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로마서 5:12-21
인류의 죄는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들어 왔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처 사람인 아담과 우리 모든 인간들은 육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담이 지은 죄는 보편적으로 전 인류에게 적용되어지고,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사망도 인간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첫 사람 아담과는 달리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순종하심으로 감당하심으로써 인류의 법적 대표로서 새 생명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속죄 사역은 인류에게 새 생명과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졌고, 이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곧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한 사람에게는 다 적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대표와 연합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대표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정말 좋지 않은 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아닌데 왜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가야합니까?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렇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 대표성의 원리가 있다면 그 대표성의 원리에 순종해야 하고, 만일 없다면 따르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34:6-7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는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보면 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구원’과는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노아의 경우에 술에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창 9:21) 이것은 성경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것은 성경 전체를 보면 ‘술’로 인한 범죄 행위에 해당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취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해석을 해서도 안 되고 합리화가 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술을 마시는 것 그 자체가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서 둘째 아들인 ‘함’이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함의 자손이 가나안입니다. (창 10: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가나안에게 선고된 저주가 그의 후손에게까지 미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징계를 유보하셨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을 정벌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에서는 팥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창25:31-33) 그 이후 에서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압과 암몬 족속들은 저들의 선조들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에게 대항하였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총회로부터 영원토록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자 이렇게 보면 가나안과 그 자손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모압과 암몬 자손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또 에서의 자손은 더 억울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대표성의 원리요,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그들을 이스라엘의 총회에서 제외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라고 하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에 이 모든 사람들이 정죄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명한 신학자인 핫지 박사는 “하나님은 아담의 죄를 그 후손들에게 담당하게 하셨으니 이는 아담 한 사람 안에서 만인이 범죄하게 된 공동담보의 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영적 생명을 지지하고 지도할 성령의 감화를 모두 박탈당하여 선천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이 범죄성 자체가 벌을 받기에 마땅하다. 인간의 성질은 타락 후에도 이성, 양심, 자유행동력이라는 고유의 기능은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과 의무를 하나도 감당할 수 없으며 자기의 사악한 성질과 생득적 경향을 스스로 변화시키려는 의욕이나 가능성도 없고 또 이와 같은 변화를 위하여 성령과 협력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까지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이것을 가리켜 ‘선택과 유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모든 계획도 같은 원리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의 대표자이십니다. 이 기초 위에서 우리들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가 되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은 우리들에게 전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 어디에서나 부모가 자손을 대표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경륜이 태초부터 자손은 그 선조들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은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이 사망의 대표성의 원리는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망의 저주의 사슬을 끊어버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차이점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첫째 아담과는 달리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순종하심으로써 인류의 법적 대표가 되어 모든 인류에게 새 생명의 구원의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은 모든 인류를 즉시 구원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은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첫째 아담으로부터 탈출하여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성도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를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첫 번째로 죄와 율법과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롬 3:20).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셨을까요? 이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율법은 구원을 받은 백성이 지켜야 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다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어디를 보아도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되므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고 마는 징계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결론은 모두 지옥에 가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의 의문이 생겨야 하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지옥에 갔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율법을 잘 살펴보면 ‘하라’ ‘하지 말라’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도 죄를 짓게 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해도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생득적 즉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고 싶어 하는 경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어쩌면 그렇게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또 모든 사람은 다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지옥으로 데려가시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나요? 그곳에서 그냥 죄를 짓고 살다가 죽게 내버려 두시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구원의 방책을 마련해 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 회개라는 것은 신약 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는 원리입니다. 즉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구원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는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회개를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회개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제사 제도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회개할 방도를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용서는 곧 율법을 지키지 못한 부분들을 지킨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를 많이 지내는 사람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일까요? 사무엘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燔祭)와 다른 제사(祭祀)를 그 목소리 순종(順從)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順從)이 제사(祭祀)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羊)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제사에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의 5가지가 있습니다. 속죄제나 속건제는 죄와 보상의 제사이기 때문에 적게 드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화목제, 소제 등은 많이 드릴수록 그 믿음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율법이 없을 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율법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몰랐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율법이 없어서 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고 하면 지옥 가는 사람이 없게 되겠죠?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율법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모세 시대 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서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세가 문자로 기록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은 글로 기록하기 전에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 맺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에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다만 문자로 기록이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또 다른 모든 민족들에게도 율법은 있었습니다. 즉 원시적인 형태이지만 각기 가지고 있는 도덕 규범이나 불문율이 있었고, 특히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성문법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법률을 가지고 자신들의 죄악된 행위를 규제하고 통제해 나갔던 것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가 BC 14세기에 집성시킨 성문법전입니다. 1901년 프랑스의 탐험대가 법전을 새긴 석비(石碑)를 수사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전문과 후문에는 함무라비의 입법정신(정의법, 약자의 보호)이 새겨져 있고, 282개의 판례법은 형법· 가족법· 민법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형법은 눈에는 눈이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의 원칙도 있었으나 사적인 복수나 약탈혼 등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가해자의 신분과 범죄의 정황에 따라 형벌이 달라졌습니다. 법전은 셈어에 속하는 아카드어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가 율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감사할 것은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지만 그 지키지 못한 것도 제사를 통하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킨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신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율법을 넓게 보면 성경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말씀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어 천국으로 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죄인 줄을 몰랐습니다. 죄를 몰랐을 때에는 용서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를 깨닫게 되었고, 이 죄의 용서는 오직 주님의 보혈로서 가능한 것이며,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는 은혜가 더욱 넘쳐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5)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너무나 연약한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 어떤 의로움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라고 하셨습니다(요일 4:8, 16). 우리를 위해 끝없이 사랑을 베풀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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