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구주 오신 날 누가복음 2:1-20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참 좋은 날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을 한 것이 인생에 있어서 제일 좋은 복을 받은 것이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복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는데, 여기에 대하여 여러분은 얼마나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성경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만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하늘에서 오셨을까?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왜 아기로 태어나셨을까? 많은 곳을 놔두고 하필이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까? 그리고 왜 오셨을까? 그러면 한 가지씩 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역사적 배경
1절에 ‘이 때에’ 이 때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로 정확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얼마 전부터 태어나신 후 얼마 후까지의 대략적인 기간을 말합니다. 이 때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떤 명령이냐 하면, 모든 사람들은 ‘호적’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름은 무엇이고,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누구고,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두 기록을 하는 것을 ‘호적’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하기 위하여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아기가 태어날 때가 다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최초로 황제의 명칭을 가진 왕입니다. B.C. 27-A.D.14년까지 로마를 통치 한 것으로 역사책에 나오고 있습니다. ‘아구스도’라는 말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숭고한 자, 존귀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입니다. 로마 시민 전쟁이 일어나서 혼란에 빠졌을 때에, 로마의 질서를 잡은 공로로 B.C.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고, 이 칭호는 후대 황제들에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행 25:21, 25). 어쨌든 아구스도는 로마에 속해 있는 모든 나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질서를 잡기 위해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구약 미가서 5:2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族屬) 중(中)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者)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根本)은 상고(上古)에 태초(太初)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누가 주신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다 그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로마 황제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은 당시 수리아의 총독의 이름이 나오는데 ‘구례뇨’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와 람제이라는 사람이 찾아낸 비석에 보니 구례뇨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전후에 두 번씩이나 총독을 지낸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인구 조사는 B.C. 5-4년에 한 번 있었고, 두 번째는 A.C. 7년에 있었는데, 두 번째 인구조사는 사도행전 5:37에 나타납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12살 이상의 여인들도 모두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호적을 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아주 먼 길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5km나 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기로 베들레헴에서 실제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2. 왜 아기로 태어나셨을까?
저도 이 문제를 초신자 때에 깊이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아기로 태어나지 않고 성인으로 오셨으면 좀 더 쉽게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아기로 태어나면 어른이 될 때까지 최소한 20년은 기다려야 합니다. 20세가 넘었다고 인격적으로 성숙해 지는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사람마다 얼마만큼은 더 지나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닌 사람의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하여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후대에 많은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모든 과정을 거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비천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인간의 연약함과 고난을 체휼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의 모든 것을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게 되신 것입니다.
혹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더라도 어른의 모습으로 오시고, 마리아에게 태어나지 않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정말 그랬었나?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물며 갑자기 하늘에서 장성한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끝까지 믿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성탄절은 더욱 뜻 깊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또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고 믿지 않기도 합니다. 어차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도 안 믿고, 어른으로 와도 안 믿고, 육체의 몸으로 와도 안 믿고, 영적인 신으로 와도 안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기로 태어나셨음이 믿어집니까?
또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반드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구약의 모든 것들은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즉 구약시대의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구원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아기로부터 장성하여 제물이 되실 정도로 성장하시고, 그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또 한 가지 중요한 핵심은 ‘부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실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도 다시 죽었다가 분명히 부활합니다.
3. 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을까?
하나님의 관심이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 힘 센 사람보다 연약한 사람에게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 중에는 부자도 많고, 강한 사람도 많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 마음은 ‘가난한 자’이며 ‘겸손한 자’이기 때문에 크게 쓰임을 받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을 도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가서 4:6을 보면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또 누가 복음 14: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고 하였으며, 8절에도 보면 천사가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전한 것을 보게 됩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는 계층이었던 목자들이 찾아와 경배하는 것을 연결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만 낮고 천한 자리에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연약한 아기로 오시고, 온 세상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실 인자이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목자라는 매우 천시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또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천대받는 자들을 중심으로 전개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어린 다윗은 집안의 막내이며 어렸기 때문에 형들은 다 나간 전쟁터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양떼를 지키는 일을 도맡아서 할 뿐인 가장 연약한 자요, 무시당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그에게 보내어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이니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저 묵묵히 양떼를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그 날 밤에 목자들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찬이슬을 맞으면서 묵묵히 양떼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갔습니다. 목동들에게 천사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다윗이 바로 혈통적으로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왕이 된다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목동들에게는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몇 명의 아기가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른 아기들도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매우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두 가지 시건이 있었습니다. 한 시선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이 세상의 모든 연약한 자,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원의 표적이고, 또 한 시선은 예수님께서 비천한 외양간의 구유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배척하는 시선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영광된 모습만을 생각했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 한 번이라도 잊으신 적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낮고 천한 자, 힘들고 어려운 자들을 항상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6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바로 약한 자들을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자만, 교만은 금물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는 자기를 비하하거나, 자기를 학대하거나 하는 것도 역시 절대로 금물입니다. 약하고 비루한 자는 자기 인생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강하고 존귀한 자는 약한 자들을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약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약하지만 성실하게 맡은바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여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목동들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목동들은 천사가 전하는 소식을 듣고, 즉시 촌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구주께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누가 들어도 믿기 어려운 소식이지만 가난한 심령을 가진 그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달려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순종하는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마태복음 2:5,6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 그 소식을 들었지만(마 2:2) 소동만을 일으켰을 뿐,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서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제쳐두고 목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준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대제사장들을 대신하여 목자들을 선택한 것ㅎ이 아니라, 믿음으로 즉각 순종하는 자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이요(히 11:8),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고 늘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가 배운 것과 비교해서 다를지라도, 내 생각과 말씀이 다를지라도 일단 먼저 ‘아멘’하고 순종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 줄을 아십니까? 순종할 때에 은혜가 임하고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진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에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항상 내편입니다. 이처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편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되시고, 순종함으로써 수많은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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