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삶이 왜 이럴까? 시편 37편 1-8
다윗이 노년에 이르러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입니다.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통을 배경으로 하여 쓰인 많은 시들이 있는데, 그런 시들의 해답에 해당하는 참으로 지혜로운 시라고 하겠습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도리어 악인이 형통한 것 같은 모순된 현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로 다스리심은 계속되고 있으며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 행위에 따른 심판을 반드시 행할 것이므로 성도들은 당장 악인의 형통과 번영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인내로써 기다리는 지혜로운 신앙을 가질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에 관한 언급이 시편 1편에 나옵니다. 1편은 의인과 악인에 대한 원론적인 수준과 결론적인 내용이라고 한다면 본문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의인이 악인에 대하여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가를 직접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의인과 악인의 삶을 대비시키고 그 결국을 보여주면서 두 가지의 삶 중에서 선택을 하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인의 삶은 언제나 힘과 재물과 형통함이 따르고, 의인의 삶고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가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간혹 의인 중에서 권력이 있고 매우 부유한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감추어 놓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힘없는 백성의 모습으로서 악인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의인이지만 이처럼 구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비관하고, 더 나아가서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한 걸음 더 나가면 나의 삶을 이렇게 내버려 두시고 악인을 형통하게 하는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지나 온 길을 잠시라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의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을 걸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을 해 놓고, 그 길이 형통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을 시샘하지 않았습니까? 왜 내가 이런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는 길을 선택하였던가?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져보고 그 해답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불신자들의 삶이 왜 저렇게 형통한 것인가? 또한 그 형통함이 정말로 좋은 것인가? 나중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내 자신이 선택한 길, 잘못 선택하였던지 아니면 잘 선택한 것인지는 일단 접어두고, 현재 눈앞에 보이는 악인들의 형통함과 사는 모습에 대하여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
시인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로운 자가 복을 받아 행복한 삶을 누리고 행악자는 징벌을 받아 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인이 행악자의 번성을 인하여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 것은 그들의 번성함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와 같이 쇠잔할 것입니다. 풀과 푸른 채소는 그 수명이 일 년을 넘어가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는 너무 형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졸지에 황폐케 되어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시73:19를 보면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猝地)에 황폐(荒廢)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全滅)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졸지에 완전히 멸망당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욥’을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욥의 경우는 사단의 참소로 인한 믿음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험을 이긴 욥은 갑절의 보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졸지에 멸망당하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정말로 의인도 아니면서, 또 그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지도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실제적으로 의인입니까? 악인이 새벽부터 열심히 일할 때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습니까? 교회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공부를 더 잘한다면,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은 다니지 않는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까?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 않고 현재 그들이 잘된 모습을 볼 때에 자존심만 상해하면 안 되겠죠?
만일 그들이 형통한 것이 권모술수에 의한 것이라든지, 아니면 악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기까지의 기간을 성도들이 참고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더 잘되고 싶으니까. 내가 더 잘살고 싶으니까. 이런 모습은 결국 악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은 그대로 내 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과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설사 불신자들이 옳지 않은 방법으로 출세를 하고 재물을 모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인하여 ‘투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투기라고 번역된 말은 ‘키나’로 질투한다, 혹은 부러워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면서도 불신자들의 옳지 않은 방법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평도 하지 말고 투기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신본주의적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결코 인본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는 자들을 바라보아서는 안됨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 맡기는 삶
시인은 악인의 번성으로 인해 불평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며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말합니다. 또한 시인은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명하면서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며 여호와를 의지하면 여호와께서 의인의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아내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악인의 형통을 인하여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는 자신도 악의 올무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자기의 존재 자체, 그 전부를 하나님께 모두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수동적으로 나약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그 분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고, 그 분이 제시하는 삶의 길을 순종하여 좇아가라는 뜻입니다.
이사야 50:10을 보면 “너희 중(中)에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聽從)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黑暗)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依賴)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라는 것은 내가 암흑 속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욥과 같이 모든 재물과 자식들을 한 순간에 잃어버려도, 자신의 몸이 병이 들어 망신창이 되었어도 절대로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고, 원망하지 아니하는 삶의 자세가 바로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3)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의인이 행악자로 인하여 나는 분을 버리고 노를 버려야 하는 이유는 분노의 결과가 행악에 치우치게 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분노의 감정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감정입니다. 의인이 악인으로 인해 분과 노를 발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곧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악인에 관한 심판권을 갖고 계시므로 악인으로 인하여 불평하고 투기함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행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공의로 처리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 하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즉 내가 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화가 나는 것입니다.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가 악인의 길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사람은 ‘땅’을 차지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 1:19-20을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兄弟)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速)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지 못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마 5:5)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면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악인의 번성함에도 불평과 투기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으로만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선을 행하는 자가 온유한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까지 땅을 받았다고 무슨 풍부한 화평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6절을 보면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고 했습니다. 비록 땅에서 나는 소출이 풍성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소출을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출로 인하여 먹을 것에 대한 염려가 없어지게 된다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악인의 형통함, 부요함을 불평하고 투기하는 것, 오래 참지 못하는 것, 풍성함을 부러워하는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속사람이 아직 변화 받지 못하여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의 소유는 아무리 많아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삼하 12:4에 보면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자는 가난한 사람이 마치 자식과 같이 여기는 양 새끼를 빼앗았습니다.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것은 똑 같이 욕심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악인은 소유가 아무리 많아도 만족함이 없으나 의인은 적은 소유라 할지라도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또한 악인의 소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사라지게 되나 의인의 소유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지켜 주십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자는 여호와를 의뢰하여 온전히 그의 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악인의 권세와 부는 결국엔 없어지겠지만 의인의 소유와 생명은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4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基業)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爲)하여 하늘에 간직(看直)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인에게는 썩어 없어질 풍성함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기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과 부요함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여호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악과는 공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죄가 있는 악인을 미워하시고 반드시 멸망시키십니다. 악인이 여호와의 원수가 되어 의인을 핍박하나 그들의 결국은 어린 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질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준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악인이 재난을 당하여 극심한 가난과 빈곤에 처하게 되는 반면에, 의인은 자신의 필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악인의 특징은 남의 것을 꾸고도 같지 아니하는 것이고, 의인은 거저 주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기에 저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라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의 앞길을 예비하시고 그 길을 가는 동안 항상 동행하시어 인도하시며 실족하여 넘어질 때에 새 힘과 용기를 주시어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시인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고 명하면서, 그리하면 영영히 거함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떠나 선을 행한 의인이 땅에 영영히 거하는 복을 받음은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랑하시어 영영히 버리지 아니 하시고 보호하시나, 악인에게는 징벌을 내리시어 그 자손이 끊어지게 하십니다. 의인이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 영영히 거함은 영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땅을 차지함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상속자 즉 자녀로 삼으시어 천국 기업을 물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의인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소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시인은 의인에게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고 명하면서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도 말씀했습니다. 또한 악인이 끊어질 때에 목도하게 될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날을 소망하며 현실의 어려움과 부조리를 참고 견디어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과 정직한 자는 화평한 자입니다. 화평한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 때문에 불화가 있지 아니한 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의 결국은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일시적인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영원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만이 맛보는 것으로 신앙의 결과이며 성도가 바라는 궁극적인 소망인 것입니다.
성도는 악인이 흥왕하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현실의 부조리로 인하여 믿음의 길에서 실족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인내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키며 영적 싸움을 싸워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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