그곳을 침공하여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에돔의 수도 ‘페트라(셀라)’는 그 입구가 약 3.5km의 좁은 절벽 길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적은 인원으로도 많은 대적을 방어하기가 매우 용이하다고 합니다. 또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라는 표현에서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하는 에돔 족속이 고공비행을 하며 높은 절벽 끝에 보금자리를 트는 습성을 지닌(욥 39:27,28) 독수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이 같은 거주지의 지형적 이점을 과신한 나머지 세상 어떤 나라도 자신들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고, 또 이 세일 산을 본거지로 하여 주변 나라들의 변방 지역을 약탈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종종 이들의 약탈 행위로 몸살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지형적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에 살고 있고, 용맹한 우리 에돔 사람들을 누가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만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주와 역사의 창조자이시며 절대 권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까지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에돔 사람들은 무시하며 자신들의 용맹과 견고함만을 믿고 악행을 저지르고 교만의 목소리를 높임으로 그들은 멸망을 자초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과 같은 이방 국가들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언약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에게 하듯 십계명과 율법으로가 아니라 피조물로서 창조주에 대해 가져야 할 기본자세의 여부에 따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모든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19,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돔과 같이 자신의 안전히 스스로의 힘에 달려있다고 과신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을 업신여기는 민족들과 국가들에게는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2:14, 15절을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방인들도 역시 율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근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는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돔을 멸망시킨 이유를 구체적으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남유다의 멸망을 방관하고 기뻐했기 때문입니다(11,12절).
“네가 멀리 섰던 날”(11) 은 말은 반대 방향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되던 날 에돔 족속이 유다를 돕지 않고 수수방관했으며, 오히려 바벨론을 간접 지원했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왕하 25:3-7절을 보면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진하였고, 갈대아 사람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사가 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 미치매 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신문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여기에서 나오는 ‘아라바 길’이 바로 에돔에 속해 있는 길입니다. 즉 에돔 사람들은 형제의 나라인 이스라엘 즉 유다의 왕과 군사들과 백성들이 에돔까지 도망을 왔는데,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바벨론을 간접 지원했던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이 행동하는 에돔의 위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돔 족속이 비록 바벨론과 같이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주역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의도와 행위는 이스라엘을 직접 공격한 바벨론보다 낫다고 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형제국에 대하여 이같은 죄를 범했다는 것은 무지한 이방인보다 더한 가중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겠습니다.
“형제의 날”(12) 이는 에돔의 형제인 야곱, 즉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아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날을 말합니다(왕하 25:1-21). 흔히 이날은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시 137:7)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 날에 에돔은 방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악행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방관하다’는 히브리어 “라아”는 지켜보다, 관찰하다, 즐거이 바라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에돔은 남유다가 멸망하는 날 멀리서 관망하면서 즐거워하는 악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유다가 멸망하던 날 이를 축하하며 예루살렘의 완전을 멸망을 기원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시 137:7). 그러나 이것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기쁨을 제어할 수 없어 크게 웃는 상태나 혹은 교만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알리기 위해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방관하고 기뻐하며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점점 더 기쁨이 커져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에돔의 모습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도를 만난 이웃이 곤경에 처했을 때에 평소 가까운 이웃이며 진정한 형제라고 말하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오히려 이를 방관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눅 10:31). 욥도 자신이 극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친구들이 각자 그들의 길을 떠나고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하여 무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욥 34:27)
이와 같은 사실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마 19:19)에 위배가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형제, 내 이웃, 지구촌 가족이 이루 말로 형언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다면 그것은 범죄가 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유다의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13) 에돔의 잔인한 행위에 대한 고발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본성을 드러내어 다른 정복자들과 함께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마땅히 형제의 아픔에 동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복자의 끄나풀이 되어 예루살렘을 약탈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약탈하고 지나간 뒤에 그 남은 것마저 약탈했습니다. 굶주리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먹을 것이 필요하고, 병이 들어 아픈 형제를 위해서는 병을 고쳐 주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약탈당하여 먹을 것도 없는 그들을 도리어 약탈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참으로 비겁하고 비열한 행위입니다. 평상시에는 자기보다 잘살기 때문에, 자기보다 힘이 세기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도저히 저항 할 수가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을 보고는 가서 재물을 빼앗은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약탈하는 동안에는 그들에게 잘못 보일까봐 가만히 있다가, 그들이 약탈을 끝내고 돌아가니까 그 남은 것마저 약탈을 하는 모습을 볼 때에 이것이 형제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3. 남유다 백성들을 붙잡아 대적 바벨론에게 넘겼습니다.
더 심한 행동은 14절을 보면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많은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탈출하여 각지로 흩어졌는데, 에돔 족속은 이들의 퇴로를 막아 백성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히거나 칼에 맞아 죽게 했던 것입니다. 전쟁에 패하여 겨우 살아남은 자들의 탈출구를 차단하면서 죽음의 길로 몰아간 죄는 이반 국제법상에서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 견지에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심하게 비난을 받아야 할 행위입니다. 더구나 자기 형제를 붙잡아 대적에게 넘겨주어 죽음에 이르게 한 행위는 에돔의 죄악이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에돔의 멸망은 바로 이러한 잔악함에 대한 합당한 심판임을 나타내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이 말은 에돔이 예루살렘 성 중에 남겨졌거나, 혹은 바벨론의 군사를 피해 숨어 잇는 남유다 백성들을 찾아내어 바벨론에 넘겨주어 노예로 삼게 한 일을 가리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노예 매매를 하기도 하였다고 아모스 선지자는 고발하고 있습니다(암 1:9).
우리는 가룟 유다가 3년 동안이나 스승으로 섬기면서 동거동락하던 예수님을 은 30에 대적에게 팔아넘긴 경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죄를 범한 가룟 유다의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스스로 목을 매달았고, 떨어져서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오는 비참한 종말(마 27:3-10; 행 1:18)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형제 민족을 죽음의 자리에로 내 몰았던 에돔 족의 결국이 멸망이라는 사실은 오늘날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며 무관심하게 대하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심각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국이었지만 불화하였습니다. 저들과 같이 말로만 사랑하고 화평한 것은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보다는, 물질의 다소에 따라서 편이 갈리고 서로 불화하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겠지요. 교회 내에서 에돔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성도가 있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 간에도, 한 교회의 내부에서도, 심지어는 선교지에서 까지도 편이 갈리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에돔의 모습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런 형제들에게는 위하여 기도하고 권고하며 격려함으로써 믿음을 굳건히 세워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가 있는 것도 든든한 힘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군사가 된 성도들이 함께 하면 더욱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제하는 믿음의 형제는 참으로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돌보고 격려하며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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