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유익 베드로전서 4:1-6
세상에서 살다보면 나쁜 사람을 만나서 손해를 보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사람들은 보통 3가지의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첫째는 같은 방법으로 보복을 합니다. 둘째는 기관에 고발을 합니다. 셋째는 그냥 참고 넘깁니다. 어떤 방법이 제일 좋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방법이 정답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벧전 3:9을 보면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惡)한 자(者)를 대적(對敵)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訟事)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者)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同行)하고 네게 구(求)하는 자(者)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者)에게 거절(拒絶)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怨讐)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逼迫)하는 자(者)를 위(爲)하여 기도(祈禱)하라.”(마 5:39-44)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성도지만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6:31을 보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그런대로 억지로라도 실천해 볼만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를 주면 상대방도 하나를 준다는 보상심리 즉 “give and take" 거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크게 손해 볼 일이 없습니다. 다만 내 자존심만 살짝 숙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권면대로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이런 모습으로 살면 바보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최고로 치는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억울한 사랑(?)을 해야 할까요? 바로 주님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나요? 인간은 하나님을 배신한 존재입니다. 죄옥으로 보낸다고 한들 아무런 항변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모든 질고를 다 겪고 모든 수욕을 다 겪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도 모자라서 십자가에 못 막아 죽이기까지 하시지 않았습니까?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해야만 하셨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대로 지옥에 가는 것이 너무나 불쌍해 보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 때문에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는 원수도 사랑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를 해 주어야만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선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에 대한 태도로서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3:13-17) 핍박자들이 성도를 핍박하는 것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조종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선을 버리고 악에 빠지게 하고 나아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구원의 길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러한 핍박자들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궤계를 간파하고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더욱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 사단의 궤계를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대방과 싸움은 결국 사단에게 지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선을 행할 때에 받는 고난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믿음을 견고케 하는 방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핍박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계기로 삼으라고는 것입니다(3:15).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가운데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을 보면 핍박자들은 도대체 성도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엇 때문에 그 같은 핍박을 견디어내는 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성도에게 물어올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깨닫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기도 하는 것이지만, 남이 나에게 잘못을 할 때에 나도 같이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같이 하고나면 내 마음이 아픔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하나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가리켜 말세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전에도 있어왔던 말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때보다는 지금이 더욱 더 말세에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말세가 가까워질수록 마귀의 발악은 더욱 심해지고 성도를 향한 핍박은 더욱 더 거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소망 중에 해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고전 15:58; 갈 6:9; 살후 3:13; 히 12:3,5).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난을 받으면 반드시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은 핍박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라면, 본문 말씀은 고난을 받을 때에 유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유익이 되는 것이지만,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쾌락은 분명히 악한 쾌락이기 때문에 성도는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악한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3절에 나오는 대로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통한 이방인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헬라 문화의 영향 속에 있었습니다. 헬라 사회는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극도로 타락하였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우상숭배가 만연하게 되면 그 우상을 섬기는 종교는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가 성행할 때에 중이 권세를 탐하고 색을 탐하여 결국 국가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천주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권력을 사모했으면 스스로 ‘교황’이라고 일컬었겠습니까? 유럽 대륙을 피로 물들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신부와 수녀들의 타락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도 권력에 의지하고, 세상적인 부를 탐하고 있고 성적인 타락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죄악 된 옛 생활입니다. 이것을 버리지 않고는 바른 성도가 될 수 없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비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게지만, 이 비방도 역시 성도들로 하여금 옛 생활을 단절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4절) 비방이 비방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핍박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오히려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옛 생활을 청산하고 성화의 과정으로 나가게 하는 연단의 도구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 고난들을 이겨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이 유익을 주는데, 단지 유익을 주기 때문에 이기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일 먼저 주었습니다. 1절에 “갑옷을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것을 생각하고 우리도 역시 그러한 마음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하였는데, 육체의 고난이 죄를 없애버리거나 용서의 조건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뜻할까요?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옛 생활을 청산하는 것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복된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받을 때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을 의지함으로써 죄를 제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정욕과 세상 풍속에 의해 지배를 받지만, 일단 거듭난 성도가 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인도를 받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비록 육체 안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육체의 정욕, 즉 세상 풍속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의 정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타락하게 하려고 하는데, 그 도구가 바로 우리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첫 번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믿음과 관련하여 반대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믿음이 좋았니?’ ‘넌 전에는 그런 짓 많이 했잖아!’ ‘한두 번 더 한다고 뭐가 달라지니?’ ‘교회에 다니면 부자가 되냐?’ ‘교회에 다닌다고 출세 하냐?’ 이런 말들은 수없이 들을 수도 있고 강요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자꾸 우리에게 하는 것은 계속해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믿음이 잠깐 흔들려서 그들의 말대로 했다면 어떻게 말을 할까요? “거봐 그럴 줄 알았지!” “지가 무슨 교회에 다닌다구!” 이렇게 말하고 빈정거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하도록 해 놓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의 잘못일까요? 그들의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내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옛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여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유혹을 하면 그대로 넘어가서 옛 모습을 따르게 되는 것이므로 심히 경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개중에는 세상적인 삶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런 좋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저 멀리 있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을 알뿐이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겉모습으로는 교회에 다니니까 성도처럼 보이지만 결단코 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불신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육체적인 것도 있지만 이렇게 말을 통한 정신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이럴수록 믿음으로 물리치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믿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사단의 유혹을 받아 우리를 타락시키려고 온갖 계략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욱 믿음의 자세를 견고히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노력만이 고난을 유익으로 바꾸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 위해서는 주님과 합해야 합니다. 주님과 합해져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과수원 지기는 나무를 잘 살펴서 가지치기를 해 줍니다. 좋은 열매를 맺도록 불필요한 가지를 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열매도 악한 것들을 잘라내야만 맺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자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에는 가지들이 많이 붙어있지만, 나쁜 가지도 있습니다. 병든 가지도 있고, 웃자란 가지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것들을 잘라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0-21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顯著)하니 곧 음행(淫行)과 더러운 것과 호색(好色)과 우상(偶像) 숭배(崇拜)와 술수(術數)와 원수(怨讐)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猜忌)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異端)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前)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 곧 성령의 소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忠誠)과 온유(溫柔)와 절제(節制)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2-24)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모든 죄악들을 철저히 끊어버리고 청산하여 다시는 그것들을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악에 물들었던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마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들을 쳐서 물리치지 않으면, 일순간에는 죄를 뉘우치고 깨끗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또 다시 과거의 죄로 돌아가게 되어 온전히 경건하게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생각과 마음과 행동 속에 남아 잇는 모든 죄의 요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완전히 청산하고, 계속적으로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장차 임할 심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내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는 칭찬과 상급을 내리시지만 악을 행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저주와 형벌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살후 1:7-10). 그러므로 나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를 치는 복종은 또 다른 고난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고난과 내 스스로의 고난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주님의 힘을 빌리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는 것이 곧 주님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연합해야 합니까? 기도하는 것이지요. 예배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적인 항목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 있으리라(히 9:27)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그리고 나 스스로의 고난 속에서도 반드시 심어야 하는 것이 바로 주님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도 주님을 심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보다 더 큰 신앙의 유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어리석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 비웃음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일시적일 뿐, 결국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요, 진실한 성도는 반드시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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